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단 분류
난데없는“주기도문”소동
컨텐츠 정보
- 3,129 조회
- 목록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6년 06월호>
발견에는 발명 못지않은 희열이 있다. 이제껏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거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을 처음으로 찾아내었을 때, 사람은 자신이 대단한 일을 성취한 것처럼 자부심을 갖는다. 육신은 "최초"라는 명사에 유달리 쾌감을 느낀다. 이는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요삼 1:9) 육신적 성향의 "발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가 잠든 새벽, 소리 없이 이슬이 맺히듯, 육신은 어디서든 타인이 감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냄새를 흘려보낸다. 사람들은 "최초"라는 단어에 후각들이 마비되어 그 발견자가 풍기는 악취를 맡지 못한다."최초의 한국인 역(譯) 주기도문"이 발견되었다. "이수정"이라는 한국인이 처음으로 번역한 주기도문 "원본"이 발견되어 기독교 사학계가 들끓었다. 1885년 5월, 미국성서공회가 간행하는
발견자인 박 교수에 따르면, BSR 1885년 11월호에는 『BSR을 읽는 중국에 있는 한국인들』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수정 역 주기도문이 중국에 인삼무역을 하러 온 조선인 5명에게 전달됐다는 내용도 발견되었다. 이것은 중국 산시성의 미국인 선교사가 BSR 3월호에 실린 주기도문을 오려 전달하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었다고 한다. 박 교수는 이것을 "복음의 접촉점"이라고 평가했으며, "이수정의 주기도문이 발굴된 것은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단순하게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 위기에 처한 한국 교회가 회복될 수 있는 하나의 모멘텀이 됐으면 한다." 는 판에 박힌 "회복"에 관한 소원 또한 잊지 않았다.
박 교수가 발견했다는 "최초의 한국인 역 주기도문"을 읽어 보도록 하자.
image
이것은 원본 사진을 많은 노력을 기울여 파악하고 옮겨 놓은 것이다. 아마도 "최초의 한국인 역 주기도문"을 본지에 "최초"로 옮긴이는 필자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아무런 희열도 느끼지 못한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를뿐더러, 이 일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 아무런 영광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알아먹지 못할 "고어" 앞에서 그저 "야만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 뿐이다(고전 14:11).
사실 "주기도문"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유대인 "제자들의 기도"라 해야 옳다. 주님께서 『그러므로 너희 는 이렇게 기도하라.』(마 6:9)고 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마 6:32)께 드리도록 알려 주신 기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민족"적으로 낳으신 "그분의 아들"이자 "그분의 첫태생"인(출 4:22)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개인이 아닌 "민족"으로서 『우리 아버지』라고 부른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시옵고,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시오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진 것들도 용서해 주시오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악에서 구하여 주시옵소서. 그 왕국과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니다. 아멘』(마 6:9-13). 한국 교회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유대인들의 기도를 변개된 개역성경에 근거하여 예배 시마다 반복적으로 암송한다. 1년이 총 52주이므로, 주일 오전 ㆍ 오후 예배 2회를 기준으로 하면 그들은 1년에 최소 104회를 반복 암송하는 셈이다. 왜 하는지 이유를 물으면 답변을 못한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이므로 모방해야 한다.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주기도문대로 살 각오를 해야 한다."는 궁상맞은 답변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 기도를 가르쳐 주신 주님께서는 두 구절 앞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헛된 반복을 하지 말라 』(마 6:7).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헛되게 반복하고 있다면 그들은 스스로가 그 "이교도들"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한국인 역 주기도문"을 발견한 일이 갖는 의의는 무엇인가? 없다! 발견했으니 어떻다는 것인가? 어느 미국 "잡지"에서 "발견"했다는 이에게나 호들갑스런 관심이 쏠릴 뿐, 한국 교회에 실질적으로 가져다주는 영적 효력은 전무하다. 주기도문이라고 잘못 불리는 "제자들의 기도"는 성경이 기록된 목적에 맞게 먼저 "교리"적으로 올바르게 해석되어야 하는데(딤후 3:16), 그 기도가 교회 시대와 무관한 "대환란" 때의 교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제자들의 기도"는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거부당하시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지상에 "왕국"을 가져오시려고 하는 상황에서 "왕국 복음"을 전파하시며(마 4:23) 가르쳐 주신 기도였다. 왕국을 가져오려고 하신 분께서 왕국의 도래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던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시옵고,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시오며 ,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이전에) 구약의 중심 주제인 예언된 "왕국"을 가져오시기 위해 여전히 구약적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사역하셨음에도, 백성인 유대인들은 그들의 왕을 거부했다. 