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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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무관한 죽은 신학 칼빈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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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07월호>

개혁주의생명신학회와 한국개혁신학회가 지난 5월 25일 서울 방배동 백석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개혁교회 종교개혁과 한국교회 신학교육”이란 주제로 공동학술대회를 개최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언론에 따르면, 이날 개회예배 주제 설교자로 나선 백석대학교 총장 장종현 박사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쯔빙글리의 가장 중요한 확신이었던 것처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을 믿음의 근거로 삼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매 순간 경험하는 교회가 되고, 또 신학 교육도 이뤄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는데, 이로써 성경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이 학술대회의 주제였음을 보여 주었다. 이 칼빈주의자의 설교에 뒤이어 알미니안주의자의 말도 곁들여졌는데, 성결대학교 오현철 박사는 “신학대학들은 지금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신학의 실천성을 강화하고, 소그룹 멘토링으로 공동체성을 강화하며, 신학대학들 간의 연합영성훈련을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본래 신학계의 견원지간으로 철천지원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의 5대 강령만이 유일한 진리임을 강조하기 위해 알미니안주의를 이단으로 몰아세웠고, 칼빈주의 아니면 알미니안주의라는 양자택일의 논법을 구사함으로써 칼빈주의만이 진리라고 우격다짐식으로 강요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과 지옥으로 버림받을 사람을 창세전에 영원한 판결로 미리 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택함받은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는 칼빈주의나, 믿음에 행위를 더하여 끝까지 견뎌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먹칠을 하는 알미니안주의나 하나같이 십자가의 원수들인데,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들이 뭐나 되는 듯이 스스로를 추켜세웠다. 지금은 어떤 정체성도 없이 손에 손을 잡고 주님을 대적하고 있다. 자신이 뭘 주장하고 가르치는지, 서로 무엇이 다른지도 모르는 자들이 연합을 부르짖고 있는 것인데, 성경은 이들을 바른 성경 지식으로 무너뜨려야 할 상상의 산물로 규정하고 있다(고후 10:4-6).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초자연적인 책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인간이 성경을 대할 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의 어떤 예언도 사사로운 해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경의 예언은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라고 사도 베드로는 기록하고 있다(벧후 1:20,21). 이 초자연적인 책을 거듭나지 못한 손길들이 사사로이 해석하며 함부로 다룰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이에 대해 베드로는 성경을 억지로 풀면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의 모든 편지에서도 이런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으나 그 가운데는 깨닫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어 무식한 자들과 견고하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들처럼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성령님께서는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에게 영감을 주시어 기록하게 하신 그 책을 통해, 그분의 성경이 소위 신학자라 불리는 자들에게 얼마나 “위험한 책”인가를 계시하셨다. 성경은 특정 신학교의 교과 과정을 이수하고 학위를 받았다 해서 깨달을 수 있는 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성도가 그 책을 온전히 믿고 실행하려는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설 때 성령님께서 그의 지각을 열어 알게 해 주시는 책이다. 성경은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의 의도와 생각을 스스로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살아 있는 책이기에(히 4:12), 특정 교단의 신학을 입증하려는 불순한 의도로 다가서면 되레 걸려 넘어지게 하여 지옥으로 던져 버리는 책인 것이다. 『인자야,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마음속에 자기들의 우상들을 세워 놓고 그들의 얼굴 앞에 그들의 죄악의 방해물을 놓았으니 그들로 내게 조금이라도 묻게 하랴?... 나 주가 그의 우상의 많음을 따라 나오는 그에게 응답하리니... 내가 그 사람을 대적하여 내 얼굴을 두어 그로 표적과 잠언이 되게 할 것이요, 또 내가 그를 내 백성 가운데서 끊으리라. 그러면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리라. 만일 선지자가 속아서 어떤 일을 말하였다면 나 주가 그 선지자를 속인 것이니 내가 내 손을 그에게 펴서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로부터 그를 멸할 것이라』(겔 14:3,4,8,9). 칼빈주의자든, 알미니안주의자든, 그들은 자신의 신학을 마음속에 우상으로 세워 놓고 하나님께 다가섰기에 그분께 속아 버린 사람들이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든지 자신의 신학을 고집하려는 불순종의 영으로 다가서면, 그런 사람은 누가 되었든지 간에 그 말씀에 걸려 넘어지기로 정해졌다고 베드로는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그가 귀중하나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으니, 곧 불순종함으로 말씀에 걸려 넘어지는 자들에게니라. 그들은 또한 그렇게 되기로 정해졌느니라』(벧전 2:7,8).

알고 보면 이 갈릴리 어부를 통해 기록하신 서신들에는 칼빈주의자들의 죽은 생명을 아예 재가 되어 흩어지게 하는 말씀들이 들어 있다. 앞선 베드로전서 2:7,8이 그 한 예인데, 칼빈주의자들은 『그들은 또한 그렇게 되기로 정해졌느니라.』를 그들의 “예정론”에 적용시켜 버린다. 즉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창세전에 멸망으로 예정하셨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말씀에 불순종하면 말씀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정해졌다는 구절을 저주받을 예정론에 억지로 끼워 맞춰 사사로이 해석한 것이다.

