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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스카(Zisca)에 대한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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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2년 11월호>

지스카의 본명은 존 드 트로크즈노우(John de Trocznow)였다. 지스카라는 이름은 그가 눈을 하나 잃었기에 붙여진 ‘애꾸눈’을 의미하는 보헤미아어이다. 보헤미아 본토인으로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폴란드 황제 윈세슬로스(Winceslaus)를 돕기 위해 튜톤족(Teuton, 유틀란트에 살던 게르만족의 한 부족) 기사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자 명예 훈장을 받고 윈세슬로스의 궁정으로 복귀한 그는 존 후스 사건 때 콘스탄스에서 왕의 백성들에게 자행된 유혈 사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언명했다. 윈세슬로스는 그것을 복수하는 일이 자신의 권한에 있지 않음을 한탄했는데, 바로 이 순간부터 지스카가 자국의 종교적 자유를 강력히 주장하려는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1418년, 해악의 온상이었던 공회가 해산되고, 그 해 여름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위스그라데(Wisgrade) 성에서 총회가 열렸다. 그들은 지스카를 따라 손에 무기를 들고 황제에게 몰려가 적들로부터 그를 지켜 주겠다고 제안했다. 황제는 무기를 적절히 사용하라면서 이를 허락했다.
윈세슬로스의 후임은 남동생 시지스몬드(Sigismond)였다. 그는 스스로를 개혁자들에게 혐오스러운 존재로 만들었고, 자신의 정부에 불쾌히 여겨지는 모든 것을 제거했다. 이에 지스카와 동료들은 황제와 교황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40,000명의 군사로 필센(Pilsen)을 포위 공격하여 성을 점령했다. 또 보헤미아 남서부 지방을 굴복시켜 개혁자들의 군대가 크게 증강되었다. 닷새 밤낮을 맹렬히 전투한 끝에 멀다우(Muldaw) 길목을 장악하자, 놀란 황제는 터키 국경에서 병력을 빼내어 보헤미아로 진격시켰다. 그러나 지스카는 프라하를 정복하고 1420년 8월 19일 소규모 부대를 격파하여 황제로 하여금 서둘러 병력을 다시 모집하게 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스카는 프라하에서 약 40마일 떨어진 견고한 언덕 위에 진영을 요새화하여 그곳을 타볼 산이라 불렀고, 거기서 일단의 기병대를 한밤중에 기습하여 1,000명의 병사를 포로로 만들었다. 잠시 후, 황제는 이전에 지스카가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프라하의 견고한 요새를 손에 넣었지만 곧 지스카에게 봉쇄되었고, 굶주림에 위협받은 황제는 결국 철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죽기 살기로 맞붙어 보기로 하고 타볼 산 위의 지스카 진영을 공격해 엄청난 살육을 자행하였다. 그 밖의 많은 요새들도 무릎 꿇었고, 지스카는 험준한 바위로 둘러싸인 산으로 철군하여 그곳을 강한 요새로 만들었다. 거점을 정한 그가 다시 프라하 시로 가서 황제를 강하게 압박하자 미스니아 후작(marquis of Misnia)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큰 병력으로 적을 쳐부수는 일을 맡겼으나 지스카에게 대파되고 말았다.
1421년 봄, 지스카는 이전처럼 작전을 개시하여 도중에 만나는 수도원이란 수도원은 모조리 파괴시켰다. 위스그라데(Wisgrade) 성을 포위공격하자 그것을 구하러 온 황제가 덫에 걸려 가공할 살상을 당하며 크게 깨졌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그 성 또한 빼앗겼다.
보헤미아 성직자들의 엄청난 무지와 미신에 상당한 혐오감을 느낀 지스카는 전쟁의 와중에도 개혁 작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지스카가 이러한 원정들 가운데 루비(Rubi) 시 앞에서 숙영했을 때 그가 공격 장소를 가리키고 있는데 느닷없이 성벽에서 화살이 날아와 눈에 꽂히고 말았다. 프라하에서 그것을 빼냈지만 거기에 미늘이 달려 있어 그것과 함께 눈알이 찢겨지며 밖으로 빠져 나왔다. 열병이 뒤를 이었고, 생명은 어렵사리 유지되고 있었다. 이제 눈은 완전히 멀어 버렸지만, 그는 여전히 군에 참여하고 싶어했다.
