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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고 인내한 에베소 교회 시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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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06월호>
-------- - 에베소 교회 시대 이전 역사 - --------교회 시대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유대적 배경지식이 주는 조명은 상당히 클 수밖에 없다. 유대인은 구원의 근간이 되는 민족이요(『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라』 - 요 4:22),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나은 점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모든 면에서 많으니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들이 맡겨졌음이니라』(롬 3:1,2). 초대 교회 시대는 특히 유대인이 중심이었던 구약의 경륜이, 교회가 중심이 되는 신약의 경륜으로 바뀌는 과도기적 상황 속에 있었다. 따라서 당대의 교회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를 전후한 유대의 역사를 먼저 알 필요가 있다.
주 예수께서 초림하시기 전으로 역사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 보도록 하자. 우리가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는 스룹바벨 성전 재건 이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다시 경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왕은 세워지지 않았으나 제사장 가문이 그 땅의 실질적 귀족이요 통치자로 군림하였다. 제사장들과 함께 유대 사회를 이끌어가던 또 다른 그룹이 있었는데, 바로 산헤드린 공회였다. 학자들은 산헤드린이 B.C. 3세기경, 그리스가 그 땅을 차지했던 시대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산헤드린은 민수기 11:16에서 모세가 임명했던 70인의 “장로회”에 그 기원을 두었기에 의장을 포함하여 71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자문관과 법률 해석인들의 연합 기관이었다. 산헤드린은 로마 통치하에서도 일부 사안을 제외하고는 입법과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강력한 의결기구요, 나름대로의 절차와 재심 제도 등을 갖추고 있던 선진적 기관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후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재판할 때만큼은 그 절차적 정당성이 철저히 무시되었으며, 날치기로 판결이 진행되었다. 이 대목에서는 이런 말씀을 떠올려 봄직하다. 『진노는 잔인하고 성냄은 사나우나, 시기 앞에 누가 설 수 있으리요?』(잠 27:4) 어쨌거나 유대 사회에서 일단의 리더십이 확보된 상태였음에도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독립된 국가로 존재하지는 못했다. “국제 사회”에서 이스라엘은 중동 땅의 지배권을 확보한 나라에 복종해야 하는 약소민족 공동체에 불과할 뿐이었다. 바빌론, 메데-페르시아, 그리스, 시리아, 이집트, 로마 등 어떤 국가가 패권을 장악하느냐에 따라 이스라엘의 상황은 이리저리 급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 B.C. 2세기경,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시리아가 유대 땅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는 일이 발생했다.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4세(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정책적으로 유대교의 예배와 관습들을 억압했고, 유대 지역의 헬라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특히 B.C. 167년에는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 피를 뿌리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돼지를 불결한 짐승으로 여기는 유대인들로서는 분노가 끓어오르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일을 계기로 뭉친 유대인들이 마카비 형제를 중심으로 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B.C. 165년에는 성전을 다시 하나님께 봉헌할 수 있었으며, B.C. 63년 로마에 정복당하기 전까지 잠시나마 주권국으로서 면모를 갖출 수 있었다. 덧붙이자면, 이때를 기념하는 명절이 성경에서 수전절(요 10:22)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누카”이다.
-------- - 초림 당시 있었던 분파들 - --------
혁명에 성공한 마카비 일가는 스스로 제사장직을 취하였고 실질적으로 유대 땅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성전 경배를 회복하자는 지극히 “근본주의적인” 초심을 차츰 잃어버린 그들은, 종교를 이용하여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만 관심을 뒀으며, 헬레니즘에 빠져들게 되었다. B.C. 135년부터 통치하기 시작한 히카르누스와 이에 동조한 고위층 제사장 가문은 급기야 혼의 불멸이나 영적인 존재들을 믿지 않는 유대교 분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분파가 바로 사두개파이다(행 23:8). 사두개파는 기득권층으로부터 시작된 분파이므로 정치적 영향력은 막강했으나(사도행전 5:17을 보면, 대제사장과 함께한 무리가 사두개파였음이 명시되어 있다), 백성들로부터 호응을 크게 얻지는 못했다고 한다.
