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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서 불러낸 내 아들 - 호세아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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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7년 12월호>
1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도다.2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그들에게서 멀어져서 바알들에게 희생제를 드리며, 새긴 형상들에게 분향하였도다.
3 또한 내가 에프라임에게 그들의 팔을 잡고서 걷도록 가르쳤으나, 그들은 내가 그들을 고친 것을 몰랐도다.
4 내가 사람의 줄,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내가 그들에게 그들의 턱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들 같았으며, 내가 그들에게 음식을 두었노라.
성령님께서는 계속해서 출애굽에 대해 강조하신다(호 11:1; 12:9,13; 13:4). 소선지서에서 꾸준히 언급되는 내용은 바로 구출에 관한 것이다(암 2:10; 3:1; 9:7, 미 6:4; 7:15, 학 2:5 참조). 이 구출은 이집트로부터의 구출이기 때문에, 안전이나 도움을 위해 이집트로 다시 들어가려는 시도는 모두 사탄적이다(렘 42, 43장에서 예레미야가 겪었던 고난을 참조).
『...아이였을 때...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도다』(1절).
이 구절에서 출애굽기 4:23과 더불어 결정적인 교리를 발견할 수 있다. 현대의 랍비 선생님들이 “주의 고난받는 종”(사 49-53장)과 이스라엘 민족을 혼돈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집합적인 단위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주어졌던 “나의 아들”(MY SON)이라는 똑같은 이름을 받은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출 4:23, 마 2:15). 이집트는 성경에서 가장 지옥같은 장소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바빌론이나 로마보다는 조금 나은 곳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들” 가운데 누구라도 결코 거기에 있기를 원치 않으셨다(마 2:15, 엡 2:1-3 참조).
『나의 아들』(my son)이라는 표현에 관해 많은 성경들(NRSV, RSV, LB 등)은 요한복음 3:16에서 헬라어 형용사를 복합어로 번역하기를 거부하고 독단적인 편견으로 “낳다”라는 뜻의 “begotten”을 생략해버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흠집을 내었다. 그들의 말대로 “독생자”(only begotton son)가 아니라 “독자”(only son)가 맞다면(요 3:16) 성경은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이는 성경을 조금만 살펴봐도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욥기 38:7을 보면 아담 이전에 하나님께는 “아들들”이 있었으며, 또 홍수 이전에 창세기 6장에서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있었고, 또 침례인 요한의 고조 할머니가 태어나기 전에도 하나님께는 “첫태생 아들”(firstborn son)이 있었다(출 4:23).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께는 수십만의 아들들이 있다(히 2:13).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자”(only son, RV, RSV, NEB, Good News, Living Bible 등)라고 생각할 정도로 성경이 어리석게 기록되었다면 아무도 성경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였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낳으신 첫 번째 아들이었기 때문이다(시 2:7). 천사들과 이스라엘은 낳지 않으셨으며, 심지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요 1:12)조차도 실제적인 출생으로 낳지 않으셨다. 이제껏 살았던 단 한 사람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실제적인 육신으로 태어나셨던 것이다.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그들에게서 멀어져서...』(2절).
본문의 의미는 간단하다. 즉, “내가 나의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불렀다(스 9:11, 마 23:30,31, 렘 35:15, 단 9:6, 암 2:11, 렘 25:4; 29:19, 슼 1:4,6 참조). 그리고 나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을 불렀을 때 그들은 즉시 등을 돌렸고 “그들에게서 멀어졌다”(행 7:52; 28:25, 롬 11:3, 살전 2:15, 계 16:6 참조). 즉 그들은 선지자들에게서 귀를 막아버렸고 마귀에게 사로잡힌 왕(왕상 13장)과 동성연애하는 제사장들(호 9:9 주석 참조)의 “계명을 따라 행하였다”(호 5:11).
『그들의 팔을 잡고서 걷도록 가르쳤으나...』(3절).
아버지가 자식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듯이 하나님은 에프라임에게 걷는 법을 가르친다. 어린 아이는 걷는(행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요일 1:6,7, 골 1:10; 4:5, 엡 4:1; 5:2 참조.).
