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신약교회사 분류

자칭 여선지자 이세벨을 용납한 두아티라 교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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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02월호>

- 암흑 시대의 도래 -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로부터 약 1,000년간, 서구 세계는 경제적 측면으로 보나, 문화적 측면으로 보나, 지식적 측면으로 보나 퇴보를 거듭하는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이 모든 “암흑”은 영적인 것으로부터 발원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들의 이해의 범주 안에 있는 “가시적인 문제들”과 그 바깥에 있는 “영적인 문제들”을 완전히 분리하려는 불가지론적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설명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영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가시적인 일들의 배경이 되기에(출 17:11, 욥 1,2장, 왕상 22:19-23), 둘을 칼로 무 자르듯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찌해서 독일, 네덜란드, 영국, 미국은 번영을 이룬 데 반해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은 쇠락했는가? “반카톨릭 대 친카톨릭”이라는 것보다 더 간단명료하게 이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어찌해서 자유세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자국민 대량 학살(혹은 숙청)이 소련, 중국, 캄보디아, 북한 등에서는 일어났는가?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는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 간의 대조라는 설명보다 더 좋은 설명이 있겠는가?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것을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잘게 찢으리니 아무도 구해 낼 자가 없으리라』(시 50:22).

서구 세계, 그 가운데서도 특히 서유럽에 영적인 암흑이 드리워졌던 까닭은 온 세상을 미혹하는 존재이자, 그 일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사탄이(계 12:9, 고후 11:14) “모조품”을 활용하여 참된 복음의 광채를 가렸기 때문이었다. 사탄은 “거짓 선지자들”을 사용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파멸로 이끌었던 것처럼(벧후 2:1), 또 거짓 사도들과 교사들, 그리고 위조된 편지들을(살후 2:2) 사용하여 초대 교회 시대 성도들의 믿음을 파괴하려 했던 것처럼, 또다시 “가짜”를 동원하여 “진짜”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폈던 것이다. 특별히 사탄이 이때 동원했던 것은 “가짜 성경”과 “가짜 교회”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변개된 성경인 “라틴 벌게이트”(흔히들 “불가타 성경”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세상과의 야합으로 완전히 타락해 버린 로마카톨릭 교회들을 “진짜”인 양 내세워 진리의 조명을 꺼뜨렸던 것이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적 진리를 접하지 못하고 영적 기근 속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퍼가모 교회 시대에 유대교, 동방의 신비 종교, 그리고 이집트의 신플라톤주의가 혼합됨으로써 태동한 수도원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세를 불림에 따라, 구원도 자유도 없는 짐스럽고 저주스런 금욕주의가 참된 경건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진리 안에서 만족과 자유를 얻는 일은 더더욱 요원해져 갔고, 사람들은 총체적인 영적 압박 속에 신음했다. 그러한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제도권 바깥으로 이탈한 사람들에게는 철퇴가 내려졌다. 암흑시대에 해당하는 두 교회를 성경이 “고통의 향기”라는 뜻의 “두아티라”(A.D. 500-1000)와 “붉은 자들”이라는 뜻의 “사데”(A.D. 1000-1500)라고 부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가짜 교회의 “리더십” -

퍼가모 교회 시대에 “이단들”과의 권력 투쟁에서 연전연승하며 “국교”의 자리를 꿰찬 로마카톨릭은, 서로마 제국의 국운이 기울었을 무렵에는 이미 황제의 권위 아래 위계질서와 강제력을 갖춘(니콜라파의 교리) “공무원 조직”이 된 지 오래였다. 주님께서는 “지금은 나의 왕국이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라고 말씀하셨건만, 그들은 상당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감히 “국가권력” 그 자체인 자신들에 대항하는 “이단들”을 쫓아 버리고 자신들만의 “왕국”을 건설해 나갔던 것이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 치하에서는 특별히 로마카톨릭의 위세가 더욱 높아지는 결정적 사건들이 일어났다. 즉 황제가 당시 로마 교회의 주교였던 레오 1세의 청을 받아들여 로마 교회 주교의 수위권(首位權, 제1의 권한)을 법제화했던 것이었다(A.D. 445). 황제는 “사도좌의 권위에 의해 재가된 것이라면 무엇이나 주교들과 그 밖의 사람들에게 법이 될지어다.”라고 선포했는데, 여기서 “사도좌”란 “사도들 가운데 으뜸”이자 “로마 교회의 설립자”인 베드로로부터 그 권위를 계승받은 로마 교회 주교직을 뜻한다(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인 로마서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베드로”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로마에 있는 “사도좌”를 운운하는 자들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즉 이때부터 로마 교회의 주교는 명실상부 모든 교회들 위에 권위를 행사하는 “교황”으로 공인받은 셈이었다.

