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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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은 사이비 교주가 되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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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7년 05월호>

보통 “도사”(道士)라고 하면 옛날 도교에서 신선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도사”들은 도교에만 한정되지 않고 여러 종교들을 섭렵해서 자기만의 득도를 이뤘다고 주장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게 되는데, 이는 그에게는 무슨 신통력이나 혹은 특별한 가르침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요즘 말로 하면 사이비 교주라 한다.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은 여러 종교들을 섭렵해서 자기만의 사상을 만들어, 이것이 마치 무슨 진리나 되는 양 선전한다. 통일교만 해도 문선명은 예수, 석가, 공자가 모두 자기 제자라는 헛소리를 했다. 이러한 사이비 교주들의 특징 중 하나는 여러 종교들을 섞어 놓긴 하되, 반드시 타 종교의 입장으로 기독교를 “재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도올 김용옥이라 하는 자가 바로 그 모습을 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EBS와 KBS 등을 통해 노자(도교), 논어(유교), 인도(힌두교 및 불교) 등에 대해 강의한 그는 최근에 EBS를 통해 요한복음을 강의하며 기독교까지 다루었다. 그간 다른 종교와 사상들에 대해 강의할 때마다 기독교에 대해 독설을 퍼부은 그가 요한복음을 강의한 이유가 무엇일까?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했던 말같이 기독교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자기도 한국신학대학(한신대)에서 공부한 자로서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였을까? 이유가 어떻든, 그는 요한복음을 강의하면서도 여전히 성경의 교리와 어긋난 말들을 함으로써 교계의 반발을 샀었다.
하지만 그는 이 강의를 통해서 소기의 목적은 성취한 셈이다. 왜냐하면 자기에 대한 동조자들을 얻었으며, 그의 엉터리 이론들이 교계 안에 있는 다양한 입장 중 하나임을 입증해 버렸기 때문이다. 한신대 김경재 교수 같은 사람은 도올을 지지하기도 했고, 지난 3월에는 은혜공동체교회(박민수 목사)라는 곳에서 도올을 초청해 강의하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와도 마주 앉아 화합(?)의 자리를 갖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조용기 목사는 자신의 종교다원주의적 신념을 드러냈으며, 이는 이미 2004년 5월 동국대학교에서의 강연에서 드러난 바 있다. 즉 도올은 한국교회의 거장(?)을 제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기독교를 하나의 문화로 전락시켜 버리고, 종교다원주의를 이 땅의 교계에 심으려 한다.
물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강조해야만 한다. 자신도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느니, 자신도 성령체험하고 방언도 했다느니, 신학 대학에 수석으로 합격하기도 했다느니, 오랜만에 찬송을 부르니 눈물이 난다느니 하는 말들은 마귀가 속임수를 쓸 때 항상 하는 말들이다. 이런 말들로 교인들의 마음을 얻으면 곧바로 성경을 공격하는 것이다.
사실 도올이 하는 말들은 전혀 생소한 말들이 아니다. 이미 자유주의자들 가운데에서 만연되어 있는 이론들이며, 2천년 교회사 가운데 수많은 이단적 논쟁 속에서 드러났던 것들이다. 그동안 메스컴을 통해 한 두 마디 한 이야기들이 교계에 물의를 일으켰지만, 그의 이론은 그가 쓴 <기독교 성서의 이해>라는 책에 집약되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성경 형성에 대한 이론부터, 구약 유대교에서 신약 기독교가 분리된 이야기, 삼위일체와 연관된 아리안 논쟁 등 초기 교회사를 흝으면서 중요한 교리적 쟁점들을 설명한다. 그 설명 과정에서 그는 헬라의 철학 사상들 뿐아니라, 동양의 유교와 불교까지 동원하여 기독교를 혼합된 종교로 만들어버리는데, 이렇게 함으로 순진한 교인들을 속여 마귀적인 “도올교” 안으로 집어 넣고 있는 것이다.

1. “나는 성경을 믿는다.”
