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BB칼럼 분류

만스크와 샤리아, 그리고 지하드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8년 01월호>

제목이 좀 난해했는지 모르겠다. 만스크(Mansukh)와 샤리아(Sharia)와 지하드(Jihad)는 모두 이슬람 용어들이다. “성전”(聖戰)이라고도 불리는 지하드는 잘 아는 대로 그들의 종교 전쟁이고, 샤리아는 이슬람의 율법을 말한다. 만스크는 좀 설명이 필요한데, 코란 안에 서로 모순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더 권위 있는 부분과 덜 권위있는 부분을 규정한 교리이다.
어차피 코란이란 그 자체가 모순덩어리이지만, 특히 계시를 받은 순서에 따라서 전기 계시와 후기 계시가 다르다. 전기 계시는 메카 시절에 받은 계시이고, 후기 계시는 메디나 시절에 받은 계시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마호메트는 622년에 메카에서의 위협을 피해 메디나로 달아났다. 메디나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고, 거기에서 유대인들과 접촉함으로써 코란의 많은 내용들을 성경에서 차용하게 된다. 또 메디나에서 마호메트는 구체적으로 그 세력을 넓혀가게 되는데, 유대인뿐 아니라 주변 지역의 이교도들과 싸워가면서 그의 이슬람 국가의 초석을 다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잘 반영해 주듯, 메디나의 계시는 메카의 계시보다 더 호전적이다.1) 지하드를 위해서 이교도, 특히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것이 정당하다는 코란의 구절들은 대부분 메디나 계시에 속한 것들이다(수라 4,8,9,47장 등).
메카 계시에서는 알라의 유일성이라든지 예배나 은혜, 자비와 친절, 선행 등의 내용들이 많다. 그래도 명색이 “종교”인데 자비나 친절 같은 덕목이 없겠는가? 하지만 메디나 계시로 가면서 그 종교의 호전성이 드러난다. 오늘날 이슬람교를 옹호하는 자들이, 이슬람은 관용과 자비의 종교라고 추켜세우는 것은 바로 이 메카 계시를 보고 하는 말이다. 코란에서 메카 계시는 전체의 2/3를 차지한다. 반면 이슬람이 폭력적이고 호전적인 종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메디나 계시를 보고 하는 말이다.
문제는 이와 같이 두 계시가 서로 상충될 때, 어떤 계시를 더 권위있다 말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메카 계시를 따라서 이슬람을 관용의 종교라 말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메디나 계시를 따라서 폭력의 종교라 말해야 할 것인가? 이것을 규정해 주는 것이 바로 “만스크” 교리이다. 비단 폭력이냐 자비냐 하는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코란에 있는 전반적인 모순점들을 해결해 주는 것이 만스크 교리인데, 이 교리에 따르면 후기 계시가 전기 계시보다 권위있다. 뒤에 받은 계시는 앞에 받은 계시의 불완전한 면들을 수정, 보완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자체만으로도 코란은 영감으로 기록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계시가 뭐가 부족해서 스스로 수정, 보완해 주시겠는가? 그것도 몇 백 년에 걸쳐서 서로 다른 경륜 가운데 주어진 것이 아니라, 불과 20년 동안 한 사람에 의해 발설되었으면서 말이다.
어쨌든 만스크 교리에 따르면 후기 메디나 계시가 더 권위있는 것이니, 그들의 경전과 교리에 따라서 이슬람교는 호전적인 종교가 맞다. 더 이상 이슬람교를 자비와 관용의 종교라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알 아즈하르 대학”(al-Azhar University)의 코란 교수였던 “셰이크 오마르 압둘 라흐만” (Sheikh Omar Abdul Rahman)의 말에서도 증명된다. 이 대학은 시아파에 의해 세워진 대학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인데, “이슬람의 하버드 대학”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권위를 갖고 있다. 이 대학의 코란 교수라면 이슬람의 정통 학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1979년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었다는 이유로 암살당했을 때 그 배후로 지목되었던 인물이다. 또한 1993년에 있었던 세계 무역센타 폭탄테러의 배후 인물이기도 한 그는 법정에서 사다트 암살에 대해 질문을 받고 “그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그런 자를 죽이라는 것이 코란의 가르침이며, 이것이 지하드이다.”라고 대답했다. 판사가, “지하드는 죄와 마약, 가난 등과 싸우는 것이지 사람을 죽이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내가 평생 코란과 이슬람 율법(Sharia)을 연구하며 가르쳐 왔지만 코란에서 그런 구절을 본 일이 없다. 판사는 알라의 새로운 계시를 받은 거냐?”고 반문하기까지 했다.2) 여기서 판사의 말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을 보여 준 것이고, 라흐만의 말은 만스크에 따라 이슬람의 정통주의적 견해를 보여 준 것이다. 말하자면 그 판사는 가짜 무슬림이고, 라흐만은 진짜 무슬림이었던 것이다.

