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BB칼럼 분류

존 칼빈이 그리스도인이었을까?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07월호>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 태어난 지 500주년이 되었다고 해서 그를 기리는 학술강연회가 열렸다고 들었다. 우리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인들은 매년 6월이면 <성경핵심강연회>를 갖는데 금년으로 16년째이다. 우리는 존 칼빈의 출생과는 관계없이 강연회를 가졌는데 금년에는 주제가 공교롭게도 󰡒한국 교회를 망친 칼빈주의󰡓였다. 한쪽에서는 존 칼빈을 드높였고, 다른쪽에서는 칼빈주의 5대강령을 사악한 이단 교리라고 평가했다. 주님 보시기에 누가 옳은 일을 한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긴다는 소위 하나님의 종들이 어떤 사람을 추앙한다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별로 점수를 줄 수 없는 것 아닌가! 또 굳이 그래야 할 필요도 없는 일 아닌가! 기독교 안에는 여러 개의 교파가 있는데 그들이 모두 자기들의 교단 창시자를 들고나와 탄생 또는 서거 기념식을 갖고 학술강연회를 갖는다면 그들의 그런 행보를 성경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고 찬송 부르지 않는가? 그런데 존 칼빈보다 귀한 것이 없네라고 떠들어 댈 셈인지 묻고 싶다. 신약 그리스도인의 첫째 계명이 무엇인가?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모든 계명들 중의 첫째는 이것이라. 주 우리 하나님은 한 분 주시니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계명이니라』(막 12:29,30). 500년 전의 사람을 칭송하는 애정 많은 사람들, 즉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는가? 그분을 두려워하고 있는가?(욥 28:28, 시 111:10, 잠 1:7; 9:10)
주님께서는 주님 외에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 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갈 1:10). 존 칼빈을 추앙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유감없이 따르고 있는가?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칼빈이 쓴 <기독교강요>보다 더 많이 공부하고 연구하고 암송하고 있는가? 주님은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일을 하지 말라고 권면하신다. 『너희는 사람에게 의존함을 그치라. 그의 호흡은 그의 콧구멍에 있으니 그가 존중받을 것이 어디에 있느냐?』(사 2:22)
존 칼빈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같이 종교 개혁가였다. 그 당시 로마카톨릭에 항거하여 그들의 비성경적 교리와 마귀적인 교회 운영을 질타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었기에 매우 강건하고 담대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존 칼빈을 높이 평가하고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칼빈과 루터만이 카톨릭의 마귀적 교리에 항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존 위클리프(1320-1384), 존 후스(1369- 1415), 사보나롤라(1452-1498), 영어 성경을 처음으로 번역했던 윌리엄 틴데일과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인 몬타니스트, 도나티스트, 알비겐스, 왈덴시안, 카타리, 롤라드, 폴리시안, 불가리안, 위그노 등 로마카톨릭에 항거했다가 박해받고, 투옥되고, 고문당하고, 살해된 사람 수는 암흑 시대 기간 동안(A.D. 325-1550) 6천만 명에 이른다. 『그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출회할 것이라. 참으로 그 때가 오면 너희를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생각하리라』(요 16:2).
어떤 사람을 경외하고 추앙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그런 일을 할 만한 의의와 가치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은 그의 자유이다. 개를 사랑하는 사람은 개를 자기 자식이라 부른다. 그의 자유이다. 하지만 그가 자기 자식들을 개만큼 사랑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노조를 위해 분신자살하는 것도 자유인가? 노벨평화상을 타기 위해 김정일에게 돈을 갖다 줘서 핵무기 만들게 하는 것도 자유인가? 자살한 대통령을 순국자로 만든 것도 자유인가?
필자가 짚고 싶은 것은 존 칼빈이 추앙받을 만한 업적을 남겼느냐 하는 점이다. 그가 빛나는 업적을 남겨 기독교계에 기여한 덕에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지옥에 가지 않게 되었다면 그의 이름은 회자될 수 있을 것이나 그렇지 못했다면 그의 이름은 회자되거나 칭송되어야 할 일이 못 되는 것이고, 그런 기념 강연회를 한 자들은 할 일 없는 자들로 거리에서 설교해 본 적도 없고, 죄인들을 주님께로 이겨올 수 있는 전도지 한 장도 못 만든 자들일 것이 분명하다.