“기독교는 반드시 성서의 말씀의 진실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어떠한 자연주의적 해석도 차단되어야 한다... 나 조선의 사상가 도올 김용옥은 이러한 성서주의의 입장을 한치도 이탈하지 않는다...”(15쪽). “우리는 성서 그 자체로 항상 되돌아가야 한다.”(117족)
이런 말들을 듣게 되면, 지금까지 그가 한 온갖 철학적 궤변들은 다 잊어버리고, ‘아, 이 사람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바로 그것이 마귀적인 속임수라는 것이다. 그는 절대로 성경을 믿지 않으며, 하나님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가 성경 말씀을 수용한다고 할 때, 그것은 자기 인식의 틀 가운데서 수용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가 갖고 있는 인식의 틀은 무엇인가? 그것은 철학 사상이다. 그것도 동양의 철학 사상이다.
그는 예수님을 감히 공자나 석가에 비교하여, 유․불교의 성립 과정과 기독교의 성립 과정을 유사한 것으로 설명한다. 공자 문하에 많은 제자들이 모여서 시서예악이나 육예를 공부한 사람들이 각기 공자의 말을 기록한 것이 유교 경전이 되었듯이, 성경도 그렇게 형성되었다 생각한다(제8장).
불교에 대해서는 좀 더 직접적으로 비교하는데, “예수”에 대해서는 “싯달타”로,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붓다”로 비교한다. 초기 불교는 해탈한 붓다를 너무 신성시한 나머지 형상이나 불경도 없었는데, 헬리니즘의 영향으로 점차 형상이 만들어지더니 붓다의 생애와 어록들을 말하는 이야기꾼들이 생겼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대승불교인데, 기독교도 바로 이러한 대승화 작업을 거쳤다고 하면서, 마가복음이 바로 그 “대승기독교”의 한 형태이고, 요한복음이 바로 그 대승화 작업의 정점이라고 주장한다(제7,8장). “요한복음의 로고스기독론과 금강경의 반야사상과는 물론 지향하는 바도 다르고... 다르지만, 인간의 종교체험의 본원으로 깊게 쑤시고 들어가면 결국 동일한 시대의 동일한 시대정신을 표방하고 있다...”(181,182쪽).
무수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신약 성경을 헬라 주의의 영향이라고 역설하곤 했지만, 도올은 한 수 더 떠서 기독교를 유교나 불교와 한 흐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도 그가 성경을 믿는 사람인가? 타고난 달변가로서, 무수한 궤변을 섞어 이처럼 강의할 때 그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이 어찌 사이비 교주의 모습이 아닐 수 있겠는가?
성경은 여타 종교의 경전들과 그 기원 자체가 다르다. 불교, 유교 뿐아니라 어떠한 종교의 경전이라도, 그것들은 그 추종자들이 그 창시자의 말들을 자기들의 사상과 관념에 맞게 각색하여 적어 놓은 것들이지만(도올의 말대로 이것은 그들 종교의 “대승화” 작업이라 말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감으로 기록하신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으로...』(딤후 3:16). 복음서의 저자들은 단순하게 예수님의 어록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헬라적 사상을 결합시켜 로고스화시킨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기록자들에게 역사하시어 필요한 말씀들을 기록케 하신 것이다. 어차피 도올은 이러한 영감설 자체도 믿지 않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복음서 기자들에게 각 복음서의 목적에 맞는 말씀을, 서신서의 저자들에게는 그 목적에 맞는 말씀을 기록케 하셨다. 바로 그 말씀이 심판날에 도올 김용옥 교수를 심판하실 것이다(요 12:48).

2. 역사적 예수에 대한 철학적 인식만이 중요
그의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5장에서는 삼위일체 논쟁을 장황하게 다루고 있다. 아리우스를 변호하는 것 같으면서도 영지주의를 비평하기도 하는 애매한 입장 속에서 도올은 아주 이상한 이론을 제시한다.
