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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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없는 “회초리기도대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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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09월호>

한국교회의 원로목사들이 자기 종아리를 직접 회초리로 때리며 한국 교회의 부정과 부패, 분열과 분쟁, 침체의 죄를 회개했다고 한다. 지난 7월 7일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대강당에서 ‘한국 교회, 회개의 눈물 회초리기도대성회’가 열린 것인데,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의 설교와 각 단체장의 회개기도문 낭독에 이어 원로목사들이 직접 회초리를 맞으며 “제가 먼저 회초리를 맞겠습니다,” “나부터 회개합니다”를 외치며 한국 교회 앞에 솔선수범을 보였다고 언론이 보도한 것이다.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의 변질로 국가의 근간이 흔들린다. 이 모든 게 내 탓이다.”라면서 솔선수범의 자세로 자신의 종아리에 회초리를 대었다는 것이다.
설교 후 원로목사와 장로 10여 명의 회개 기도가 잇따랐고, 그 뒤 20여 명의 원로목사들이 단상 앞으로 길게 늘어선 뒤 바지를 걷어 올렸는데,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말하면서도 내 자신의 영광만 추구했음을 진심으로 회개합니다!”라는 사회자의 선창에 일제히 “회개합니다!”를 복창하며 50cm 길이의 싸리나무 회초리로 자신의 종아리를 힘껏 내리쳤다고 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섬기겠다고 나선 인간들의 섬김을 측량하는 분이시다. 이 세상에서 누가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며, 그분께서 주신 바른 성경대로 정확하게 믿고 행하는가를 저울로 측정하고 계신다. 『이는 주께서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며 행동들이 그분에 의하여 저울질되기 때문이라』(삼상 2:3).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서 하나님께서 나의 온전함을 아시게 되기를 원하노라』(욥 31:6).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저울뿐 아니라, 인간의 행동이 하나님의 기준에 정확히 일치하는가를 재는 “잣대”를 갖고 계신다. 바로 “성경”이다. 성경은 캐논(canon)이라 불리는데, “잣대”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섭리로 보존하신 성경은 하나님을 섬기는 기준으로 제시된 “하나님의 잣대”이며, 그 영적 잣대가 제시한 기준에 미달되거나 자의적인 섬김으로 그 길이를 초과했다면 하나님께 조금도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50cm”짜리 싸리나무 회초리로 자신들의 섬김을 자책하며 종아리를 후려쳤던 그 원로목사들은, 회개를 하려거든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곧은 자, 곧 변개되지 않은 바른 성경으로 그들의 그릇된 섬김을 재고 판단하여 올바른 회개를 했어야 했는데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른 성경의 가치를 알아볼 영적 분별력이 없음은 물론, 지금까지 성경의 하나님을 성경대로 믿고 섬겨 본 적이 전혀 없기에 자신의 섬김이 언제 어디서부터 성경의 기준에 미치지 못했는지를 스스로 깨닫고 회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싸리나무 회초리”와 “하나님의 잣대”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다만 육신과 영의 첨예한 대립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이 “육신적인 생각”으로 들어올린 죽은 싸리나무 회초리에는 싸늘한 사망이 있고, 하나님의 잣대인 말씀에는 영과 생명과 화평이 있기 때문이다.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망이나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과 화평이니라』(롬 8:6).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그런 그들의 육신적인 일을 접하면서 두 가지 의문이 들었는데, 어쩌면 그것은 금번 회초리기도대성회를 주최한 원로목사들의 영적 본질을 묻는 질문이 될 것이다.

첫째, 그들은 참된 영적 아들을 낳은 적이 있었는가?
