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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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사만 사천 명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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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08월호>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역사를 이루시는 데 있어서 숫자를 중요시하셨다. 우주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얼마인가를 깨닫는 데는(엡 3:18) 숫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우주가 창조되었다는 것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수학 법칙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우주는 창조주의 의도적이고 치밀한 계산하에서 지어졌는데, 주님께서는 땅을 지으실 때 그 치수를 재기 위해 숫자를 사용하셨다. 『내가 땅의 기초들을 놓을 때... 누가 그 치수를 재었는지 네가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느냐?』(욥 38:4,5)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분이시기에 어떤 일을 하시든 진흙을 대충 뭉쳐 놓듯 하시는 법이 없다. 그분의 창조 세계는 치수와 비율로 균형미와 조화미를 담아 놓은 세계다. 성경을 기록하실 때도 숫자를 활용하셨는데, 특정 숫자에 고유의 상징성을 부여하시어 보다 효과적으로 진리를 깨닫고 기억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완성의 수"인 일곱으로 일하신다. 일곱 부활, 일곱 신비, 일곱 심판, 일곱 침례 등 일곱 체계로 일하시며, 한 주는 칠 일로, 인류 역사는 7천 년으로 완결 지으신다. 신구약 성경을 완성하는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는 일곱 봉인, 일곱 나팔, 일곱 호리병, 일곱 촛대, 일곱 영, 일곱 교회 등이 나온다. 이 요한계시록은 교회가 휴거된 이후에 지상에서 펼쳐질 대환란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주로 다루고 있는 예언서로, 그 책의 중심에는 "이스라엘"이 있다. 이스라엘은 교회가 휴거되면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라 불리는 7년 대환란으로 들어가 고난을 당하게 되는데, 요한계시록에서 이스라엘이 한 여인으로 등장하는 장은 다름 아닌 "12장"이다. 특히 머리에 "열두 별"이 있는, 산고로 울부짖는 여인으로 묘사된다(계 12:1,2).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숫자는 "12"이므로, 여인의 열두 별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한다. 또한 요한계시록 21,22장에서 묘사되는 새 예루살렘에는 유대인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진 열두 기초석이 있다(계 21:14). 측량된 그 도성은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각각 12,000(12 × 1,000)스타디온이며(계 21:16) 성벽은 144(12 × 12)큐빗이다(계 21:17). 도성의 열두 진주로 된 열두 대문으로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수에 따라 계수된 열두 민족이 그들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들어올 것이다(계 21:21,26).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와 그 강 양편에 있는 생명나무에는 그 열두 민족을 위해 열두 가지 과실이 달마다(열두 달) 맺히게 된다(계 22:2).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숫자인 "12"를 영원까지 가져가시는데, 이스라엘처럼 중요한 민족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또한 대환란 때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인장으로 표시하실 유대인 동정들이 있을 것인데, 그들이 바로 "144,000명"의 유대인 환란 성도들이다. 『또 내가 인장으로 표시를 받은 자들의 숫자를 들었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십사만 사천 명이 인장으로 표시를 받았더라』(계 7:4). 이들은 대환란 때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각각 12,000명씩 선별되어 자기들의 이마에 인장으로 표시 받고 환란을 통과하게 될 유대인 남자 동정들이다(계 14:4). 12지파에서 12,000명씩 선별되었으므로(12 × 12,000) 모두 144,000명이 된다. 하나님께서 이 유대인 환란 성도들에 관하여 이토록 "12"를 강조하신 것에는, 이들 십사만 사천 명의 정체에 대해 딴 생각을 품지 말라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나온 환란 성도들을 여호와의 증인처럼 "구원받아 천상에 간 여호와의 증인들"이라고 하거나, 어떤 사이비 이단처럼 자기 집단 사람들이라고 하거나, 배교한 교회들처럼 교회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2"는 명백히 이스라엘의 숫자다. 인류 역사의 중심 민족은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세 대륙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이스라엘이며, 성경도 땅의 중심에 사는 그 유대인들에 의해 기록되었다(롬 3:2). 『만물 위에 계셔서 영원히 송축받으실 하나님』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스라엘에서 나셨다(롬 9:5). 인류의 구원은 유대인에게서만 나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요 4:22).