『...내가 그들을 고친 것을 몰랐도다』(3절).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아팠었다(출 15:26 주석 참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최초의 표적들 중 하나는 아픈 민족을 치유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신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출 4:6 주석 참조)
『내가 사람의 줄,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4절).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다(10절).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줄로 이끄신다(4절). “의”의 끈으로 묶이는 것은 곧 자유를 의미하고(『그들의 턱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들 같았으며』), 하나님께 둘러싸이는 것은 생명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그들에게 음식을 두었노라』). 현대 공산주의 용어가 된 “자유”는 혁명을 위한 용어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끊어버리는(시 2:3) 용어로 되어버렸다. 그러나 성경에서는(요 8:36)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유를 말한다. 죄에 묶여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자유롭지 못한다(롬 6:20). 하나님께 묶여 있는 사람은(골 3:14) 방종을 자유라고 여기지 않는다(갈 5:13). 아무리 어원을 뒤적거리며 야단법석을 떨어도 죄인들이 죄를 사랑해도 된다는 것을 정당화시켜 주지 못한다. 4절의 줄은 멍에가 아니라 느슨한 끈이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놓는 쇠사슬이 아니라 흘러내리지 않게 하는 멜빵이다.
5 그가 이집트 땅으로 돌이키지 못할 것이요, 앗시리아인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이는 그들이 돌아오기를 거절하였음이라.
6 칼이 그의 성읍들에 거하여 그의 빗장들을 소멸하고, 그들을 삼키리니, 이는 그들 자신의 계략들 때문이라.
7 내 백성이 나에게서 물러서는 경향이 있도다. 비록 그들이 지극히 높으신 분을 불렀으나, 그분을 높이는 자는 아무도 없도다.
8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포기하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내어 주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만들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안에서 돌아서서, 내 마음의 돌이킴이 모두 불붙는도다.
9 내가 내 분노의 맹렬함을 행사하지 아니하며, 내가 돌이켜 에프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이며, 너희 가운데 계신 거룩한 분임이라. 내가 성읍으로 들어가지 아니하리라.
10 그들이 주를 따라가리니, 그가 사자같이 포효할 것이요, 그가 포효할 때면, 그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 것이라.
11 그들은 이집트에서 나온 새처 럼 떨 것이요, 앗시리아 땅에서 나온 비둘기처럼 떨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두리라. 주가 말하노라.
12 에프라임은 거짓말로, 이스라엘집은 기만으로 나를 에워싸나, 유다는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며, 그 성도들과 더불어 신실하도다
5절은 호세아 9:3과 8:13과 모순인 것처럼 보이지만 본문이 다르다. 여기에서 말하는 “돌이킨다”(return)라는 말은 에프라임이 앗시리아 왕의 공격으로부터 구원 요청을 위해 이집트로 돌아간다는 내용이다(호 7:11, 사 31:3 참조).
1. 이스라엘의 첫 번째 노예생활 때 이집트의 왕은 앗시리아인이었다(출 1:8 주석 참조).
2. 이집트나 이사야 10:5-10의 “앗시리아인”이 그들의 통치자가 될 것인데 이는 이스라엘이 요구했던(삼상 8:5) 자를 받아들일 것인데(슼 11:15) 그 자가 “자기 이름으로” 오는 자이기 때문이다.
3. 하나님께서『앗시리아인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5절)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앗시리아인을 “이집트의 홀”(슼 10:11)과 연관시키셨다. 적그리스도는 이스라엘과 앗시리아를 통치할 것이기 때문에(사 27:12,13) 유대인들이 이집트로 도망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는(렘 44장 참조) 중요하지 않다. “앗시리아 왕”은 두 곳에서 그들의 왕이 될 것이다.
6절은 호세아 10:6에 대한 언급이다. 이스라엘은 그 가지가 다 없어져버린 나무와 같다. 이에 대한 비유는 요한복음 15:6과 에스겔 15장에 나타나 있다. 이 나무는 호세아 14:6에서 회복된다.
성장해야 할 나무의 연한 가지가 휘어지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타락”(backsliding)으로 물러서기를(7절) 좋아한다(렘 3:12 참조).『비록 그들이 지극히 높으신 분을 불렀으나』(7절)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7절이 어떻게 2절을 해석하는가를 보라). 디모데후서 3:1-6의 라오디케아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이들은 “모양”은 있지만 능력은 없다. 자신을 높였던 에프라임(호 13:1)은 낮아지게 된다(눅 14:11). 대환란 동안 “앗시리아인”은 “자신을 높인다”(살후 2:4).
