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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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계와 정치권의 야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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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2년 12월호>

『그들은 양손으로 열심히 악을 행하나니 고관도 대가를 요구하고 재판관도 대가를 요구하며 큰 자도 자기의 엉뚱한 욕심을 털어놓으니 그들이 그처럼 서로 걸맞는도다』(미 7:3).

지난 11월 14일, 두 정치인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발걸음이 교회를 향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특정종교를 표방하지는 않지만 성공회 신자였던 엘리자베스 1세를 롤모델로 하고 있었고(박근혜), 다른 한 명은 로마카톨릭 신자였다(문재인). 그런 그들이 “2012 대통령 선거를 위한 국가조찬기도회 헌신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날 설교는 침례교세계연맹(BWA)의 총회장을 지낸 바 있는 김장환 목사가 맡았다. 말하자면 침례교 목사가 거짓 은사주의 교회의 “피리 부는 사나이” 행세를 한 셈이다.
성공회-카톨릭-정치권-은사주의-침례교! 이보다 더 어색한 기독교계와 정치권 사이의 야합은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서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선거철만 되면 항상 이런 식으로 함께 모인다. 그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가증스런 예배를 드리거나 각자의 이권을 챙기는 가운데 야합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뿐이다. 겉으로 보기엔 어울리지 않는 그들이지만, 열심히 악을 행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대가를 요구하며 엉뚱한 욕심을 털어놓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들처럼 서로에게 걸맞는 이들도 없을 것이다(미 7:3).
그들의 모임을 “야합”(野合)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의 연합이나 모임 자체가 불순함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이 모인 동기나 목적이 전혀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에도 이런 야합은 존재했는데, 이는 종종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의 연합으로 나타났다. 당대에 바리새인들은 경건한 분리주의자요, 근본주의자들로 자처하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세상의 정치권과 결탁했던 것이다. 그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그분에게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서였다(마 22:15).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었다(막 12:13).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서 『의인으로 가장한 정탐꾼들』(눅 20:20)이라고 말씀한다.
이런 위선자들이 불순한 의도로 야합을 하면서, 예수님께 드렸던 질문은 “카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가?”였다. 공교롭게도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그들의 야합에 대한 책망으로 귀결된다.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마 22:21), 즉 주님께서는 교회와 정치권의 엄연한 분리를 선언하셨던 셈이다. 이처럼 교회들이 정치권과 함께 연합하고 모이는 모임 자체부터가 옳지 않은 일인 것이다. 결국 그들의 불순한 야합은 예수님을 대적해서 죽이려고 하는 모의로까지 발전하게 된다(막 3:6). 예수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대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야합하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속내”를 드러내 놓기 마련인데, 성경은 이를 가리켜 “엉뚱한 욕심”(mischievous desire)이라고 말씀한다(미 7:3). 실로 그것은 사악하고 교활하기 그지없는 욕심이다.

엉뚱한 욕심 첫 번째 - 야합의 진짜 이유 : “대가”(이권)

흔히 대통령 후보자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자신의 종교를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않은 채 각종 기독교 행사에 참여하고, 관련 지도자들을 만나면서 주요 현안들을 논의하고, 각종 기독교 의식을 그대로 따라하며 친(親)기독교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에 대해 기독교계는 그런 정치인들의 방문을 쌍수를 들고 환영하면서, 그들 나름대로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이처럼 그들이 야합할 수 있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요구하는 “대가”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기독교계로부터 원하는 것은 다름아닌 “표”(vote)이다. 반면 교계 지도자들이 원하는 것은 정치 참여를 통한 “이권”(rights)이다. 그들은 정치인들과의 야합을 통해서 국가의 재정적 지원을 최대한 보장받으려 하고, 기독교에 유리한 법이나 제도를 제정하도록 압력을 넣는 정치적인 수단으로 활용하려고 한다.
말하자면 배교한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이권을 위해서라면 불순한 야합도 마다하지 않는 정치패들인 셈이다. “국가조찬기도회 헌신예배” 역시 그러한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그들의 “엉뚱한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거듭난 적도 없고 복음이나 진리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것도 없는 두 명의 정치인을 지옥으로 가도록 그냥 방치해 버렸기 때문이다. 기독교계의 유리한 입지와 이권을 잃지 않기 위해 그들의 혼을 희생시켜 버린 셈이다.
이날 설교자로 나선 “피리 부는 사나이”는 자기가 맡은 역할대로 피리만 불었다. 그의 설교에서는 사도 바울이 고위급 정치가였던 펠릭스를 앞에 두고 담대하게 전파했던 『의와 절제와 다가올 심판』(행 24:25)에 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설교는 죽음 이후의 영원을 준비하고, 전능하신 주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성령 충만의 “첫 번째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담대하게 전파하는 것인데(행 4:31), 이 육신적인 “사나이”는 열심히 피리만 불다가 강단을 내려왔던 것이다. 성경은 그런 자를 가리켜서 눈멀고 무지하며 짖지 못하는 개라고 말씀한다(사 56:10). 왜 그렇게 된 것인가? 이는 그들이 “엉뚱한 욕심”으로 가득한 “욕심 많은 개들”이자 “자신의 이익만 돌보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사 56:11).