이뿐 아니라 존 칼빈의 추종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구절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베드로전서 1:2”이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케 하심을 통하여,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으로 택함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충만할지어다.』 이 구절은 실로 강력한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다. 그들은 이것을 “무조건적인 선택”이라는 칼빈주의 제2강령에 적용하는데, 성경에서 “택함”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곧장 “무조건적인 선택”이라는 거짓 교리로 달려가는 몹쓸 버릇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칼빈주의자들이 집단적으로 감염되어 있는 치명적인 질병이다.

베드로전서 1:2의 해석의 관건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앞에 놓인 다양한 선택 사항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그 돌발적인 “가능성”까지도 꿰뚫고 계신다. 쉽게 말해 럭비공이 땅에 떨어지면 그 공이 어디로 튈지를 미리 알고 계신다는 얘기다. 만 번 떨어뜨려도 만 번 다 어디로 튈지를 알고 계신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럭비공과 같아서 선택 사항들에 어떻게 반응할지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가능성을 미리 알고 계시며,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그분의 “미리 아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2을 다시 한 번 읽어 보라.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케 하심을 통하여,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으로 택함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충만할지어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함을 받았고, 또 성령의 거룩케 하심을 통해 택함을 받았다고 말씀한다. 이중적인 기술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분이기에,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에 누가 어디서 어떤 경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것인지를 미리 알고 계신다. 그분께서 미리 아신 사람을 미리 택하신 일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실제적인 택하심은 언제 이뤄지는가? 이것은 우리가 성령님에 의해 “언제” 거룩하게 되었는가의 문제다. 즉 우리가 “언제” 복음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했고 죄에서 정결케 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피를 신뢰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영원 전인가, 아니면 어머니의 태에서 나온 뒤인가?”

필자는 1993년 5월 5일 저녁 무렵에 구원받았는데, 이것은 분명 영원 전이 아니었다. 필자는 영원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바로 그날 복음에 순종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아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던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너희가 죄의 종이었으나 너희에게 전하여 준 교리의 본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음이라』(롬 6:17,18). 창세전에 구원으로 예정되고, 그 뒤에 성령의 “불가항력적인 역사”(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거듭난 것이 아니라, 필자 본인의 『마음으로부터 순종』함으로써 구원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구원 방식은 거듭난 성도들 모두에게 동일하게 해당된다. 복음을 믿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고 하나님께는 택함을 받는 것이다. 그 택함은 『성령의 거룩케 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이 말씀은 죄인이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에 이르는(unto obedience and sprinkling of the blood of Jesus Christ) 일에 성령님의 개입하심이 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죄인에게 찔림을 주시고(요 16:8,9),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그리스도의 피를 그에게 적용하셔서(딛 3:5, 계 1:5) 그의 영을 거듭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요 3:5,6) 동시에 그의 혼을 죄의 몸에서 분리시키시고(골 2:11), 그를 그리스도의 몸 안에 넣으시는(고전 12:13) 등 다양한 역사를 동시에 이루시기 때문이다.

성경과 성령의 인도를 강조하면서 매 순간 성령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교회가 되고, 또 신학 교육을 하자는 말 자체는 좋다. 그러나 변개된 성경을 사용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며, 가르치는 신학이 성경적인 교리가 아니라면, 그러한 주장은 겉보기만 먹음직스런 빛깔을 띠었을 뿐 맛은 완전히 맹탕인 “빛 좋은 개살구” 같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추종하는 칼빈주의는 존 칼빈이 그 창안자가 아니며, 스펄전, 뵈트너, 와필드 등의 칼빈주의자들도 인정했듯이 카톨릭 신학자인 어거스틴에게서 나왔다. 존 칼빈이 마치 자기 교리인 것처럼 주장한 예정론은, 그보다 약 천 년 전에 거듭나지 않은 어거스틴이 주장한 이단 교리였던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종교를 철학과 접목시켰던 어거스틴에게서 나온 철학적 궤변이 칼빈의 교리인 것인데, 그러한 바탕 위에 세워진 신학교들이 성경과 성령을 얘기하고 있으니 기가 찰 따름이다.

성경과 그 책의 저자이신 성령님은 결코 뗄 수 없는 관계다. 성령님께서는 성막의 금촛대처럼 빵인 하나님의 말씀에 조명을 주시는 분이며(요 14:26), 신실한 성도들을 통해 성경을 보존하시는 분이다(시 12:6,7). 또한 성도들에게 능력을 주시어 땅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음 전파자로 살게 하신다(행 1:8). 창세전에 구원으로 택함받은 사람들에게만 성령님이 찾아가셔서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거듭나게 하셔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면 복음 전파가 왜 필요하겠는가? 그렇게 가르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마 28:19,20) 따른 복음 전파 사역을 방해하는 마귀의 하수인들이다. 성경에 관해 가르칠 게 없어서 그런 것인지, 존 칼빈의 5대 강령 안에 성경을 억지로 쑤셔 넣는 일에만 골몰하는 신학은 죽은 신학이다. 어디 칼빈주의뿐이겠는가? 바른 성경과 그 진리의 지식을 거부하는 모든 교회들과 신학교들이 한통속이며, 모두 똑같은 죄인들인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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