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칼럼 분류
이어령, 지성과 영성이 만나 또 다른 배교로
컨텐츠 정보
- 3,127 조회
-
목록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0년 04월호>
지성과 영성의 만남, 이 말은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이어령 씨는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와 문화부장관을 역임하는 등 문학적인 많은 활동을 함으로써 이 시대의 대표적인 지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한 그가 요즘에 교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다름 아니라, 무신론자였던 그가 2007년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최근에는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신앙고백서(?)를 출간함으로써 여러 일간지 및 인터넷 뉴스에서까지 그의 "영성"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구원받지도 않은 그가 "신에게 무릎을 꿇고" 나름대로의 간증집을 냈다는 것인데, 이 책의 제목을 보면 저자가 마치 무슨 큰 지성인으로서 영성을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또한 최근에는 신앙과 연관된 주제로 강연회들을 진행하는데, 그때마다 지성과 영성을 운운한다. 도대체 지성과 영성이 만나 어떻게 됐다는 것인가? 지성을 통해서 영성으로 나아가야 한단 말인가? 그가 영성을 찾을 만큼 충분한 지성인이란 말인가? 하기야 대학교수를 하고 책을 몇 권씩 펴내고 문화부장관까지 했으니, 세상에서는 훌륭한 지성인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평하실까? 그가 그토록 운운하는 영성을 성경이 인정이나 해줄까?
1. 세례로 기독교에 입문한 무신론자
일단 그는 여전히 구원받지 않은 죄인이다. 자신은 "지성을 뛰어넘어" 영성을 찾았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영성이란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를 갖게 되었다는 말일 뿐이다. 그는 딸의 실명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찾으며, 딸의 병을 고쳐 주시면 하나님을 믿겠다고 고백했다. 고통 가운데 있는 딸을 위로하기 위해 딸에게 "나 세례받는다고 목사님께 말해."라고 말했다 한다. 이것이 그가 신앙을 갖기 위한 첫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정말 딸이 낫자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당시 온누리 교회에서는 일본 문화선교 행사 차원으로 "러브소나타"라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때 (교회도 아닌) 도쿄의 한 호텔에서 하용조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것이다. 이 일에 대해서 하용조 목사는 "이어령 박사가 세례를 받은 것은 일본 지성 사회가 변할 수 있는 증거다."라며 크게 추켜 세운 바 있다. 그때부터 그는 영성을 운운하며 간증아닌 간증을 하고 다니는 것이다. [당시 사건에 대해서는 본지 186호(2007.9월)에서 「하용조 목사와 이어령 교수의 도쿄 해프닝」이라는 제하에 다룬 바 있다.]
이에 앞서 그는 무신론자였던 때 하나님께 몇 번 기도를 드린 적이 있다.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쓴 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하나님/ 어떻게 저 많은 별들을 만드셨습니까.// 아! 정말로 하나님/ 빛이 있어라 하시니 거기 빛이 있더이까// 모래알만한 별이라도 좋으니/ 제 손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주소서(시를 창작할 수 있는 영감을 달라는 말)." 또 다른 기도시에서는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닙니다./ 어렴풋이 보이고 멀리에서 들려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말 그대로 그가 "무신론자"였을 때 드린 기도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단지 문학적 영감을 얻기 위해 신을 찾는 모습, 또한 뭔가 어렴풋이 느껴지는 영적 존재를 잡으려 발버둥치는 모습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것은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서 드리는 기도는 허공을 치는 외침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신앙을 찾았다 간증하는 내용들이 이 무신론자의 기도와 너무도 닮았다는 것이다. "주님의 딸에게 어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이 딸이 볼 수만 있다면..."이라는 기도에서 그가 하나님을 절대자로 보았을까? 아니다. 그가 말한 주님은 무신론자였을 때 불렀던 그 피상적인 하나님 그대로였던 것이다. 세례받은 직후에도 그는 "하나님이 계시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동아일보, 2007.7.26).