지하드는 이슬람 학자들에 의해 보통 네 가지의 지하드로 구분된다. 마음․혀․손․칼에 의한 지하드가 그것이다. 마음에 대한 지하드는 악마와 싸워 모든 유혹으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는 것이고, 혀와 손에 대한 지하드는 이슬람을 전파하는 것을 말하며, 칼에 대한 지하드는 무력으로 이슬람 세력을 넓히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용어로 설명해 본다면, 앞의 세 지하드는 말하자면 “영적 전쟁” 같은 것이다. 물론 그들의 영적 전쟁은 성경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쟁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왜냐하면 일단 그들에게는 영감받은 성경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코란은 성경 여기저기에서 차용해 엉성하게 조합해 놓은, 모순 덩어리 책이며, 무엇보다 마호메트가 선지자(prophet)라 하면서 예언(prophecy)은 한마디도 없다. 마치 간질병 환자가 발작을 일으킨 것과 같은 현상 속에서 자기도 모르는 말을 내뱉은 것이 바로 코란이다. 3) 마귀의 인도를 받은 종교가 마귀와 싸운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단지 악한 유혹을 끊고 선을 행한다는 것은 어느 종교나 철학에서도 말하는 “수행”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영적 전쟁인 지하드가 아니다.
혀와 손에 대한 지하드는, 말하자면 앞에서 테러리스트 라흐만을 재판했던 판사가 갖고 있던 그런 관념의 지하드이다. 이에 따라 많은 무슬림들은 봉사와 문화 활동, 학문 연구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슬람교를 전파하고 있다. 오늘날 이슬람 “선교사”들은 세계 각처에서 활발하게 활동한다. 그들은 2020년까지 한국을 이슬람화시키고, 2080년까지는 전 세계를 이슬람화시킨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주로 학문적 활동으로 전파하고 있는데, 한동대학교에서는 무슬림 유학생이 온 학교를 휘젓고 다니더니, 외국어대학교나 명지대학교 같은 곳에서는 이슬람 관련 학과(아랍어 학과, 혹은 아랍 지역 학과)의 무슬림 교수들이 은연중에 혹은 공공연히 이슬람 신앙을 전파하고 있다. 4) 이 무슬림 학생이나 무슬림 교수들은 무슬림 “선교사”들이다. 참고로 한동대와 명지대는 기독교 대학이다. 이러한 지하드는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도와 큰 영향력으로 성공리에 수행되고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지하드는 칼에 의한 지하드이다. 그들의 세력이 약할 때는 혀와 손에 의한 지하드를 사용하지만, 세력이 강해지면 칼에 의한 지하드를 사용하게 된다. 물론 세력이 약할 때도 테러 등의 방법으로 칼에 의한 지하드는 계속된다. 어찌보면 테러는 가장 강력한 지하드이다. 오늘날 이슬람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칼에 의한 지하드는 방어의 목적으로만 사용된다고 말하지만, 이는 명백한 거짓말이다. 2001년의 9․11 테러는 어떠한 위협이 있었기에 “방어”한 지하드였는가? 아프간 단기 선교팀을 억류하고 살해한 것은 어떠한 위협이 있었기에 “방어”한 지하드였는가? 그들은 이들의 선교 활동 때문에 자신들의 종교가 위협받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총칼로 위협했는가? 그들은 문화적으로 접근했다. 문화적 접근은 그들도 얼마든지 하지 않는가? 결국 그들의 지하드란 자기들의 종교 사회를 무력으로 유지하거나 확장하려는 전쟁에 지나지 않는다.