황제는 제국의 속국들을 불러들여 연합군을 형성했다. 연합군 군주들은 소이신(Soisin) 포위공격을 감행했으나, 지스카 장군이 다가오는 것만 보고도 줄행랑을 쳐 버렸다. 황제는 그에 아랑곳 않고 15,000두의 헝가리산 말과 혹한 작전을 위해 잘 무장된 25,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군대와 함께 진군했다. 지스카의 군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자, 황제는 그 무적의 적장과 한 번 더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 보기로 결심했다. 1422년 1월 13일, 두 군대는 크렘니츠(Kremnitz) 근처 광활한 평원에서 마주쳤다. 지스카는 수행하는 두 기병의 안내를 받으며 전투용 도끼로 무장하고 최전선 중앙에 모습을 나타냈다. 병사들은 찬송가를 한 곡 부른 후 올 테면 오라는 식으로 침착히 칼을 뽑아 들고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장교들이 전투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알리자 지스카가 머리 위로 군도를 한 바퀴 휘익 저었다. 전투 개시 신호였다. 전투는 매우 치열했다. 황제 군대는 후미를 공격당하며 모라비아 변경의 타볼인들을 향해 쉬지 않고 달아났고, 도중에 이글라(Igla) 강의 얼음이 깨지면서 적어도 2,000명이 수장되었다. 전리품과 전승 기념물을 싣고 타볼로 돌아온 지스카는 다시 종교개혁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죽은 자를 위한 모든 기도와 우상들, 성직자 예복, 금식, 축제를 금지시켰다. 이 모든 일에 편견 없는 지성을 지닌 이들의 자문을 구했고, 전체의 동의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지스카에게 보헤미아의 왕위를 취하라는 권유가 들어오기도 했지만, 그는 정중히 거절하고서 다음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황제 시지스몬드는 이 전투에서 사생결단을 보기로 전의를 다졌고, 미스니아 후작이 북 색소니(Upper Saxony)를 돌파해 들어가 있는 동안 헝가리의 측면에 자리잡은 모라비아로 진군해 들어갈 것을 계획했다. 그러나 후작은 엘베(Elbe)의 견고한 아우시그(Aussig) 성읍 앞에 진을 친 지스카에게 싸움을 걸었다가 참패를 맛보았고, 아우시그 또한 무릎을 꿇고 말았다.
피로에 지친 자신의 병사들에게 약간의 휴식을 주기 원했던 지스카는 자신의 존재가 최근에 있었던 소요 때문에 남겨진 모든 불안을 잠재우리라 희망하며 프라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그곳 사람들에게 난데없는 공격을 받았고, 그와 그의 병력은 그 시민들을 물리친 뒤 군부대로 철군하여 그 배신행위에 대해 상세히 일러 주었다. 지스카는 그들의 복수심에 불타는 적의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프라하의 저명한 목사 로케산(Roquesan)과 면담을 벌여 결국 화해를 이루었다.
오랜 전쟁으로 맥이 빠진 황제 시지스몬드는 지스카에게 사람을 보내 이제 그만 칼을 거두고 그가 내세우는 조건들을 말하라고 요구했다. 회의 장소가 지정되자, 지스카는 그의 주요 장교들과 황제를 만나러 출발했다. 그러나 역병이 창궐한 지역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브리스카우(Briscaw) 성에서 염병에 걸려 1424년 10월 6일 안타깝게도 생을 마치고 말았다. 모세처럼 지스카도 자신의 수고가 완결되는 걸 내려다보며 죽은 것이다. 그의 시신은 보헤미아의 차슬로우(Czaslow)의 큰 교회에 안치되었는데, 그곳에 세워진 그의 기념물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여기 존 지스카가 누워 있으니, 그는 로마 교황의 폭정이 침범해 들어오는 것으로부터 고국을 수호한 후 교황을 경멸하며 이 신성한 곳에 당당히 잠들어 있도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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