최근 십사만 사천 명에 관하여 어리석게 해석해 놓은 기사 하나를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은 제대로 된 "영"과 "신학"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모 신학대 교수가 한 기독교 신문에 십사만 사천 명과 관련하여 게재한 칼럼 내용이었는데, 그 해석이란 것이 유대인 환란 성도들과는 완전히 무관한 사적인 해석이었다. 그것은 배교한 기독교계의 표준적인 오류이기에 본 논단에서는 이를 성경적으로 바로잡고자 한다.

첫째, 그는 요한계시록 14장의 시온 산 위에 서 있는 십사만 사천 명을 "교회"로 해석하면서, 그들을 가리켜 앞선 7장에서 인장으로 표시 받아 이 땅에서 구속받은 교회라고 설명했다. 『또 내가 쳐다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 위에 서 있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더라』(계 14:1). 이 십사만 사천 명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대환란 때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서 12,000명씩 선별되어 자기들의 이마에 표시를 받은 "유대인들"이다. 요한계시록 14장의 상황은 바로 이들이 환란 끝에 휴거되어 셋째 하늘의 시온 산 위에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서 있는 모습인 것이다. 7장에서 그들이 이마에 받은 표시는 『어린양』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여호와"이다. 이들이 교회라면 교회가 대환란을 통과하여 그 끝에 휴거된다는 이단 교리가 나오는데, 이는 요한계시록의 전체적인 구성과 맞지 않다. 왜냐하면 1-3장에서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묘사되고, 4:1,2에서 교회를 예표하는 사도 요한이 휴거된 뒤로 19장까지는 교회가 지상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가 셋째 하늘로 휴거된 뒤로 땅에서는 전무후무한 대환란이 펼쳐지는데, 예수님께서는 이에 관하여 『이 땅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생각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인하여 실신할 것이라.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라.』(눅 21:26)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이 『다가올 진노』(살전 1:10)로부터 구원하셨기 때문에 교회는 환란을 통과하지 않는다. 이처럼 교회가 환란 전에 휴거되기에, 요한계시록의 대환란을 묘사하는 장들(4-19장)에서는 교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짓 교사들이 교회라고 가르치는 "십사만 사천 명"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동료 유대인들의 가증한 죄로 인해 탄식하고 울부짖는 신실한 유대인들이라고 에스겔 9장에서 그 정체를 계시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이 그가 계셨던 그룹에서 올라가 성전의 문지방에 이르니 주께서 가는 베옷을 입고, 옆구리에 서기관의 잉크통을 찬 사람을 부르시더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성읍 중간을 통과하라. 예루살렘 중간을 통과하여 그 가운데서 행해지는 모든 가증한 짓들로 인하여 탄식하고 울부짖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 하시고』(겔 9:3,4). 『이스라엘과 유다 집의 죄악이 심히 크고 그 땅이 피로 가득하며 그 성읍이 위법으로 가득하』기(겔 9:9) 때문에 애통하게 되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다. 구약성경은 유대인을 다룬다. 교회가 이스라엘과 유다 집의 죄악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읍에서 애통하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 애통하는 유대인들의 이마에 서기관의 잉크로 표시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마나 오른손에(계 13:16) 짐승의 표 받기를 거부하고, 적그리스도 숭배에(계 13:12)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여자를 알지 못하는 남자 동정들을 택하신 이유는(계 14:4), 그들이 짐승 숭배 의식의 일환인 음행에 참여하지 않은 순결한 성도들이기 때문이다. 이 남자 동정들이 교회라면 교회에는 여자를 모르는 총각들만 있다는 얘기인데, 참으로 얼토당토않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피하기 위해 이 부분을 아예 영적으로 해석하는데, 여자는 세상과 우상을 의미한다고 해석해 버린다. 여자로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것은 교회가 세상이나 우상의 가치관과 관습 등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대충 얼버무리는 것이다.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문자적으로 해석하라!