왕국이 거부되고 갈보리 십자가가 가까워진 시점에서, 주님은 십자가 이후에 펼쳐질 교회 시대 2천여 년 뒤에 그분이 "다시 가져오실" 왕국을 염두에 두시고서 "왕국 복음"에 관해 설파하셨는데, 이때에는 공생애의 초기 사역과 달리 "대환란"을 직접 언급하시면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왕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 그런 후에야 끝이 오리라... 이는 그때에 대환란이 있으리니 , 그와 같은 것은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지금까지 없었으며, 또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마 24:13,14,21). 이 말씀처럼 대환란 때의 유대인들은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왕국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환란을 끝까지 견뎌야 한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것을 "성도들의 인내"라고 부르는데, 이때의 구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그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가 있으며 여기에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느니라 』(계 14:11,12). 그들은 짐승의 표를 거부해야 하며,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계명들을 끝까지 인내하며 지키는 "행위"가 결부되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면서 그들의 조상이 2천여 년 전에 거부했던 그 "왕국"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의 기도"는 대환란 때 왕국을 기다리는(마 6:10) 유대인들이 드려야 하는 기도이며, 그때는 모든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그 기도를 드려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11절). 대환란 때에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경제활동을 할 수가 없다(계 13:17). 적그리스도의 박해를 피해 메마른 광야로 피신한 유대인들은 "삼 년 반" 동안이나 초자연적인 부양을 받아야 한다(계 12:14).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가 절로 나오는 때인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진 것들도 용서해 주시오며』(12절). 누가복음 11장은 이에 대한 참조 구절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들도 용서하여 주시오며 』(눅 11:4)라고 되어 있다. 즉 마태복음의 "빚졌다"는 말은 "죄의 빚을 졌다"는 뜻이다. 대환란 때에는 죄를 용서받는 방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는 신약 교회 시대와 다르다. 누군가의 죄를 용서했기 때문에 용서받는 것은 분명 "행위 구원"에 속한다.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도 용서받지 못하게 되어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악에서 구하여 주시옵소서』(13절). 그때에는 행위로 끝까지 견뎌야 구원을 받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시험에 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죽이려고 달려들 때 시험에 들어 타협한다면 그 길로 끝이다. 고통의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가는 불못에 던져지게 되는 것이다(계 14:9-11).
마지막 내용은 『그 왕국과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니다.』(13절)이다. 주님께서는 10절에 이어 또다시 "왕국"을 언급하시면서 기도를 종결지으신다. 기도의 시작과 끝이 모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지상에 세우실 "왕국"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그것은 교회 시대의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롬 14:17). 마태복음 6장의 "제자들의 기도"는 적그리스도의 박해 아래 있는 유대인 환란 성도들이 그들을 구원하실 메시아 왕의 지상 왕국을 바라보며 드려야 할 가장 효과적인 기도이다. 현 기독교계의 "이교도들"이 예배 때마다 소위 "주문"처럼 외우라고 주어진 기도가 아니라는 얘기다.
한국 교회는 박 교수의 "회복"이라는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게, 처음부터 "사회복음" 바이러스에 치명적으로 감염된 중병 환자였다. 이 중환자 교회에게 제시된 "최초의 한국인 역 주기도문"이라는 것은, 썰물이 빠져나간 뒤에 드러나는, 갯벌에 묻혀서 삭아 버린 녹슨 배와 같다. 아무도 찾지 않는 버림받은 배인 것이다. 이 배교의 바다에는 그 밑에 가라앉아 썩어 있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박 교수는 교회 시대의 복음과 전혀 무관한 것을 찾아내어 "복음의 접촉점" 운운하면서 흉물스럽게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적인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최초의 한국인 역" 운운하는 주기도문 따위에 관심이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찾고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이기 때문이다. 『주의 말씀들이 발견되었기에 내가 그것들을 먹었더니 주의 말씀이 내게는 내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었나이다. 오 만군의 주 하나님이여, 이는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임이니이다』(렘 15:16). 우리는 "주의 말씀"을 발견해야 하고, "먹을 수 있는" 말씀을 발견해야 하며, 힘을 내어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하는 "기쁨과 즐거움의 말씀"을 발견해야 한다. 당신은 그 말씀을 발견했는가?
"최초"를 자랑한다면, 필자는 이 진리의 불모지에 바른 말씀이 "한글로는 최초로 번역된"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자랑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쁨과 즐거움의 말씀을 이 땅에 "최초"로 주신 『주』를 자랑하는 길이기 때문이다(고후 10:17).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