그는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다. 이 피상적인 신 앞에 나아가서 딸을 고쳐 주시면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한 그 약속을 지킨 것뿐인데,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어디를 보아도 세례를 받아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이 없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분의 보혈로 구속받아(골 1:14) 구원받는다고 말씀한다. 그분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희생제물로 드려지셨다(히 9:26). 따라서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그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신 그분을 영접해야 한다.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이 외형적인 표식으로 간증하는 것이 바로 침례이다(벧전 3:21). 침례를 통하여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히고 부활했다는 것을 간증하는 것이다(롬 6:3,4). 따라서 거듭나지 못한 채 침례만 받았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며, 세례를 통해서는 더더욱 그렇게 될 수 없다. 그는 세례라는 것을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에 입문하는 의식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데, 어떠한 믿음의 고백도 없이 세례받았다는 것으로 영적 변화를 겪었다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무지한 생각이며, 마귀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더욱이 그에게 세례를 베풀어 이러한 생각을 갖도록 해준 사람은 얼마나 더 악한 것인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종교 의식을 통해 교회 안으로 끌어들였으니 말이다. 그가 지성인 운운하며 얼마나 많은 거짓 믿음을 퍼뜨릴 것을 상상이나 해 보았는가?
2. 대중을 배교시키는 마귀적인 지성
이어령 씨는 그가 쓴 책, 그가 말한 어떠한 간증을 통해서도 죄와 보혈에 대해 진정으로 간증해 본 적이 없다. 다만 앵무새처럼 말하는 것은 "지성을 뛰어넘어 영성을 얻었다."는 것뿐이다. 그는 어떠한 지성을 가졌길래 그 지성을 뛰어넘어 영성을 얻게 되었을까? 얼마만큼의 지성을 가져야 그것을 뛰어넘어 영성을 얻을 수 있을까? 보통 사람의 지성이면 영성을 얻을 수 없을까? 그는 "지성과 이성이 사라지고 영성만 남으면 도에 넘는 열광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종교가 탄생한다."라고 말함으로써 지성이 있어야만 진정한 믿음이 생긴다고 주장하였다(국민일보, 2007. 7.25). 또한 "영성은 지성과의 피나는 결투 끝에 얻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여서 지성의 절대성을 주장하였다(한국경제, 2010. 3.11). 다시 말해 자기같이 똑똑한 사람만이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비록 늦은 나이에 믿음을 갖게 되었지만, 지금까지 세상에서 많은 지식을 소유할 수 있었기에 제대로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의 경험적인 논리에 따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 말미암아 지성으로 영성을 얻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악한 사고인가? 그래도 교회들에서는 그를 높이 추켜세운다. 그러한 지성인을 얻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이처럼 마귀는 세상에서 큰 사람을 들어 세워 교회들을 더욱더 파괴시키는 것이다.
자, 그러면 그의 지성이 과연 어떠한지를 좀 살펴보자. 그의 "지성이 결부된 영성"의 모습이 잘 반영된 한 강연회가 최근에 열렸다(3월 11일, 양화진문화원 선교기념관). 이 강연회에서 그는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는 시를 기독교적으로 분석했는데, 시인이 엄마와 누나와 강변을 부른 것은 하나님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는 것이다. 엄마와 누나는 투쟁하는 남성상과 대조되는 평화로운 여성상으로서 하나님의 평화를 상징하고, 강변은 생명이 풍성한 곳으로서 생명을 향한 갈망을 나타낸다는 것. 이렇게 그는 세상적인 시를 가지고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지성이 영성을 만난 결과물이다. 더 나아가 시를 상징으로 읽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듯이, 성경도 상징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가 양화진문화원 명예원장이다(양화진 문화원은 "100주년기념교회"의 문화선교기관이다). 즉 한국 교회의 평신도 저명인사로 등극한 것이다. 그의 대단한 지성과 영성이 만난 결과로 말이다.