일단 지하드가 성공하여 한 국가나 지역을 점령하게 되면, 그 지역은 완전히 이슬람 종교 국가가 된다. 그곳에는 샤리아, 즉 이슬람 율법이 선포된다. 모든 사회 제도에 샤리아가 적용된다. 모든 민법과 형법은 코란에 따라 재구성되고, 종교법에 따라 형벌이 부과된다.
이것은 국가 종교를 시행하는 나라의 공통적인 모습이다. 중세 카톨릭 사회도 이와 마찬가지였으며, 종교개혁 당시 칼빈이 이루고자 했던 제네바 신정국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그런 모습은 성경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들이었다. 그들은 신약 교회가 구약 신정국가적 통치방법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오해했던 것이다. 향후 성경을 더 올바로 해석해 나감에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와 교회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기독교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다. (물론 로마카톨릭은 여전히 국가와 교회가 일치해야 한다는 관념을 갖고 있다.)
반면 이슬람에서는 코란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이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며, 올바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호전적인 태도를 취한다. 또한 아무리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외국인들에게만 그렇지 자국에서는 여전히 강압적인 자세로 샤리아를 시행한다.
그들은 극단적인 바리새파들과 같다. 즉 샤리아를 위해서는 목숨도 버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치유해 주시자,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안식일에 그럴 수 있냐고 예수님께 따져 물었다. 그들에게는 안식일이라는 의식법이 사람의 목숨보다 더 소중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안식일보다 더 소중하다고 말씀하셨다(막 2:27). 하지만 그들은 그 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이처럼 의식법에 대한 과도한 충성은 사람의 생명까지도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슬람이 정확히 그렇다. 샤리아는 “명예 살인”을 정당하게 한다. 만약 어떤 무슬림 여자가 비무슬림 남자와 결혼한다면, 그 남자가 개종하지 않을 시 그 여자의 가족은 그 여자를 죽인다. 그녀가 샤리아를 어김으로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살인을 한 당사자는 그 사회에서 명예를 얻는다.
지난 2002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한 여학교에서 불이 나 학생들이 황급히 대피하였는데, 그들 중에서 머리에 히잡(베일)을 쓰지 못하고 나온 여학생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걸 본 사람들은 그들을 다시 불 속으로 집어넣었다. 불 속으로 들어가서 히잡을 쓰고 나오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1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5) 이란에서는 히잡을 썼으나 머리카락이 많이 보인다는 이유로, 한 청년이 어떤 여대생의 얼굴에 염산을 뿌린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모두가 샤리아를 사람의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이슬람교의 원칙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지만, 코란의 알라는 무자비한 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주님이시지만, 마호메트는 복수의 화신이다. 성경을 믿고 공부하면 살인자라도 온유한 사람으로 변하지만, 코란을 믿고 공부하면 온유한 사람이라도 살인자로 변하게 된다.

그러한 이슬람이 무서운 기세로 이 땅에서 성장해가고 있다. 어차피 마지막 때가 될수록 거짓 선지자는 늘어나고, 적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거짓 종교들이 범람하게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저 마귀의 종교가 활개치는 것을 가만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기독교인들이 세력을 합쳐서 저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세력으로 세력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우리의 싸움은 영적 싸움이며, 그것은 저들의 지하드와는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무장하여, 올바른 영적 지식을 갖고 온전한 복음 전파로 예수 그리스도의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슬람은 관용의 종교다.”라는 등의 거짓말에 온 세상이 속아 있는 것이 문제다. 이것은 “사탄은 위대한 신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 진리의 지식으로 무장하여 이슬람이라는 마귀의 종교를 능히 대처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이슬람뿐만 아니라 로마카톨릭이나 모든 이단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가 구원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는가?(딤전 2:4) 그것은 우리로 주님의 군사가 되게 하시어, 마귀들과 싸워 능히 이기게 하려 하심인 것이다. BB
주석)------------------
1) 김용선 역, 『코란󰡕, 해설 (서울: 명문당, 2002), pp.35-40.
2) 크리스천투데이, 2007. 10. 27.
3) 압둘라 아지즈,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이슬람 이야기󰡕, 김진석 역 (서울: 말씀보존학회, 2004), pp.24-27.
4) 크리스천투데이, 2007. 12. 15.
5) 한국선교연구원, 파발마 586호(2007. 11. 23), www.krim.org

BB칼럼 309 / 14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