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BB칼럼 분류

위대한 그리스도의 군사들 <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편 >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02월호>

『그런즉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로서 고난을 견뎌 내라. 전쟁에 임하는 자는 아무도 이생의 일들에 얽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자기를 군사로 뽑은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또 이기려고 애쓰는 사람이 규칙대로 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하리라』(딤후 2:3-5).

조지 휫필드는 1714년 영국 글로스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술을 판매하는 중간 상인이었고 여인숙을 운영했다. 조지 휫필드가 두 살 때 아버지가 죽었고, 혼자된 어머니 엘리자벳은 일곱 명의 자녀들을 양육해야 했다. 그녀는 얼마 후에 재혼을 했지만 그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열다섯 살 때 조지는 어머니를 설득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여관에서 일하겠다고 했다. 그는 후에 학교로 다시 돌아와 학업을 마쳤고, 1732년에는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갔다. 약 1년 후에 그는 요한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를 만나 "거룩한 클럽"(Holy Club)에 가입했다. 그로부터 2년 뒤에 심한 질병과 큰 영적 전쟁을 겪으면서 조지 휫필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다. 그런 와중에 건강이 나빠져서 어쩔 수 없이 학교 수업을 중단해야 했고, 1735년 5월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736년 6월에는 영국국교회에서 집사 안수를 받았으며, 그다음 주에는 생의 첫 번째 설교를 했다. 휫필드가 설교 요령을 습득하면서 이듬해에는 매우 강력한 설교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1738년 1월, 조지 휫필드는 복음 설교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것은 요한 웨슬리가 했던 것보다 2년 이상 이른 것이었다. 그때 그는 주로 조지아 주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 설교했는데, 특히 고아원이나 학교 교정에서 설교했다.

1738년 말에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다음 해 1월에 영국국교회의 사제로 안수를 받았다. 그 후에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감리교도들과 교류할 수 있을까" 하고 그들을 찾아다녔으나 대부분 그를 배척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런 배척에 대해 개의치 않았고, 그가 설교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계속 설교를 하면서 약간의 열매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지 휫필드가 많은 열매를 수확할 수 있었던 기회는, 그가 야외에서 대중을 상대로 한 집회를 열려고 결정할 때까지 오지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대중을 상대로 공개적으로 했던 설교는 1739년 2월에 있었던 설교였다. 그가 설교한 지 2,3개월 만에 그 청중의 수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추세는 그가 여행했던 미국과 영국 어디에서든지 나타났다. 조지 휫필드의 설교는 그처럼 강력하고 극적이어서 설교하는 도중에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경우가 파다했다. 그의 타고난 음성은 크고도 분명해서, 벤자민 프랭클린이 휫필드의 목소리를 1마일 밖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조지 휫필드는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대서양을 건넌 것이 13차례나 되었는데, 말하자면 그의 생애 중 만 2년을 바다 위에서 보냈던 것이다.

미국에서 그는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 메릴랜드, 매사추세츠, 펜실베이니아, 뉴욕, 로드아일랜드 등의 주들에서 수천 명에게 설교했다. 그가 가는 곳에는 어디든지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의 설교를 들었는데, 어떤 경우에는 2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도 했다.

1741년이 시작될 무렵에는 그의 순회 설교 여정이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지방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많은 혼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이켰다. 이런 그의 여정은 1748년에는 버뮤다, 1754년에는 포르투갈, 1756년에는 아일랜드, 1768년에는 네덜란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조지 휫필드가 1739년 4월 27일 런던에 있는 한 노천에서 설교를 시작한 지 2개월쯤 됐을 때, 그는 이슬링턴에서 그의 친구이자 영국국교회 목사인 스톤하우스를 위해 설교하려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기도 중간에 교회의 교구 위원들이 그에게 오더니 런던 교구에서 설교할 수 있는 허가증을 요구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교구에서 규칙적으로나 공개적으로 설교할 수 있는 허가증 같은 것은 없었다. 문제의 요지는, 그가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을 교구 위원들이 금지시키기 위한 의도였다는 점이다. 그러자 조지 휫필드는 주의 만찬식이 끝난 후에 밖으로 나가 교회 마당에서 설교했다.

평범한 진리는, 그 당시의 영국국교회가 오늘날 한국 교회처럼 휫필드 같은 설교자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교회들은 너무 깊은 잠에 빠져 있었기에 휫필드 같은 설교자를 수용할 수 없었고, 휫필드처럼 잠잠히 있을 수 없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매우 초조해했다. 마귀에게 혼자서만 알아서 하라고 맡겨 두고서 말이다.

1769년 가을, 조지 휫필드는 미국으로 마지막 여행을 했다. 그는 그의 고아원을 베데스다 대학(Bethesda College)으로 바꾸었고, 그해 겨울을 조지아 주에서 보냈다. 이듬해 봄에는 북쪽으로 올라갔는데, 필라델피아와 뉴욕, 뉴잉글랜드 등지에서는 십자가의 군사로 잘 알려진 그를 기쁘게 영접했다. 하지만 9월에는 지병이 심해져서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기다리고 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방해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9월 29일 뉴햄프셔 주 엑세터에서는 설교할 힘을 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는 많은 군중 앞에서 두 시간을 설교할 수 있었다.

이 기간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휫필드가 행한 사역의 양상은 거의 동일했다. 그가 더 오래 살았다 해도 여전히 그는 그렇게 설교했을 것이다. 1739년부터 그가 죽은 1770년까지, 그의 31년간의 인생은 한결같이 "한 가지 제복만을 입은 직업인"의 인생이었다.

생을 마감하기 하루 전날, 조지 휫필드는 장로교 목사 조나단 파슨스(Jonathan Parsons)와 저녁 식사를 한 후, 손에 촛불을 들고 그 촛불이 다 탈 때까지 설교했다. 촛불이 꺼진 후 다음 날 새벽 두 시에 천식이 그를 급습하자, 휫필드는 새벽 6시에 숨을 거두었다. BB

BB칼럼 309 / 7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