그는 원래 문학가이다. 그것도 문학적 비유와 상징이라는 분야에서 권위자이다. 그러한 그가 성경을 비유로 푼다고 한다. 세속 문학의 상징을 성경에 대입시킨다. 성경의 내용들을 상징화시켜 새로운 설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거듭남"도 비유적으로 이해하라고 주장한다. 그 강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시와 성경을 새롭게 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무지한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오류를 심어 주었다. 그의 지성은 영성과 만나 사람들을 또 다른 배교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거듭남"까지 상징으로 봐야 한다는 그의 이 한 마디를 통해, 그의 구원도 거짓이라는 것이 분명히 판명되었다. 소월의 시를 말하면서, 비록 시인이 무신론자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동행하신다며, 자신이 무신론자였던 시절에도 하나님께서 동행하셨다고 주장했는데, 그렇다면 무신론자였을 때 발견한 하나님과 "영성을 얻은 지금" 발견한 하나님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무신론자 시절에도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면, 굳이 지금 기독교에 입문한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그는 과거에 허공을 향해 외치던 신을 기독교의 하나님으로 구체화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그를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형태로도 만나 주시지 않는다. 그는 세상에서 추구하던 그 허울좋은 "지성"을 영성으로 포장해 교회 안에서 활용하고 싶었을 뿐이다. 세상에서는 충분히 유명해졌으니, 교회 안에서 한 번 유명해짐으로써 종교계에서까지 저명인사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 죄인들의 타락한 모습이며, 마귀가 "유명한 사람들"을 사용하는 단적인 예이다.
3. 경건을 흉내낸 마귀적인 영성
세상에서 훌륭했던 지성인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 예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유명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헌신한 경우는 교회사 가운데 수없이 많다. 그 대표적인 경우는 사도 바울이다.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 당시 유대의 율법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학자였다. 로마 시민권자였으며, 여러 언어를 구사할 정도로(고전 14:18) 그의 학식은 대단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된 후 세상 학문에 대한 그의 자세는 어땠는가? 그의 지성이 영성을 만났다고 자랑했는가? 아니다. 그는 이전에 갖고 있던 모든 지식을 "배설물"로 여겼다(빌 3:8). 뿐만 아니라 "철학"을 세상의 유치한 원리라고(골 2:8), "과학"을 거짓말이라고(딤전 6:20), "문학"을 늙은 부녀자들에게나 어울리는 꾸며낸 이야기라고(딤전 4:7) 비웃었다. 그리고 "경건"을 추구하라고 말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성"이 아니라 "경건"을 추구하라고 말씀한다(딤전 4:7-8; 6:11).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란 영적인 성품이라는 말로서, 성경 용어는 아니지만 이성이나 지성에 대조하여 영적인 정도를 가리키는 말로 종종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이교도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마귀 또한 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불교의 유명한 중들이나 힌두교 구루들, 심지어 영험한 무당들마저도 그쪽 방면에서는 영성이 깊은 자들이다. 다시 말해서 영성이 깊다고 모두 하나님과 가깝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또 기독교에 입문해 영성을 얻었다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다. 교회 안에 마귀의 종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기독교 테두리 안에 있는 마귀적 영성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경건(godliness)은 지극히 성경적인 용어로서, "하나님을 닮는 것"(God․li․ness)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께 온전히 복종하며, 그분이 원하시는 일들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나도 좋아하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나도 싫어하는 것이다. 우리의 육신적 성품으로서는 이러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훈련하라.』(딤전 4:7)고 말씀하신다. 이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서 온전히 성령님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다면 그 "진리의 영"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대로 진리를 알아가게 될 것이다(요 16:13).
그러한 점에서 이어령 씨는 결코 하나님 안에서의 영성을 얻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성품과 능력이라면 결코 그러한 말들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구원받을 때 일어나는 첫번째 변화인 "거듭남"(영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령님의 어떠한 인도도 받을 수 없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신데, 그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지 않기 때문에 계속 헛된 말만 발설하고 있는 것이며, 자신의 신앙을 간증한다고는 하지만 계속 궤변만을 늘어 놓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궤변을 간증으로 내 놓으려면 성경 말씀에 근거를 두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성경 없는 구원이나 성경 없는 영성을 누구더러 인정하라는 말인가? 때문에 그는 어떠한 하나님의 일도 할 수 없으며, 성경적 근거 없이 자기 자랑만 나열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참으로 눈 뜬 소경이다(마 15:14). 자기의 유식함을 자랑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소경 말이다. 그는 자신이 아직 "영성의 세계로 가는 문턱에 있다."고 고백했는데, 문턱에 있는 사람이 이 정도니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잘난 지성과 그 마귀적인 영성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배교와 멸망의 늪으로 빠뜨릴 것이란 말인가?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