일단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는 “신적 존재”가 아니라 “자비의 품”이라고 설명한다. 즉 아버지는 존재론적 대상이 아니라 일상적 느낌의 대상일 뿐이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냐 둘이냐 하는 존재론적 문제가 생겨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110쪽). 결국 아버지 하나님의 존재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 창조주는 또 무엇이고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이끄신 여호와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아닌 게 아니라 도올은 하나님의 실제적인 창조에 대해서도 부정하고 있다. “하나님은 전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 우주를 창조하는 힘을 말하는 것이요 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제1원리로서의 존재(Being)가 아니다... 그러한 우주의 근원적인 존재론적 실체를 탐구하고 싶다면 우리는 신․구약 성경을 읽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는 반드시 헤라클레이토스나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의 단편...을 읽어야한다”(112쪽). 이래도 그가 성경을 믿는 사람인가?
하나님의 절대성과 유일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유대교 전통에서 하나님은 유일신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절대성과 유일성은 단지 이스라엘과 “관계의 절대성”일 뿐이라는 것이다. “야훼가 유일하다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야훼 이전에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구약의 역사는 유일신의 역사가 아니라 다양한 신들과의 관계 속에서 여호와 신앙만을 유일하게 고수해 간 이스라엘 민족의 투쟁사였다.”(113쪽)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수많은 신들 중에서 여호와 하나님과만 관계를 맺은 것뿐이고, 그 여호와는 히브리 민족이라는 유목민들의 민족신 이었을 뿐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나 외에 하나님의 있더냐? 정녕, 다른 하나님은 없나니 나는 아무도 알지 못하노라󰡕(사 44:8). 물론 성경에는 많은 신들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숭배를 받는 그 어떤 신들이라도 그들은 모두 헛것들이요, 마귀들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신들을 섬기는 자들을 어리석다 말씀하셨다(사 40-44장). 세상에 수많은 신들이 있지만, 오직 우리 하나님만이 창조주시요 구속주시며 또 심판주시다. 다른 어떤 신들도 그러한 능력을 행할 수 없다. 즉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셨다고 할 때, 그것은 “많은 신들 중 하나인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택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셨다는 말인 것이다.
도올의 말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어찌하다 보니까 여호와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것이다. 이왕 그와 계약을 맺었으니까 다른 신에게 가면 안되는 것뿐이다. 하지만 만약 그런 것이라면, 처음부터 다른 신과 계약을 맺으면 안되는가? 이방인들은 다른 신들과 계약을 맺었으니 괜찮은 것인가? 어차피 그렇다면 꼭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신들을 믿어도 구원받을 수 있지 않은가? 아닌 게 아니라 바로 그게 도올 및 수많은 자유주의자들의 생각이다. 그는 요한복음 강의를 통해서 바로 그러한 종교다원주의를 주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도올에 따르면 결국, 예수님도 아버지를 실체로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버지” 하고 불렀다고 하니, 그것은 오직 느낌일 뿐이며, 철학적 사유일 뿐이다. 그러한 예수를 믿어서 뭐하는가?
그 예수는 이적도 행하지 않았다 한다. 이적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이적이란 그 믿는 사람의 신념에 따라 주어진 것뿐이라 한다(제1장). 예수님께는 아무런 능력도 없고, 오직 신자의 믿음만이 중요하다고 한다면, 기독교가 이방 종교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그러한 이적은 타 종교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심지어 마귀도 하늘에서 불을 떨어뜨릴 수 있지 않은가?(계 13:13) 도대체 도올은 왜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하는가? 그냥 노자와 공자의 제자라고만 하면 될 것을 기독교인이라 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무수한 무리를 지옥으로 이끌고 가는 사이비 교주와 무엇이 다른가?