그런 쓸데없는 자들이 지난 500년간 왜 없었겠는가? 그 숫자가 많았기에 칼빈에 관한 서적이 무려 3,000권이 넘으며 그에 관한 논문도 12,000편이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설교 편수 또한 2,000편 이상이 현존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장로교와 남침례교 전체에 칼빈 신학교가 몇 군데나 되는지 아는가? 거기서 매년 칼빈주의로 세뇌된 칼빈주의자들이 배출되어 칼빈을 구가한다.
프랑스의 사상가인 볼테르(Voltaire)는 칼빈을 이렇게 평했다. 󰡒유명한 칼빈, 우리가 제네바의 사도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은 스스로 개신교의 교황의 자리에까지 높이고 있다󰡓(샤프의 교회사, Vol.8: 277).
존 칼빈이 언제 어떤 경위로 거듭났는지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가 파리에서 대학을 다닐 때 한 개신교도가 불에 타 순교당하는 것을 목격했는데 그 일이 그에게 영향을 끼쳤고, 프랑스어로 성경을 번역한 그의 사촌 올리베탄(Robert Olivetan)의 간증을 듣고서 신앙에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도 한때는 자신을 프랑스 남부에서 성별한 그룹인 왈덴시안(Waldensian)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칼빈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개혁주의자였다. 개혁은 이룩했지만 성경적 신앙이란 어떤 구호나 캠페인 같은 것으로 이룩되지 못한다. 당시에 하나님을 섬기려 했던 사람들은 거의 사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온 하늘 아래 오직 카톨릭만이 기독교란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신약 교회가 어떤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운영해야 하는지 그 규범을 정할 수 없어 카톨릭의 예배의식을 그대로 실행할 수밖에 없었다. 즉 사도신경 암송, 교독문 낭독, 주기도문 암송, 축도, 세례의식, 심지어 유아세례까지도 그대로 답습해서 실행했다. 칼빈은 로마카톨릭에 항거하여 개혁을 이룩했지만 카톨릭의 전통과 의식을 수용했기에 그것은 완전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s)를 이룩한 것이 아니었다. 제한된 지면이라 여러 가지를 다룰 수는 없지만 칼빈은 성례, 즉 성사(sacrament)에 있어서는 카톨릭의 누룩을 그대로 답습했었다. 그는 두 가지 성례전을 실행했는데 세례는 죄씻음을 받고 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신비적인 의식으로 여겼고, 성만찬(주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어 그분과 연합하는 신비적인 의식으로 여겼다(기독교강요 제4권 14장 2항).
그는 요한복음 3:5에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를 해석하지 못했다. 물은 육신적인 출생을 말하고 성령으로 태어난 것은 영적인 출생을 말하는 것인데도 󰡒물인 성령󰡓이라고 해석함으로써(제16장 26항) 헛다리를 짚었다.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요 3:6). 그는 로마서 6:3,4에서도 영적 침례를 물침례인 줄로 오해했다. 그리스도 안으로 받는 침례(롬 6:3)는 영적 침례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교단은 이 점을 칼빈만큼이나 몰라 물침례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인 줄로 알고 성경에서 침례란 단어만 보면 모두 물침례로 알고 행한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어거스틴(Augustine)의 신플라톤 철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와 철학을 접목시키려고 여러 번 시도하였고 자신 안에서 철학자와 기독교인을 융합시켰다. 어거스틴은 개신교의 칼빈주의 신학체계를 형성한 사람이지만 그보다 앞서 로마카톨릭 교리를 형성했다. 바로 어거스틴이 연옥 교리를 만들어냈는데, 유아세례를 받지 않고 죽으면 림보(Limbo), 즉 낙원과 지옥 사이에 있는 곳으로 간다고 했다. 지상에 살아 있는 부모나 형제가 카톨릭 교회에 헌신함으로써(주로 재산을 바침) 아기가 연옥에서 낙원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는 이런 이단 교리에 반대하면 저주하며 죽여도 좋다고 했다. 그 대상은 주로 침례교인들이었다. 어거스틴은 성경을 은유적으로 해석했고 천년왕국을 무천년주의적 관점에서 영적 왕국으로 해석했다. 그리하여 천년왕국을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한 기간일 뿐이라고 가르쳤다. 성경을 모르고 또 믿지 않는 자들이 성경을 가르치려 했을 때 거기에서 교리가 아닌 사상이 나오게 된다. 정통주의, 보수주의, 복음주의, 근본주의, 칼빈주의 등을 만들어낸 자들은 성경에 무지한 자들인데 그들이 성경을 가르치는 위치를 점유했기에 이런 것들을 만들어내서 마치 자기들이 더 잘 믿는 것처럼 보이려 했던 것이다. 칼빈주의 5대강령(TULIP)은 칼빈이 주장하기 천 년 전에 이미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이론이었다.
