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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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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6월호>
『호세아』의 서론호세아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또는 ‘오 하나님 구원하소서’란 의미를 지닌다. 이 이름은 민수기 13:8,16에 여호수아로도 주어지는데 이것은 신약의 ‘예수’란 이름과 동일하다(행7:45, 히4:8). 문자 그대로 ‘그는 구원자’라는 말이다. 동명이인으로서 호세아는 열왕기하 15:30과 역대기상 27:20 그리고 느헤미야 10:23에 등장한다.
호세아는 유다의 웃시야, 요담, 아하스와 히스키야 시대의 선지자였다. 그는 이사야 선지자와 동시대인이었으며 그 연도는 대략 B.C.790-710년이다. 이 기간은 거의 80년에 가까운데, 호세아가 50년이 넘게 예언했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그렇지 않다는 눈치다. 그들은 호세아의 활동시기를 B.C.750-725년으로 약 25년 동안이라고 국한시키니 말이다. 밥 존스는 1883부터 1968까지 활동했고, 모르드케 햄(1878-1959)이 80살이 넘게 복음을 전했으며, 죠지 뮬러(1805- 1898)가 60년 이상 활약했다면 호세아가 52년 동안 선지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라 하겠다.
호세아는 선지자로서 구약 선지자들의 공통점을 그대로 갖고 있다.
1. 그는 이 사회와 제도를 변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예언하지 않았다.
2. 그는 모든 종교의식의 통합에 반대하는 분리주의자였다.
3. 그는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경제, 사회적인 구조에 있지 않고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4. 그는 이 땅에 평화가 정착되어서 유토피아가 될 것이라고 외치지 않았다.
5. 그의 모든 메시지는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과 그 분의 거룩하심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상대가치나 상황윤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6. 그는 하나님께서는 아무 일에도 관여하지 않으시는, 무관심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개인뿐 아니라 민족까지 진노하시고 심판하실 것이라 강조했다.
7. 그는 그가 죽은 지 2500년도 넘는 기간 안에 일어날 일들을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호세아는 선지자 예레미야, 아모스, 에스겔, 오바댜같이, 사회 구원론이나 왕국복음을 전하는 현대의 설교가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호세아서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그 수도 사마리아가 멸망하기 전, 여로보암 2세 때의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적인 풍요와 부를 동반하여 극치를 이루던 우상숭배의 죄악들을 열거하며 하나님의 응징이 이루어지면서 일어날 사건들을 지적해 준다. 사마리아가 멸망한 것은 유다의 히스키야 제 6년이며 호세아 1:2에 이미 예언된 것이었다. ‘주의 말씀의 시작’이라는 말씀을 호세아 1:2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말씀을 기록해 두었던 구약의 선지자들 가운데 최초의 선지자임을 알 수 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믿어야 한다(대하20:20). 그러나 선지자는 발람과 같이 하나님의 선지자(신18:22)가 아니라 마귀의 선지자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며(렘23:9,14,15,21,25, 26, 28) 그들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곧 호세아서를 영적으로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로버트슨(Robertson), 메이첸(Machen), 와필드(Warfield), 커스터(Custer), 벌코프(Berkorf) 같은 신학자나 주석가들로부터 딘 버간(Dean Burgon), 클라렌스 라킨(Clarence Larkin), 무디(Dwight L. Moody), 펨버(Pember) 그리고 로버슨(Lee Robertson) 같은 하나님의 일군들을 분리해낼 수 있는 능력이다.
어떤 사람들이 환상이 기록된 책을 유식한 사람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청컨대 이것을 읽어주시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봉인되어 있으니 읽을 수 없군요.’ 그러나 그 사람들이 이번에는 그 책을 무식한 자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청컨대 이것을 읽으라.’ 그러나 그 무식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식해서 읽을 수 없습니다.’ (사29:11,12) 이 시대는 예언에 관한 한 무지한 세대이다. 그 원인이 어디에서 왔겠는가?