둘째, 그러한 거짓 교사들은 십사만 사천 명을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라고 말하면서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에게 적용하기를 좋아한다. 『이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는 자들로 하나님과 어린양께 첫열매들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을 받았느니라』(계 14:4). 그들은 이 문자 그대로의 "유대인들"이 대환란 때 『어린양』과 연관되는 이유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것이다. 『어린양』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된 이름이다. 초림 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선포한 인물은 침례인 요한이었다.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요 1:29).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이름은 사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데, 요한복음은 그 위치상 신약에 가장 가까운 복음서다. 그만큼 요한복음에는 신약적인 구원과 관련된 말씀들이 다수 등장하는데, 사복음서의 순서와 그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사역이 어떤 결과에 도달했는가를 깨닫게 한다. 즉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다가(마태복음) 종으로서 일하시고(마가복음) 인자로서 고난을 당하신 후(누가복음)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요한복음). 그 뒤에 이어지는 로마서에서는 이 『하나님의 어린양』의 속죄 사역이 신약적으로 자세히 설명된다.

말하자면 유대인 환란 성도들이 『어린양』을 따라간다는 것은 그분을 갈보리 십자가에서 죄를 대속해 주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믿고 따른다는 뜻이다. 하지만 환란 성도들의 구원 방법은, 믿음으로만 받는(엡 2:8,9) 교회 시대와 달리 구약처럼 "믿음과 행위의 결합"이다(시 24:4,5, 전 12:13,14). 『그러자 그 용이 여인에게 분노하여 여인의 씨 가운데 남은 자들, 즉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싸우려고 나가더라』(계 12:17).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가 있으며 여기에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느니라』(계 14:12). 이 유대인들은 교회가 휴거된 이후 대환란 때 신약성경을 깨닫게 되고, 구약의 모든 희생제물들이 예표했던 한 완벽한 제물을 통해 죄 문제를 해결 받는다(히 10:9-14). 그 뒤로는 유대인의 방식대로 율법을 지키게 되는데, 그들이 셋째 하늘로 휴거되어 유리 바다 위에서 부르는 두 노래, 곧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계 15:3) 역시 그들이 "믿음(『어린양의 노래』)과 행위(『모세의 노래』)의 결합"으로 구원받았음을 알게 해 준다.

유대인은 대환란 때 유대인의 방식으로 구원받는다. 구약처럼 믿음과 행위의 결합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신뢰를 바탕으로(믿음) 율법에 규정된 의식들과 계명들을 지키지만(행위), 구약의 구원과는 차이를 보인다. 이는 불완전한 짐승들의 피가 아닌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벧전 1:19)의 대속을 믿고 그 후로는 대환란 끝까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기 때문이다(마 24:13). 이 유대인 환란 성도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흠이 없다는 평가를 듣는다(계 14:5). 자신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죄를 짓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최상의 성도들인 것인데, 그렇다고 이 훌륭한 성도들을 본받고 싶은 마음에 그들을 교회로 착각하여 교회가 환란을 통과한다고 가르친다면 결국 사악한 이단 교리를 퍼뜨리게 된다. 그렇게 가르치는 자들은 대환란으로 들어갈 것이다. 더 이상의 속죄제가 없는(히 10:18) 『어린양』의 영원한 속죄를 믿지 않는다면, 행위로 구원을 유지해야 하는 대환란으로 들어가 목 베임을 당하거나, 전무후무한 대재앙을 겪다가 지옥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십사만 사천 명에 대한 무지에서 속히 벗어나도록 하라!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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