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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을 주시는 하나님과 거절하는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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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03월호>
중국 고사성어에 "삼고초려"(三顧草廬)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유능한 인재를 얻기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돌아보며 마음을 써서 청한다."라는 뜻이다. 결국 그 청을 받은 사람은 자신을 생각해 준 그 정성스런 마음에 미력하나마 보답할 요량으로 자신을 불러 준 사람을 따라나서게 된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위대한 사명을 맡기시려고 연약하고 쓸모없는 우리를 부르시면서 이와 비슷한 태도를 취하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성경에는 그런 사례가 종종 나오는데, "모세"의 경우가 대표적이다.사병이 지휘관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고 부하 직원이 상사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지만, 모세는 처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런저런 핑계들로 다섯 번이나 거절했다. 그가 거절했던 첫 번째 이유는 자신의 "무능력"이었다. 『내가 누구기에 파라오에게 가며,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데리고 나올 수 있으리이까?』(출 3:11) 두 번째는 "다른 사람들"을 핑계로 내세워 거절했다.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 3:13) 세 번째 거절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보소서, 그들이 나를 믿지도 아니하고 내 음성에 경청하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주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출 4:1). 이후 모세는 두 번 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고(출 4:10,13) 나서야 그 사명을 수행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시다!(롬 11:29) 이는 우리의 체질과 연약함을 잘 아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기 때문이다. 왜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하지 않았던 것인가? 40년 전의 뼈아픈 실패로 인한 상처가 마음속 깊이 멍울져 있었기 때문인데, 그로 인해 담대함과 자신감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가 지금 대면하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 부분을 하나씩 가르쳐 주시면서 그 위대한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모든 인내와 오래 참음으로 모세를 이끌어 가셨다.
자, 모세에게 임무가 주어진다. "가라!" 『가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함께 모으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조상의 주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내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시기를, 내가 분명히 너희를 찾아왔었고 이집트에서 너희에게 가해진 것을 보았노라』(출 3:16).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서 해야 할 일을 명하신다. 이제는 모세가 행동해야 할 차례다. 주님께서는 죄인들을 부르실 때 『다 내게로 오라.』(마 11:28)라고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에게는 『가서...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라고 하시면서 위대한 사명을 주신다.
모세가 해야 할 첫 번째 임무는, 이집트로 가서 먼저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아 그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입술로 증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집트를 정복해야 한다거나 인권 운동과 인본주의적인 교육을 통해 민족적인 힘을 길러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었다. 모세가 호렙 산을 내려가서 해야 할 일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씀만을 증거하는 일이었다. 이처럼 "증인"은 자신이 듣고 본 일을 그대로 증거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도 세상으로 나아가서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증거하기만 하면 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거절한다! 이것은 당시 모세가 직면한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보소서, 그들이 나를 믿지도 아니하고 내 음성에 경청하지도 아니하리니』(출 4:1). 모세의 염려는 우리가 느끼는 염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이 누구이신지 직시할 필요가 있다. 곧 어려워서 못 할 일이 전혀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믿고 안 믿고는 모세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내가 하리라!"(I will, 출 3:17,20,21)라고 하시면서 분명한 의지와 약속을 표명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는 것이고, 또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하실 일을 우리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인 줄로 알고 불신과 낙담에 빠지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물론 모세의 궁극적인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엄청난 일을 모세 스스로 어떻게 해낼 수 있겠는가? 온갖 재앙으로 이집트를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는 전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직접 주관하시고 완수하셔야 이룰 수 있는 일이었다.
