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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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계”(靈界)를 모르면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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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03월호>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땅”을 “허공”(虛空)에 매다셨다(욥 26:7). “우주”라 불리는 이 “허공”은 관측 가능한 은하의 수가 약 2조 개 이상이 되고, 우리가 사는 은하 내의 별들의 수는 약 1,000억 - 4,000억 개라고 한다. 우리의 지구와 태양계가 속한 은하를 단순히 “우리 은하”라고 하는데, 이를 칭하는 “은하수”(銀河水)는 “은빛으로 빛나는 강”이란 뜻이다.

“우리 은하”의 지름은 약 87,500광년이며, 중심핵은 직경이 약 10,000광년, 두께가 약 15,000광년이다. 지구가 속한 “태양계”는 은하의 중심이 아니라, 그 중심에서 약 26,000광년 떨어진 “오리온자리 팔”이라고 불리는 변두리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은 이러한 우주에서 “하나님”을 찾겠다고 우주선을 발사해 왔지만, 그들은 “허공”에 가시적인 “물질계”와 비가시적인 “영계”가 공존한다는 점을 모르고 있다. 유리 가가린(Yuri Gagarin)에 이어 두 번째로 지구 궤도를 돈 소련의 우주비행사 게르만 티토프(Gherman Titov)는 직설적인 무신론 발언을 했는데, 그는 1962년 미국 방문 당시 기자회견에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주에 사신다고 하지만, 나는 주의 깊게 살펴보았어도 천사나 신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라고 했다(이 말은 “물질이 정신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유물론자들이 “무신론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데 매우 유용한 자료가 되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1971년 달착륙선 아폴로 15호의 조종사로 참여했던 미국의 제임스 어윈(James Irwin)은 달에 다녀온 이후 “지구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말로만 들었지만, 우주에서는 그분의 임재를 직접 느꼈다”면서 지구에 귀환한 뒤 주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했다고 한다. 이것은 “우주”라 불리는 “허공”에 대한 인류의 상반된 인식을 보여 주는 매우 극명한 예가 아닐 수 없다.

“우주”라는 “허공”에 “물질계”와 “영계”가 공존한다는 것은 “몸”과 “혼”과 “영”을 지닌 사람이 알아야 할 매우 중요한 진리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물질인 “몸”으로만 살지 않고 비물질인 “영”으로도 사는 “혼”이기 때문이다. “혼”은 외부의 자극을 전달하는 “몸”에도 반응하고 하나님을 인식하는 “영”에도 반응하는 “자아”이다. 물리적 구조와 영적 구조가 공존하는 사람은 자신보다 먼저 창조된 “물질계”와 “영계”라는 두 세계에 알맞게 지음받았다.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몸]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영]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창 2:7). 『화평의 하나님 바로 그분께서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책망할 것이 없게 보존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노라』(살전 5:23). 사람이 “빵”으로만 살아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마 4:4) 이유는,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심고 건축하는”(마 24:38, 눅 17:28) 일들이 사람의 일생을 구성하는 전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을 지닌 사람은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하고, “영의 호흡”인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감으로써 『한 영』이신 『하나님』(요 4:24)과 “접속”되어야 한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계”와 “영계”를 균형 있게 누리는 인생을 살 수 있다. “영계”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물질계”에 『일곱 별과 오리온을 만들고... 낮을 밤으로 어둡게 만들며 바다의 물들을 불러 지면에다 붓는... 주』, 곧 하나님 자신을 『찾으라.』(암 5:8)라고 “사람”에게 명령하신다. “물질계”를 누림과 동시에 “영계”에 바르게 “접속”되어 있어야 할 의무가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몸, 혼, 영)대로 지음받은(창 1:26,27) “사람”은, 그런 면에서 “영들”인 “천사들”과 차별화된 매우 독특한 피조물이다.

클라렌스 라킨은 “사람의 삼중성,” 곧 “몸, 혼, 영”을 “뜰, 성소, 지성소”로 구성된 “성막”을 통해 설명한다. 「성막과 그 뜰은 “사람의 삼중성”과 같은 형태이다. “뜰”은 몸, “성소”는 혼, “지성소”는 영을 의미하며, 뜰에서 “지성소”로 통하는 길은 오직 “성소”를 통하는 길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몸과 영도 혼을 통하지 않고는 연결될 길이 없다. 성막이 다 완성된 후에도 하나님의 영이 내려와 지성소에 거하시기까지 그곳은 하나님의 임재 없이 비워진 채로 있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몸과 혼과 영이 완전한 것 같아도 성령께서 사람의 영에 들어와 그 영을 살리시고 내주하시기 전까지 사람의 영은 거듭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일(성령의 내주 - 필자 주)은 거듭날 때(새로운 출생) 일어난다」(<세대적 진리>, p.183).