『내가 어찌 너를 포기하겠느냐?』(8절).
여기에서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 호세아를 통해 전달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 때문에 우신다(요 11:36). 하나님은 어머니처럼 사랑하시고(사 66:13) 아버지처럼 사랑하신다(시 103:13). 하나님은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가엾게 여기신다(시 103:13). 하나님의 큰 사랑은 세상이 줄 수 없었던 또 앞으로도 줄 수 없는 큰 것을 주셨다(엡 2:4 주석 참조). “하나님의 선하심”(롬 11:22)은 죄인을 회개하도록 인도하며, 이에 대해 죄인이 저항하여 거부할 때 하나님은 비통해 하시고(창 6:6), 마음이 불로 타는 것 같으시고(호 11:8), 슬퍼하시고(사 48:18), 가엾게 여기신다(신 32:36). 호세아 13:6에서 고문과 살인과 대량학살이 일어나는 동안 하나님은 호세아 13:14에서 구원과 부활을 이루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함이라는 성품이(하나님의 핵심적인 성품이다) 연민이라는 성품과(역시 하나님의 핵심적인 성품이다) 충돌될 때 “계획”을 바꾸실 수 있다(출 32:14 참조).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비통해 하시고, 슬퍼하시고 동정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돌이키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고, 멸시하고 무시해 버린다면 그러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진노로(요 3:36), 원수갚음으로(히 10:30), 조롱으로(잠 1:26 주석 참조) 공포로(신 32:20-25, 애 1-4장) 바뀌어진다. 이것이 거룩한 성경에 계시된 거룩한 하나님이시며 “현대인”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다. “현대인”은 자신의 일과 생활에서의 기쁨이 방해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짓는 죄를 벌하신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어 한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매번 그 일을 수행하신다(민 16:49).
거룩한 성경에 계시된 거룩한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다(요일 1:1-2, 히 4:15).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 사이에는 간격이 있는데 죄없는 사람(히 2:14)만이 이 간격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 그러나 맹신하는 종교, 신봉하는 철학, 과학, 추종하는 이데올로기, 신비스런 체험 등 기타 다른 모든 것은 이 간격을 이어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곧바로 불못으로 끌고 갈 뿐이다(잠 14:12 주석 참조). 하나님은 선하시고(본문), 하나님은 엄하시다(호 13:16). 이 사실을 의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비도덕적이든지 아니면 오로지 사랑만 있는 분이다.
『내가 내 분노의 맹렬함을 행사하지 아니하며...』(9절).
하나님께서 아드마와 스보임에서 한 것처럼 행사하지 않으실 것이다(8절).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멸망당한 두 성읍이다(신 29:33).『내가 돌이켜 에프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9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멸하셨다(호 13:3,7,8,13,16 참조)! 이런 것으로 1500개의 “성경 속에서의 모순들”이라는 책을 쓴 어리석은 자들도 있다. 그러나 본문은 “나는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남는 자들을 구원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11절을 주의해 보라.『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두리라.』 호세아 14:5은 더욱 분명해진다. 이스라엘은『백합같이 자라겠고, 그의 뿌리들은 레바논같이 박힐 것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끝내지 않으셨다.
『그가 사자같이 포효할 것이요...』(10절).
대환란 끝에 유다지파의 사자는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다(슼 8:7, 사 42:13, 욜 3:16, 암 1:2). 그 사자가 울부짖을 때(사 42:13) “다른 사자들”(욥 4:10, 겔 19:6; 38:13, 벧전 5:8, 나 2:11)은 고랑에 머리를 처박는다.
또한 이 “포효”는 “환란 후에 즉시”(마 24:29) 이루어진다. 또 이스라엘을 “사방에서”(마 24:31) 모으는 신호인 “큰 나팔소리”(마 24:31)가 날 때에 유대인들은 서쪽(사 43:5)과 북쪽(사 43:6)에 있는 “바다의 섬들”(사 11:11)로부터 돌아온다. 본문은 분명하게 아모스 9:4, 이사야 11:11에서 언급한 이스라엘의 회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