주님께서 "내가 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은 불가능한 것이 없으신 하나님의 강한 의지에 따른 위대한 약속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제시하고 있는 요한복음에는 이런 의지에 따른 약속이 자주 나온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6:37).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살리리라』(6:40,44,54). 『내가 있는 그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3). 『내가 행하리라』(14:14). 『내가... 오리라』(14:18). 『나 자신을 나타내리라』(14:21). 『내가 그분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라』(16:7).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16:22). 참으로 위로가 되는 약속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모세의 임무가 그분의 말씀을 그대로 증거하는 일이라는 점과, 실제 그 위대한 일을 이루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확실히 해 두셨다. 『내가 말하였나니, 내가 너희를 이집트의 고통에서 인도하여 카나안인과 힛인과 아모리인과 프리스인과 히위인과 여부스인의 땅, 즉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이르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출 3:17). 이것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기한에 따라(창 15:13-16), 이제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실 때가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무슨 난해한 말씀이 아니었다. 다만 믿기가 어려웠을 뿐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로 많다. 이처럼 모세가 증거한 말을 무슨 뜻인지 몰라서 어려움을 겪은 백성은 없었다. 하지만 모두 다 그 말을 믿은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인데 어느 시대나 "이해의 부족"보다는 "믿음 없음"이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모세의 두 번째 임무는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가서 하나님의 명령을 입술로 증거하는 일이었다. 『그리하면 그들이 네 음성에 경청하리라. 또 너, 곧 너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이집트 왕에게 가서 그에게 말할지니 '히브리인의 주 하나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만나셨나이다. 간구하오니, 우리로 삼 일 여정으로 광야로 나가도록 허락해 주소서. 우리가 주 우리 하나님께 희생제를 드리리이다.' 하라』(출 3:18).
우선 이 구절은 모세의 한 가지 주된 걱정거리가 해결될 것임을 보여 주는데, 그들, 곧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모세의 음성에 경청하게 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증인으로서의 임무를 신실하게 수행하다 보면,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고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따라 그 증거에 경청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증거에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항상 있었다. 엘리야의 때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 명의 사람들이 있었듯이, 400년간의 고된 노예 생활 속에서도 모세의 증거에 귀를 기울일 여러 장로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모세로서는 큰 위안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사악했던 아합 왕과 혈혈단신으로 대면해야 했던 엘리야와 달리, 모세는 파라오 앞에 설 때 그의 형 아론은 물론, 주님께서 예비하신 장로들과 동행할 수 있었다. 모세는 혼자가 아니었다. 위로는 하나님께서 계시고, 아래로는 그와 함께할 장로들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파라오가 모세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각 민족마다 섬기는 다양한 신들이 있었고, 지배 민족은 피지배 민족의 신보다 더 강하고 월등한 신을 섬기고 있다는 믿음이 편만했다. 모세가 파라오 앞에서 『히브리인의 주 하나님께서』라고 말하기 시작한 순간 파라오는 즉시 비웃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오만한 이교도 왕에게 『히브리인의 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확실하게 보여 주실 참이었다. 더 나아가 그가 섬기는 『이집트의 모든 신들에게도 심판을』(출 12:12) 행하심으로써
이방의 신들과 "영원히 살아 계신 주 하나님"과의 현격한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셨다. 말하자면 이집트를 진노의 심판으로 황폐하게 만드시고 약속하신 대로 노예였던 이스라엘로 하여금 카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심으로써, 그것을 보고 들은 이방 민족들이 『히브리인의 주 하나님』만이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인지하게 하셨고, 또한 그분의 이름을 온 땅에 널리 선포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의 교회"(행 7:38)로 불러냄을 받은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사실 이집트의 파라오도 그 목적을 위해(롬 9:17)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세의 부르심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으니, 이를테면 농부가 풀을 벨 때는 낫을 유용하게 사용하더라도 다 쓴 후에는 헛간에 두고 방 안에 들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시 말해 둘 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일꾼이었다 해도, 파라오는 모세처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는 못했던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고 있는가? 혹시 모세처럼 머뭇거리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라! 주께서 죽으신 목적은 우리의 구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산 자들이 이제부터는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후 5:15).
불타는 가시덤불 속의 하나님과 모세가 나눈 대화는 오늘날에도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 머뭇거리는 성도를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주님께서는 지속적으로 거절하는 모세에게 그분의 말씀을 통해 확신을 심어 주셨고, 또 그가 불가한 이유나 핑계를 대면 그에 상응하는 해결책을 제시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부르심에 있어서 얼마나 신실하게 역사하시는 분인지 모세를 통해 배워야 한다. 당시 그가 내세운 핑계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선뜻 응하지 않는 오늘날 대다수의 미지근한 성도들이 내세우는 변명들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꽁무니를 빼며 변명거리만 찾아다닐 셈인가? 필요하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담대함과 능력과 은사를 왜 안 주시겠는가? 우리 구원의 대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서서 행하실 것이니 주님만 의지하고 따라나서야 한다. 주저하지 말고 주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응하는 성도가 되도록 하자!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