엉뚱한 욕심 두 번째 - 반역 : 왕 없는 왕국

교회와 정치권의 연합은 A.D. 325년 로마카톨릭의 등장으로 본격화되었다. 성경은 그때부터 시작되는 교회 기간을 가리켜 “퍼가모 교회 시대”(계 2:12-17)라고 말씀하는데, 이 기간의 교회사는 “숱한 결혼”으로 특징지어진다. 교회가 하나님과 진리의 말씀을 등진 채, 세상과 결합하고 정치 및 국가와 결합해 버린 것이다. 성경적 신약 기독교의 종식을 고하게 된 셈이다. 적어도 그 이후로 약 1,300년간은 성경적 기독교의 영향력에 관한 한 더 이상 그 역사를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다.
콘스탄틴이 로마 황제로서 “교회의 머리”가 되었고, 교회와 국가의 연합으로 그동안 로마 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자유와 권리를 부여받게 되었다. 이제는 핍박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어리석은 교계 지도자들은 소위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가 시작되어 지상에 천국이 임했다고 생각해 버렸다. 성도들의 “왕”은 이 땅 그 어디에도 오시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들이 바로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없이 지상낙원을 건설하려는 “왕국 건설자들”(Kingdom builders)이다. 사실 왕이 없는 비정상적인 왕국을 꿈꾸는 이들은 “반역자들”에 불과하다. 정치권과 배교한 기독교계가 야합하면, 그들은 서로에게 “엉뚱한 욕심”을 털어놓는 가운데 지상낙원에 관한 청사진을 그려가며 종종 그들 안에 있는 역심(逆心)을 드러낸다.

“교회가 화합과 통합의 구심점이 되자.”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사랑과 일치와 연대의 새 질서를 만들자.”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은 사랑이다.”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서서 힘없고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듬어 주자.”
“경제 민주화와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자.”
사실 이 그럴듯한 표어들은 왕을 거부한 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왕국을 건설하려는 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말들이다. 이런 표어들이 “엉뚱한 욕심”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첫째, 그것이 성경적인 예언에 따른 왕국의 수립과정과는 전혀 무관하고, 둘째,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이루어낼 수도 없는 분수에 넘치는 말과 행동에 불과하며, 셋째, 그러한 것들이 교회가 해야 할 사역과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엉뚱한 욕심 세 번째 - 통치자 :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

인간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정치”와 “정부”다. “누가 왕국을 통치하느냐”에 인간의 모든 관심이 쏠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시대든지 정치에 관한 주제가 인간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치인들은 저마다 자기가 이 나라를 다스릴 적임자라고 생각한다. 이 땅에 그릇된 정치를 바로잡고 부정부패를 척결하며, 이 나라를 발전시킬 유일한 인물이 있다면, 그 사람이 자기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마치 자기 한 사람이 있음으로 인해 이 나라가 오래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엉뚱한 욕심”을 품은 자들은 정치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 각계각층에 존재하며 종교계, 특히 배교한 기독교계 안에 더 많다. 그래서 교계 지도자들이 자주 정치판에 기웃거리며 때때로 정치인들과 야합을 하는 것이다.
피리 부는 사나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도자는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대통령 후보자 중 한 명은 영국의 통치자들 가운데 엘리자베스 1세를 롤모델로 삼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첫째,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이다. 성경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삼상 13:14) 사람이었다고 말씀한다. 둘째, 영적으로 무너져 버린 곳에서 장벽을 쌓고 갈라진 틈에 서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킬 수 있는 사람이다(겔 22:30). 성경에서 그에 적합한 인물을 찾는다면 모세다(시 106:23). 그는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재앙을 돌이킨 지도자였다(출 32:11-14).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명철과 지식이 있는 한 사람이다(잠 28:2). 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성경적인 진리를 믿고 실행하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Bible Believers)이다. 통치자의 롤모델을 찾으려 했다면, 성경대로 통치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을 모델로 삼았어야 옳았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시대에 절대주의가 전성기였을지는 모르지만,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빅토리아 여왕의 시대였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 이 나라를 보존하신다고 생각하는가? 기독교계와 야합이나 하면서 표를 구걸하는 정치인들이겠는가? 아니면 이권을 챙기기 위해 정치권을 이용하는 교계 지도자들이겠는가? 주께서는 그런 “엉뚱한 욕심”을 품은 자들에게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유일하게 관심을 두고 계신 대상은 다름아닌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임을 기억하도록 하자.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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