우리 육신의 선조들이 자신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렸던 것은 주로 자식을 잘못 키운 죄에 대한 징벌을 스스로에게 내려,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가슴 아픈 모습을 지켜보는 자식 안에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극적 변화를 일으키기 위함이었다. “네가 그리한 것은 내가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다. 내가 죄인이다. 그러니 내가 벌을 받아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부모의 인품이 고상하고 그 가르침의 동기가 순수할 때 나올 수 있는 극단적인 처벌로서, 그 부모와 자식 사이에 마음의 진실과 반성이 오가며 자식 안에 긍정적인 바로잡힘이 있게 된다. 마치 하나님께서 인류 안에 들어온 죄와 타락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물어 주님 자신이 친히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죄인들을 대신한 그 아픔과 수치, 고난과 죽음, 부활을 깨달은 많은 이들 안에 통회의 마음을 낳아 새 생명의 새로운 삶을 살게 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다면 그 원로목사들은 그 극단적인 자책성 징계를 보여 줄 참된 영적 아들을 낳은 적이 있었는가? 과연 한국 교회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순수한 복음으로 낳은 그들의 영적 아들인 것인가? 칼빈주의, 알미니안주의, 오순절은사주의 등 배교한 기독교계에 만연하는 모든 주요 이단 교리들의 온상에서 어떻게 영적 아들들이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는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명의 스승을 가졌을지라도 아비들은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고 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영적 아들을 낳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그것은 창세 전에 택함을 받았다는 말도 아니요, 끝까지 견뎌서 구원받았다는 말도 아니며, 방언을 해야 구원받고 성령을 받은 증거라는 것도 아니다. 오직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성경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셨다는(고전 15:3,4) 순수한 복음을 성경 그대로 전파하여 죄인들을 구원받게 했다는 말이다. 바울은 그 원로목사들의 저주받을 교단 교리로(갈 1:8) 영적 아들을 낳지 않았다.
그날 그들 앞에 있던 한국 교회, 곧 세상에서 가장 종교심이 강하면서도 가장 타락한 교인들로 이뤄진 한국 교회는 그들이 순수한 복음으로 낳은 영적 아들들이 아니라 주님께 다음과 같은 책망을 듣기에 합당한 자들이다.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한 사람의 개종자를 얻으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얻고 나면 그를 너희보다 두 배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기 때문이라』(마 23:15). 그 원로목사들은 자신들이 만든 지옥의 자식들 앞에서 자기 종아리를 후려친 것이었다. “지옥의 자식들”이라는 말은 너무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섬긴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바른 복음을 믿고 구원받지 못했다면 지옥에 들어가야 하기에 지옥의 자식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교회라는 곳들을 통해 지옥의 자식이 양산되어 그들이 모두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겠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교회들을 세우시려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단 말인가? 그들은 자신이 잘못 전한 다른 십자가, 다른 복음을 믿었기에 지옥에 가야 할 불쌍한 죄인들 앞에서 자기 종아리를 후려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토록 헛되게 만들어 버린 자들의 회개 퍼포먼스를 보신 하나님의 마음이 타락으로 달려가는 데 빠른 그들의 종아리들보다 덜 아프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자주 너희에게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로 말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로 행하고 있느니라』(빌 3:18).

둘째,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고서 종아리를 때린 것인가?
그날 국내 최고령 목회자라는 이가 낭독한 성회 취지문은 “작금의 한국 교회는 부정과 부패, 분열과 분쟁으로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회초리를 듭시다. 그리고 나의 종아리를 내리칩시다.”였다. 이것이 그들의 잘못이고 하나님께서 그 회개를 받아주신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그들의 진짜 죄는 그것이 아니다. 그들의 죄는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세상을 사랑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 목사들에게서 잘못 배운 한국 교회도 문제지만, 그들 역시나 누군가에게서 잘못 배워 교회의 이름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 가르침의 “먹이사슬”을 거꾸로 추적해 보면 그 맨 위에 “사탄”이 있다. 사탄은 그가 했던 말처럼 이 세상 나라들을 다스리는 이 세상의 통치자이다. 『또 마귀가 주를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잠깐 동안에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보여 주더라. 그리고 마귀가 주께 말하기를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것들의 영광을 너에게 주리라. 그것이 나에게 넘겨졌으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줄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내게 경배하면, 모든 것이 너의 것이 되리라.”고 하니』(눅 4:5-7). 그렇다면 마귀는 왜 교회들이 말씀을 버리고 세상에 관심을 갖기를 원하는 것일까? 이단 교리를 가져오는 자에게 “문안”만 해도 그의 악한 일들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처럼(요이 1:11), 세상에 관심을 갖고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 곧 마귀의 악한 일에 참여하는 것이 되고, 마귀에게 경배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세상을 교회들이 관심을 갖고 사랑하게 하여, 그들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서 떠나 마귀를 경배하는 교회가 되게 한 것이다.