파수꾼이 눈이 멀었다면 그를 믿고 사는 성읍 사람들의 안전은 어떠하겠는가? 잠자고 눕고 조는 것만 좋아하여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사56:9-10)
1:1-5 유다의 왕들로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와 히스키야의 시대요, 이스라엘 왕으로는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주의 말씀이라. 호세아를 통한 주의 말씀의 시작이라. 주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가서 너는 음란한 아내를 얻어서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는 그 땅이 주로부터 떠나 크게 행음하였음이니라.” 하시더라. 그러므로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그녀가 임신하여 그에게 아들을 낳았더라. 주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시기를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있다가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을 것이며, 이스라엘 집의 왕국을 그치게 할 것이요,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더라.
호
세아는 주께로부터 음란한 아내를 얻어서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호세아는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여서 음란한 아내 고멜을 취했고 그녀는 호세아에게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바로 이 이야기가 많은 주석가들을 의심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한다. 선지지가, 거룩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일꾼이 직업적인 매춘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어떻게 음란한 여자와 결혼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셨다는 것인가?(롬3:4) 그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면 호세아를 통한 주의 말씀의 시작도 처음부터 거짓말로 시작되는 셈이다. 바로 그러한 주장을 일삼는 무리들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이단으로부터 바톤을 이어받은 “풍유주의 집단”이다.
“성경의 예언은 비유적이고 풍유적이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곧장 판테누스(Pantenus), 오리겐(Origen) 그리고 클레멘트(Clement) 등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그 사상을 유전받은 학자들은 칼빈(John Calvin), 제롬(Jerome), 케일(Keil), 하버닉(Haver- nick), 행스텐버그(Heng stenberg), 로센뮬러(Rosenmuller), 루스(Reuss), 아이크혼(Eichhorn), 힛칙(Hitzig) 등이다(이집트와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어 독일의 이성주의를 거쳐 정통 보수주의라는 허울 아래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사도직 계승이 이 학자들의 사상과 접목되어 있는 점을 주시해 보라). 바로 이러한 풍유주의 집단들은 재림에 관한 성경을 다룰 때면 구약의 2/3 이상들을 재빨리 가져가 발로 ‘뻥’하고 차버려서 허무주의란 골대 안에 보기 좋게 골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호세아서 1:1-5은 실제적인 역사이다. 만약 2절이 사실이 아니고 비유라면 1절은 어떠한가? 4절과 5절이 역사 가운데 성취되었는데(왕하9:14; 10:14; 15:10,17) 2절과 3절은 아직도 그대로인가? 칼빈은 이 이야기가 문자 그대로 사실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선자지의 도덕심이 그러한 결혼은 용납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칼빈은 그것을 일종의 알레고리, 즉 상상의 이야기로 보았고, 중세의 유대 학자들 또한 하나의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성경의 진리들을 파괴하는 비평가들에게 주어지는 한 가지 해답이 있다. 그것은 예언의 성취가 많은 경우, 특히 재림에 대해서 이중성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5절에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일어나는 큰 전쟁이 ‘그 날에’ 있을 것이라 예언되었는데, 우리는 바로 이 단락에서 성취된 글들을 열왕기하에서 찾아보았다. 바로 이 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아마겟돈 전쟁(왕하9:15의 싸움이 아니라 크고도 거대한 싸움이다)에 관한 사건들과 사실들의 기록들을 발견하고 찾아내어서, 비교하고 대조하고 연구하여서 성경의 진리들을 조명해 줄 수 있는 빛이 그들 안에 없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어떤 무천년주의자도 어떠한 후천년주의자도 대단한 문법학자라 할지라도 뛰어난 언어학자라 할지라도 성경적인 학자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무지와 죄와 완고함과 어리석음이 그들을 암흑으로 이끄는 것이다(엡4:17,18).
5절의 ‘그 날에’라는 표현(2:21)은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과 같다. 이와 같은 표현은 선지서들에 100여 번 나타난다.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이 ‘날’들은 재림을 묘사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이 다시 모일 것이라는 신비(1:10,11; 2:14-23; 3:4,5; 6:1-3; 8:2; 10:12; 13:14; 14:4-9, 롬11:25)가 성경 교리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구약의 주제가 재림이라고 한다면 호세아서의 주제는 구약의 주제 안에서의 이스라엘이 회복이다. 또 구약이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인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다룬다면 호세아는 그 축소판이다.