성막이 존재했던 목적은 사람이 그 가장 깊은 곳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있었다. 뜰에서 잡은 짐승의 피 흘린 희생 제사를 통해 죄가 용서되었고(히 9:22), 지성소 “자비석”에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자비가 베풀어졌다.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하나님의 임재 장소인 “지성소”였듯이, 사람의 삼중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님께서 내주하실 수 있는 “영”(엡 3:16, 고후 4:7)이다. “지성소”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성막이 아무 의미 없는 곳이었듯이, 성령님께서 사람의 죽어 있는 “영”을 다시 살려(엡 2:1) 그 “영”과 하나 되어(고전 6:17) 내주하시지 않는 한, 사람은 아무 의미 없는 인생을 살게 된다. 이러한 사람이 죽으면 “혼과 영”이 “몸”에서 떠나는데, “몸”은 예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전 12:7). “혼”은 “구원 여부”에 따라 그 목적지가 “낙원”(하늘나라)과 “지옥” 둘 중 하나로 달라진다(cf. 눅 16:23, 고후 12:4).

성령님께서 오신 뒤로 “혼”의 운명은 “영”의 상태에 달려 있다. “영”이 거듭났는가, 거듭나지 않았는가에 따라 “혼”이 구원의 생명을 누릴 수도 있고(벧전 1:9) 영원한 사망에 처해질 수도 있다(계 21:8). 성경에 계시된 이와 같은 진리를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이해할 수 없다. “영이 거듭나고,” 그 영 안에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이신 성령님께서 내주하셔야만 영적인 것들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하나님께서 “허공”에 매다신 땅에 죄가 들어와 사람의 “영”이 죽어 버린 일의 이면에는 “허영심”이 있다.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고 “신들과 같이 되고자”(창 3:5) 했던 일이 발단이 되어 결국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온 인류에게 사망이 전달되는(롬 5:12) 비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고 “영계”와의 관계에도 “치명적 손상”을 입혀,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사탄과 그의 세력, 곧 『정사들과 권세들과 이 세상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 악』(엡 6:12), 그리고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딤전 4:1)과 “접속”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로써 마귀가 최초의 사람에게 불어넣은 “허영심”은 죄성을 물려받은 후손에게도 유전되어 부정적인 열매를 맺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고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너희는 더 이상 다른 이방인들처럼 허망한 마음으로 행하지 말라. 그들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그들 안에 있는 무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리 떨어졌고 그들의 명철은 어두워졌으며 감각을 상실하여 자신을 방탕에 내어주어 욕심으로 모든 불결한 것을 행하느니라』(엡 4:17-19). 이 말씀에서 보듯이, “허망한 마음,” 곧 “허영심”의 특징은 “명철을 어둡게 하고 감각을 상실케 하여 죄를 짓게 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일이 거듭나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인데, 왜냐하면 그가 “그리스도인”을 향해서 『너희는 더 이상 다른 이방인들처럼 허망한 마음으로 행하지 말라.』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허영심”을 품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명철은 어둡게 되며 감각을 상실하여 욕심으로 죄를 짓게 되지만, 그 자신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성도는 “왕년에 내가 이런 사람이었다.”라고 교회 성도들에게 자랑하면서 성도들 위에 군림하는 태도를 취하는데, 그 자신은 주님을 위해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면서, 단지 자기가 세상에서 “대단한(?)” 일을 했다는 사실만을 중요하게 여긴다. 어떤 성도는 “나는 교회에서 직분을 가지고 있다. 나는 주님의 사역을 하는 사람이다.”라고 자부하거나 남이 그렇게 소개해 주는 걸 좋아하는데, 이 역시 “허영심”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두려워하며 매주 발표되는 구령 결과 보고에 지나치게 민감한 성도도 있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오면서 누구 보란 듯이 외모를 지나치게 꾸민 탓에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상실해 버린 성도도 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찾고” “배우고” “섬기는” 목적(!)이 정상적인 성도들과 다른 이들이며(사 58:1-4), 결과적으로 기도응답이 되지 않는다(사 59:1,2).

그리스도인에게 “허영심”이 자리잡으면, 무엇보다 “영계에 속하신 성령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성도의 거듭난 영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는 성도가 하나님을 섬길 능력을 주시는데, 즉 “복음 전파”(행 1:8)와 “넘치는 소망”(롬 15:13), “풍성한 삶”(엡 3:20)이 모두 성령님께로부터 나오는 능력의 결과이다. “허영심”은 성도에게서 이 모든 가능성을 끊어 버림으로써 “성령의 열매”(갈 5:22,23)도 맺지 못하고 “성령 충만”(엡 5:18,19)도 경험할 수 없는 육신적인 삶을 살게 한다. 허영으로 마음이 들뜬, “물기 없는 구름”과 같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경은 『어떤 일도 다툼이나 허영을 따라서 하지 말고 오직 생각의 겸손함으로 남을 자신들보다 존중하』라고 명령한다(빌 2:3). 성도의 “허영심”은 사실상 “영계”에 대한 그의 무지를 보여 준다. 그런 성도가 “영적으로 망하지” 않은 경우는 지난 2천 년 신약교회사에 단 한 번도 없었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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