수위권을 인정받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레오 1세에게 “리더십”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후대의 역사가들이 “하나님의 채찍”이라고 불렀으리만치 무서운 기세로 서진했던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의 침공이 있었을 때였다. 황제는 겁에 질려 도주하면서 고위급 사절들을 파송하여 아틸라를 상대하게 했는데(A.D. 452), 이때 사절단을 이끌다시피 했던 인물이 바로 레오였기 때문이다. 물론 교황이 가지고 간 것은 “복음”이 아니라 “돈”이었지만, 방법이야 어찌됐든 교황에 대한 대중의 신임은 이 사건 이후로 더더욱 두터워질 수밖에 없었다.

- 리더십의 위기와 권력 투쟁 -

제국이 멸망하자 황제를 등에 업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교황들은 다소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공무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땅의 지배권을 확보한 고트족 왕들은 “아리우스파”였기에 로마카톨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민심을 잃지 않기 위해 교황에게 어느 정도의 자치권은 보장했으되, 전처럼 “사도좌”를 존중해 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동로마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이탈리아를 정복했을 때는 약간의 상황 개선이 있었으나 유의미한 정도는 아니었다. 황제는 때로 로마 교회의 주교가 다른 주교들 위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종교 문제에 대한 모든 통제권을 위임하지 않고 스스로 행사했다. 동로마 황제들에게는 늘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교황”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황제교황주의). 이러한 측면에서 실질적으로 로마시(市) 바깥에서 교황의 영향력은 과거의 영광에 비할 것이 못 되었다.

위와 같은 상황을 반전시키고, 중세 암흑시대 교황의 역할을 정립했던 이가 바로 “대제”(大帝)라고도 불리는 그레고리오 1세다. 역병과 기근, 그리고 랑고바르드(롬바르드)의 침략(A.D. 568)으로 난세가 도래했을 때, 그레고리오 1세는 침착하게 행정적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관리되지 못하고 있던 토지들의 소유권을 명확히 하고 또 체계적으로 운영하여, 거기서 나오는 세금으로 군인들에게 급료를 제공함으로써 위기를 헤쳐 나갔다. 중앙 정부가 도움을 줄 형편이 되지 않아 사실상 손을 놓고 있던 틈을 노려 왕처럼 행세했던 것이었다. 그레고리오는 한술 더 떠서 황제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랑고바르드와 외교적 협상을 벌임으로써 자신이 로마의 실질적 통치자임을 만천하에 알리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영국으로 “선교사들”을 파송하여(A.D. 597) 서쪽으로의 외연 확장을 시도했는데, 이때 파송된 이들을 이끌었던 자는 베네딕트 수도원의 원장이자, 도착과 함께 “캔터베리 대주교직”을 하사받은 어거스틴이었다(히포의 어거스틴과는 다른 인물이다). 그는 “선교지”에 도착한 지 1년 정도 만에 10,000명 이상에게 물을 뿌려 주는 “쾌거”를 이룸으로써 교황의 기대에 부응했다. 교황은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누구도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세력 기반을 확보함으로써, 또다시 세속적 영향력을 거머쥘 수 있었다.

- 로마카톨릭이라는 “브랜드”의 확립 -

그레고리오 1세의 “업적”은 정치, 경제적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전까지 그는 각 교회들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행하던 미사를 표준화함으로써(라틴 전례) 로마카톨릭을 “브랜드화”했다. 이제는 모든 “로마카톨릭” 교회에서 몽환적인 “그레고리오 성가”가 울려 펴졌고, 라틴어로만 미사가 집전되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사제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예배가 아닌, 그분을 다시금 죽이는 “희생제사”로서의 미사를 집전해야 했다. 어떤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든 교회들이 “주님은 성체 봉헌의 신비 속에서 다시 우리를 위해 희생되십니다.”라는 그레고리오의 신성모독적인(히 10:12-14) 신학을 따라야 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틀은 “정통 교회”가 무엇인지를 사람들의 마음속에 확실하게 각인하는 “브랜드 이미지”가 되었다. 사람들은 라틴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할지라도, 또 왜 그런 절차에 따라야 하는지 모를지라도 어쨌거나 “로마카톨릭 방식”으로 드리는 미사만이 참된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례 체계는 영국에서 독일로, 다시 프랑스로 뻗어 나가 거대한 울타리를 형성했다. 후일 교황들은 이 울타리를 어떤 사람이나 마을을 압박하여 자신의 요구를 따르게 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성무금지령”과 “파문 제도”). 미사를 금지함으로써 누군가를 “지옥에 보낼 수 있는” 강력한 권세가 그들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은, 장차 불어 닥칠 거센 피바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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