백성들은 설령 율법을 잘 알지는 못할지라도, 전통으로 율법을 해석해야 한다는 기조를 따르고자 했다. 이러한 입장을 표방했던 유대교의 또 다른 핵심 분파가 바로 바리새파이다. 그 명칭 자체가 “분리된 사람”을 뜻하는 바리새파는 모든 헬라 문화나 세속적인 것에서 분리하는 엄격한 율법주의를 고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곧 종교적 형식주의로 전락해 버렸다. 바리새인들은 형식을 잘 지킨다는 우월감 속에서, 더 중요한 율법과 공의와 자비와 믿음은 빠뜨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다(마 23:23,24). 결국 초림 당시 그들은 자신들 또한 여타의 백성과 다름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눅 18:9-14). 바리새파에 속했던 사도 바울처럼 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열성은 있었을지 모르나, 올바른 지식을 따라 되지는 않았기에(롬 10:2) 거치는 반석에 걸려 넘어졌던 것이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사두개파나 바리새파가 되는 일이란 평범한 백성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백성들은 율법의 세세한 부분까지 교육받을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대에는 두 분파 중 어느 쪽에 속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엘리트”라고 불릴 만한 일이었다. 평범한 백성은 다만 성전과 회당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며 그들에게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믿음을 고수하고 있을 뿐이었다. 비록 정통 유대인 출신은 아니었지만 그 피가 흐르고 있던 사마리아 여인의 입을 통해서도 이러한 점을 엿볼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아가 오실 줄을 아나이다. 그분이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일들을 말씀해 주실 것이니이다』(요 4:25).
-------- - 회당에서의 경배 - --------
성전에서 드리는 경배에 대해서라면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 개념을 어렴풋하게라도 갖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기명과 공간 구성, 제사와 의식의 방법에 대해 구약성경이 자세하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당에서의 경배와 관련해서는 많이 생소할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의 일상 속 유대교를 이해하는 데는 오히려 이 회당의 기능을 파악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바빌론 포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 또 천하 각국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번영함에 따라 유대 땅 안팎으로 점차 유대인 공동체가 생겨났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중 절대다수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기에 기껏해야 일 년에 몇 번 성전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이러한 까닭에 율법을 듣고 기도하며 예배하는 등의 신앙생활을 위해 새로운 공간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지중해 근방의 여러 지역에 회당이 하나둘 생겨났다.
회당은 그것이 소재한 지역의 장로들이 주재하였으나 히브리인이라면 누구나 사회할 수 있는 권위가 부여되었다(마 4:23, 눅 4:16-30, 행 9:20-22; 13:5). 다만 예배 준비는 회당 책임자가 도맡았다. 워커에 따르면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에는 기도, 구약성경 낭독, 그 해석을 선포하는 일, 때때로 설교 등이 있었다고 한다. 회당은 성전을 대신하여 빠른 속도로 유대 종교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다. 심지어 A.D. 70년에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에도 회당들은 여전히 건재했기에 유대교 자체가 붕괴한 것은 아니었다.
-------- - 회당에서의 복음 전파 - --------
우리 주님께서도 그러셨고, 그분의 사도들도 진리를 선포할 장소로서 회당을 자주 이용하곤 했다. 이유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점을 오해하여 초대 교회 시대의 지역 교회 모임과 예배가 회당에서, 그것도 안식일에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의 첫날, 즉 일요일에 모인다(행 20:7).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이 서로 다르듯이, 안식일과 주일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어쨌거나 수많은 회당들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되셨음은 분명하며(행 6:9; 9:20; 13:5,14; 14:1; 17:1,10; 18:4,19; 19:8), 심지어는 야이로, 크리스포, 소스데네와 같이 회당장 출신들 중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당시 회당 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는 데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를(요 9:22; 12:42) 염두에 둔다면, 회당장이나 되는 사람이 그것도 여럿이 주님을 영접했다는 사실은 꽤 놀라운 일이다. 필자는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모세의 글들이 읽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예로부터 각 성읍에서 모세를 전파하는 자들이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이 읽혔음이라』(행 15:21). 성경은 구약이건 신약이건 언제나 일관되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공으로 하는 “왕국”을 증거하고 있다. 따라서 그 말씀을 주의 깊게 듣기만 했다면 당대에 유대인들이 시기하고 로마인들이 처형한 그 죄수,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성경의 주인공이시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성경을 상고하라. 이는 너희가 성경에 영생이 있다고 생각함이니, 그 성경은 나에 관하여 증거하고 있음이라』(요 5:39).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