그래서 호세아는 음란한 아내와 결혼했다. 그의 삶은 에스겔의 삶처럼(겔12:4-7)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디블라임의 딸 고멜은 음란한 자식들을 낳았고 이 음란한 자식들이 그 땅이 주로부터 떠나 크게 행음하고 있음을 증거하게 된다. 호세아의 아들 이스르엘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심’ 또는 ‘하나님께서 흩으심’의 뜻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흩으실 계획을 갖고 계심을 말한다. 4절의 이스르엘의 피라는 표현은 잔인한 예후(왕하10:31)로 인해 이 피가 예후의 집에 복수되어지고 이스라엘 집의 왕국은 그치게 되며 이스라엘 민족은 우상숭배로 인해(8:5,6) 이방인들 가운데 흩어져서(8:7) 열매없는 무화과나무가 되는 것이다(마21:19).
예언에는 이중성이 있다. 느부캇넷살왕은 열왕기하 24장과 역대기상 36장에서 예루살렘을 파괴했다. 그러나 그 예언의 성취는 2500여 년 후에 다시 이루어질 것이다(렘32:36-41). 또한 예레미야 51:62-64은 바빌론의 멸망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성취는 계시록 18:2에서 이루어지는 미래의 예언이다. A.D.70년에 티투스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는(눅21:24) 계시록 11:1-3의 예루살렘 멸망의 예행연습이다. 독자들이 ‘주의 날’이나 ‘그 날에’라는 표현을 볼 때마다 기억해야 할 사실은 그러한 사건들이 B.C.400년에 이미 다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로부터 25세기가 훨씬 더 지난 후에 UN을 비롯한 모든 세계 평화기구들과 세계정부의 몰락과 패망을 내다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4절의 ‘조금 있다가’란 시간은 하나님께는 매우 짧은 시간일지도 모른다(벧후3:8). 그러나 실은 이 기간에는 2500여 년의 간격이 있는 셈이다. 계시록 16:16에서 히브리어로 “아마겟돈”(무리를 이룬 언덕)이란 므깃도 언덕에서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승리하는 장면이 계시록 19:14-21에 묘사된다. 호세아 1:11의 ‘이스르엘의 날’이란 표현도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패배당하는 그 시간을 훨씬 뛰어넘어 교회시대의 맞은편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견하는 것이다(호세아 1:10을 바울이 로마서 9:25에서 인용하고 있음을 주시하라). 따라서 이스르엘이란 다음의 세 가지와 연관된다.
첫째, 앗시리아 왕이 이스라엘 군대를 패배시키고 이스라엘을 포로로 삼는 것(왕하17)
둘째, 동쪽으로부터 오는 2억의 군대에 의해 이스라엘이 패배하는 것.
셋째, 그 2억의 군대와 적그리스도의 패배,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이 그것이다.
1장에서 호세아의 사역이 시작된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과 결혼한 후에 그 분을 거역하고 변절한(5:7) 한 민족에게 강조를 두고 있다. 이 민족은 우상숭배의 죄를 지었는데(9:10) 그것은 영적으로 간음이라고 구약성경에서 드러난다(민25:1-8). 즉 구약에서의 우상숭배는 신약에서 간음이란 죄와 같이 분류된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간음한 아내가 버림받는 것처럼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나간 아내였으며 이혼 증서가 이미 그녀의 손에 쥐어진 것이다(신24: 1).
영적으로 적용한다면 마태복음 19:7의 이혼증서는 변개된 성서들이다. 고린도후서 11:1-3의 한 순결한 처녀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떨어져나가 세상에서 인정받는 학자들과 그들의 사상들을 수용하여서 그들을 마치 신들로 받들고 존경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손에 변개된 성서들을 쥐어 주셨다. 때로 그 성서들은 <개역 한글판 성경>으로, 그리고 <표준새번역>이나 <현대인의 성경>으로, 그리고 미래에는 어떤 다른 이름으로 주어질 것이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먼저 버림받은 아내로서(2:3,9-13) 거부당한 민족으로서(4:6; 7:13-16; 9:17) 언급하지만 후에 그녀의 남편인 주님과 화해할 것을 내다보고 있다(1:10; 2:14-23, 사54:5).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화해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들을 교회를 이루는 개개인의 영적인 회심이라고 “교리적으로” 적용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라 할지라도 반성경적이고 비성경적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