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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7년 01월호>
1997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하루 하루가 그리스도인에게는 기다림의 연속일 것이다. 새해가 되면 송구영신(送舊迎新)이란 말을 많이 듣게 된다. 이는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도 잘못된 것들은 과감히 버리고 진리의 지식(딤전 2:4)으로 무장해야 할 것이다.새해를 맞아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신앙에 대해 다시 한 번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정통신학으로 인식되어 있는 “언약신학”(혹은, 계약신학)이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것이다. “언약신학”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구약성도와 신약성도가 같은 방법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담, 아브라함, 노아,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삼손,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 등 수많은 구약시대 사람들이 오실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었기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일을 “돌아보고” 믿은 우리 신약성도들과 같은 방법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가?
물론 ‘예표’는 항상 있어 왔다. 아담이 입었던 가죽 옷(창 3:21), 이삭 대신 번제물이 된 어린 양(창 22:3-14), 유월절 어린 양(출 12장), 모세가 들어 올린 놋뱀(민 21:6-9), 이삭, 요셉, 모세, 다윗 등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나 사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예표’는 어디까지나 예표일 뿐 그것이 그 ‘실체’가 될 수는 없다. ‘예표’는 단지 미리 보여 주는 것으로써, 어떠한 사실이 있을 것을 미리 알려 줄 뿐이지 그 ‘사실’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율법시대에 수없이 죽어갔던 어린 양, 소, 염소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 예표였지 그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었다.
또한 구약의 성도들이 오실 메시야를 기다린 것은 사실이다. 유대인들이 누구나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것은 사복음서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이것은 심지어 헤롯 왕과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들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많은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언을 하였고, 특별히 포로시대부터는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이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 즉 그리스도를 기다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기다린 메시야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세상의 죄를 구원하시는 구세주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는 “민족적인” 메시야였다. 그들이 그 메시야를 기다린 것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엡 1:7, 골 1:14)를 믿는 것과 어떠한 연관도 없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신약의 교회와는 여러 모로 달랐다. 그들은 반드시 유월절을 지켜야 했고(출 12), 안식일을 지켜야 했고(출 16:23-26; 20:8-11; 31:12-17, 민 15:32-36, 느 9:13-14), 할례를 받아야 했다(창 17:9-14,24-27; 21:4, 출 12:48, 레 12:3, 수 5:2-9). 그들에게는 많은 법규가 선포되었고 그것을 지켜야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 주셨다. 주의 계명과 법규를 지키지 않을 때, 그들은 민족적으로 고난을 받을 뿐 아니라 각 개인은 그들의 죄들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겔 3:19, 요 8:21).
물론 구약이나 신약에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들에게 믿음은 필수적인 요소였다.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으로’란 단어 뒤에 있는 많은 구약성도들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내가 갖고 있는 믿음과 아브라함의 믿음이 같다고 말하지 말라. (“같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우리네 언약신학자님들이다.)
구약 성도들의 믿음의 내용은 우리의 믿음과 다르다. 아벨은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그래서 그는 의로운 자라고 증거받았다. 에녹은 믿음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했다. 그래서 자기 집안을 구원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면서 떠났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제물로 드렸더니, ‘씨’에 관한 축복을 받았다. 이처럼 성경은 분명히 그들의 믿음이 무엇이었는지 기록하고 있다. 바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의인이 믿음으로 사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약성도들의 믿음이 자신의 개인적인 믿음인 반면 신약 성도들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이다(갈 2:20). 그러므로 우리 신약성도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은 얼마나 중요한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딤전 3:16) 우리를 위해 죽어주시고 또 부활하셨다. 바로 그분 예수의 이름이 아니고는 우리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음이라』(행 4:12).
또한 우리의 구원이 구약성도들과 다르게 영원히 안전하게 보장되는 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믿음과 행위가 우리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해 놓으신 일을 믿는 믿음과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성도들은 아무리 의로운 자라 할지라도 그가 “자기 의”로부터 돌이켜 죄악을 범하면 그는 그의 죄 가운데 죽으며, 지옥으로 던져질 것이다. 구약 성도들은 아무도 거듭나지 않았고, 영적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도 영원히 성령께서 내주하신다는 신약 구원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다윗도 범죄한 후 구원을 잃어버릴까 염려했다(시 51:11).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며, 그들의 구원은 믿음 외에도 행위가 필수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성경을 변개시키거나, 영적으로 마구 해석하지 않는 이상, 기록된 말씀 그대로를 믿는다면 구약과 신약의 믿음이 같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모세가 아무리 놋뱀을 들어올렸다 해도, 그 놋뱀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일 수는 없다. 아무리 많은 제사장들이 날마다 짐승들의 피를 쏟아 하나님께 드렸다 할지라도, 그 짐승들이 예수 그리스도일 수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모든 예표들을 완성하신 완성자이시기 때문에 구약의 예표들이 빛을 발하는 것이고, 의미가 있는 것일 뿐이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차이이며, 언약신학과 성경의 차이이다. 아직도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아브라함과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을 같게 여긴다면, 그는 어린 양의 혼인식에서 누가 “신부”이고 누가 신랑의 “친구”이며 누가 “손님”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분명한 것은 A.D 30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어떠한 사람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거듭나지(요 3:3-5) 않고서는,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1997년 새해를 맞은 우리에게 주님의 재림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쩌면 올해에 오실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을 더욱 신실하게 수행하며, 진리의 지식에 이르도록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새해에는 구약 성도는 십자가를 앞으로 바라보고 믿었고 신약 성도는 십자가를 뒤로 보고 믿고 있다는 비진리에서 떠나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여 진리의 지식에 이르는, 진정한 신약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딤후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