우리는 “교회가 복음으로 세상을 영적으로 다스린다.”라는 이단 교리의 진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광야의 시험 때 마귀는 주님께 『네가 내게 경배하면, 모든 것이 너의 것이 되리라.』(눅 4:7)고 유혹했다. 마귀 자신에게 경배하면 세상을 넘겨주어 그것을 다스리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과 마귀 자신에게 경배하는 것을 직결시킨 것이다. 영적으로 보면, 오늘날 세상 교회들은 마귀에게 경배했기에 세상을 영적으로 다스린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교회가 현 세상을 영적으로 다스린다는 이단 교리는, 그들이 이미 마귀에게 경배한 교회들임을 자인한 것이다. 마귀는 그런 교회들의 거짓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광채가 세상 사람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는 일을 손쉽게 성취해 왔다(고후 4:4). 소위 교회라는 곳들이 복음을 가려 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사랑함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이요, 아버지께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 세상도, 세상의 정욕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것은 『양자 되는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롬 8:15)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명령인데,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도 아무런 징계를 받고 있지 않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친자녀가 아닌 사생아들로 채워진 것이다. 『너희가 징계를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아들들로 대우하실 것이니,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느냐?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징계를 너희가 받지 않는다면 너희는 사생아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7,8). 죄를 짓고도 하나님 아버지께 징계받지 못해 스스로 자기 종아리를 때리고 있다면 그 교회는 사생아들의 교회이다. 만일 한국 교회가 하나님의 자녀들로 구성되었는데 오늘날과 같은 죄를 지었다면, 진즉 그들은 『맥없이 처진 손』과 『쇠약한 무릎』과 『절뚝거리는 다리』로 초토화되었을 것이다(히 12:12,13). 그러나 그들은 막대한 부와 교인 수를 자랑하며 여전히 건재하기만 하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교회이기에 하나님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것이다.
바른 성경을 믿음으로 펼쳐 읽어 본 적이 없는 손으로, 성경적인 복음을 단 한 번도 전하러 다니지 않은 종아리를 때리는 것은 성도가 스스로에게 내리는 징계와 무관하다. 성도가 자신에게 내리는 심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스스로를 판단하고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지 바지를 걷어 올리고 회초리질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어 양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느니라』(히 4:12).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판단한다면 판단받지 않으리라. 그러나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받지 않게 하려 함이로다』(고전 11:31,32).
언론은 “자책초달”(自責楚撻)이라는 그럴듯한 표현을 써가며 그들의 일을 미화하지만 그런 것은 성경적인 자기 징계 방법이 아니다. 성도가 자신을 심판하려면 “바른 말씀”을 펼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가 아닌 그들에게는 스스로를 판단할 바른 말씀도 없고, 그래서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 수도 없을 뿐더러 바로잡힐 수도 없기에, 한국 교회의 부정과 부패, 분열과 분쟁, 침체 따위나 앵무새같이 반복하며 유치한 일들을 벌였던 것이다.
그들은 지식 없는 열정만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데서 돌이켜야 한다. 즉 그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첫째, 한국 교회가 교단 교리가 아닌 순수한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바른 말씀으로 바른 교리를 배워 성경적인 실행을 해야 하며, 셋째, 세상을 사랑하는 데서 돌이켜 성별된 신앙을 가져야 하고, 넷째, 죄와 싸우며 복음을 전하고, 마귀들과의 영적 전쟁을 치르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들이 자기 종아리를 “때리며” “기도”대성회를 했다고 하니 그 일의 기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 기원은 열왕기상 18장의 바알의 선지자들이다. 그 원로목사들은 그 바알의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신에게 기도하며 자기 몸에 상처를 낸 것을 아는가? 『그들이 크게 부르짖고, 그들의 방식대로 칼과 단창들로 몸에 상처를 내되, 피가 흐를 때까지 하더라』(왕상 18:28). 그들 역시 같은 우상 숭배자들이기에 동일한 영으로 행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런 우상 숭배적 실행이 아니라 자기 죄를 성경적으로 정확히 깨달은 사람의 상한 영이다. 『주께서는 희생제를 원치 아니하시나이다. 그렇지 아니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드렸으리이다. 주께서는 번제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희생제들은 상한 영이니 오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상하고 참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그러므로 성경에 없는 일들을 그만두도록 하라! 상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바른 말씀으로 돌아오기만 하라! 그리하면 한국 교회의 개혁은 반드시 성경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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