3. 교회사에 대한 몰이해
우선 그는 카톨릭 교회사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교회사를 구별하지 못한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이 사람에게 이런 것까지 구별하라 한다면 너무 무리한 게 아니겠는가? 어찌되었건 그는 교회사를 통해 기독교를 비판하는데, 그 비판의 내용이 상당수 카톨릭에 맞춰져 있다. 그러다 보니 카톨릭을 비판하면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처럼 되어, 많은 개신교인들이 거부감을 느낀다. 하지만 카톨릭에 대한 비평은 그대로 넘어가 두자. 예를 들어 콘스탄틴이 이룬 로마의 기독교화는 전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도 아는 바이다. 즉, 도올뿐 아니라 그 누가 콘스탄틴 황제를 비판한다 해도 그것은 사실 카톨릭을 비판하는 것이니까 관계없다. 콘스탄틴이 내세운 기독교는 이교도 신앙을 교회 안으로 가져온, 지극히 마귀적인 종교이다. 하지만 그 비판하는 자가 콘스탄틴으로 인해 성경과 기독교 신앙 자체를 비판한다면 곤란하다. 도올은 바로 그러한 관점을 갖고 있다.
특이한 것은, 도올이 로마 제국의 초기 기독교 박해까지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네로 황제 등 그 끔찍한 박해의 역사를 모조리 부정한다.
“로마가 실제로 박해한 것은 유대인들의 정치적 해방이나 독립을 꾀하려는 운동이었지, 기독교라는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는 박해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로마는 헬레니즘의 전통을 이어받아 다양한 신들의 종교문화를 수용하기를 즐겨했으며...” 물론 로마는 수많은 종교들을 수용했지만, 오직 기독교 신앙만은 예외였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들에서는 황제를 신이라 인정했지만,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제들의 눈에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그 자체가 반역이었다. 이것이 바로 로마 제국이 헬레니즘 사상과 관계없이 성도들을 박해한 이유이다.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박해를 받은 기간은 단 5년밖에 되지 않는다... 교회사의 과장된 기술처럼 그렇게 무자비한 대규모의 학살은 아니었다...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를 받아 순교한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인의 숫자는 남자 10명, 여자 7명에 지나지 않는다.”(75쪽) 도올은 이 시대의 로마는 시민법, 만민법, 스토아 철학 사상에 충만했기 때문에 그렇게 박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초기 기독교가 팍스 로마나의 평온한 분위기에서 세력을 팽창시켜 간 시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르는 5현제시대였다.”(74쪽)
보는 바와 같이 도올은 헬레니즘의 스토아 철학 사상에 푹 빠져 있다. 성경에 따르면 로마는 이 세상, 즉 마귀가 주관하는 이 세상 제도에 속해 있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 성도들을 이유 없이 박해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로마는 그렇게 “사랑이 충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온갖 폭력과 음행이 가득 찼던 곳이고, 살인을 밥 먹듯이 행했던 곳이다. 노예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으며, 검투사들의 싸움과 죽음을 스포츠 경기로 즐겼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라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로마가 다른 나라들과 전쟁을 하지 않았다는 말일 뿐이다. 대신 내부에서는 무수한 살육이 일어났다. 폭스의 순교사에 따르면, 콘스탄틴 황제 이전에 로마 제국에서 행한 “공식적” 박해만 해도 10번이었다. 매 박해 때마다 수만 명이 죽어 나갔고, 앞에서 말한 데키우스 황제 때는 말할 것도 없으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또한 지독한 박해자였다. 세상의 평화는 그리스도에 대한 박해일 뿐이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고 했다(약 4:4). 도올은 하나님의 원수의 입장으로 기독교를 논하고 있다.

그의 책에 나타난 도올의 사상에 대해 논하려면 지면이 부족하다. 수많은 오류들을 더 들춰낼 수 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그의 궤변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으리라. 그는 동서양의 철학 사상들에 심취해 성경의 진리를 발견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엉터리 사상들을 통해 성경을 재해석하려고 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 사이비 교주 같은 도올은 많은 추종 세력을 얻어 성경을 파괴하려고 하지만, 그가 파괴하려는 바로 그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멸망 받고 말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도인”(道人)의 최후일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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