1. 전적타락 - 인간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타락했는데 그 의지까지도 타락해서 복음을 믿을 수도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과 결정에 의해 타락했기에 자신의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요일 5:13).
2. 무조건적 선택 -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고 어떤 사람은 저주받기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들의 끝은 지옥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경 구절은 어디에도 없다(요 3:16, 딤전 2:4을 보라!).
3. 제한된 속죄 -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고 저주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교리이다(롬 3:22-28).
4. 저항할 수 없는 은혜 - 선택받은 자들은 그의 의지로 동의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강제로 거듭나게 하고 믿게 하신다는 교리이다(요 1:12).
5. 성도의 견인 -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가 아니라는 교리이다. 결국 그들은 칼빈주의로 들어가서 알미니안주의로 나온다(엡 2:8,9).
이것을 교리라고 가르치기에 교인들이 혼미하여 방황하고, 구원받지 않고 교회에 다니기에 허전하여 새벽부터 교회에 나가며, 구원이란 소리만 들어도 그런 곳들로 향하여 구원파니, 다락방이니 하는 것들이 생겨나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존 칼빈은 스위스 제네바에 신정국가를 세우고 개신교 교황 노릇을 했다. 이 하늘 아래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만든 규례에 어긋난 일을 했다고 해서, 더군다나 자기와 교리가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을 화형시킬 수 있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누구를 죽이셨는가? 사도 바울이 누구를 죽였는가? 사도들과 신약 교회 목사들, 부흥사들, 선교사들이 자기와 교리가 다르다고 해서 누구를 박해하고 고문하고 죽였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악인들에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그들에게 보복하지 않았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자신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최선을 다해 복종하였다.
칼빈은 그의 예정설을 비난했다고 해서 세르베투스를 화형에 처했다. 세르베투스는 자기를 죽인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했다. 칼빈은 자기를 위선자라고 부른 사람을 고문해서 사형에 처했다. 세례받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80세 노파와 여섯 아이들의 어머니를 처형했다. 출판업자가 칼빈을 비난했다고 해서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그의 혀를 잘랐다. 자신의 신학이론(기독교강요)에 반대하는 사람을 국사범으로 취급했고, 두 명의 뱃사람이 싸웠다고 해서 그들을 모두 사형시켰다. 고문방법으로는 엄지손가락을 조이고 발바닥을 불로 지지고 밧줄로 다리를 묶어 잡아당기는 참혹한 방법을 사용했으며, 칼로 찢고, 해충들로 뜯어 먹게 하고, 배설물조차도 치우지 못하게 했으며, 자살하지 못하도록 밤낮 박수를 치게 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그리스도인인가? 교회사에서 로마카톨릭이 소위 종교재판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행했던 사악한 행패와 뭐가 다른가? 교황들이 한 것은 저주받을 행위이고 칼빈이 행한 것은 죄가 아닌가? 그가 제네바 시(당시 1만 3천 명 인구)를 5년간 통치하면서 추방한 사람이 76명이며, 공식 처형한 사람은 58명인데 그 중에서 화형당한 사람은 35명이었고 교수대에 매달린 사람은 13명이나 되었다.
아! 이 얼마나 추앙받을 인물인가? 이런 자를 탄생 500주년이라며 학술강연회를 열고 그를 추켜세운 이 나라의 칼빈주의 목사들, 신학자들, 교인들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요, 생명의 주인이시며, 다시 오실 왕이시다.
존 칼빈은 무엇을 위해 제네바에 국가교회(State Church)를 만들려 했을까? 자기의 욕망 충족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성경에서 금하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생의 자랑을 이루어 자기 만족을 꾀하려 했던 것 같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진리를 전달하는 일은 영적인 일이다. 그러기에 육신적인 방법이나 강제적인 힘으로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칼빈은 가장 기본적인 것도 몰랐다. 신약성경 14권을 쓴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너희는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고 했다(고전 11:1).
그가 어떻게 주님을 섬겼는가 보라! 『이 직분이 비난받지 않게 하려고 어떤 일에도 거침이 되지 않게 하였고 오히려 모든 일에서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일꾼들임을 입증하기를, 많은 인내와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맞음과 갇힘과 소요와 수고와 깨어 있음과 금식에서 그리하였으며 순결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성령과 가식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과 오른손과 왼손에 든 의의 병기로써 영광과 오욕으로써 또 악평과 호평으로써 그리하였고 속이는 자들 같으나 진실하며,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으며, 매를 맞았으나 죽지 아니하였고, 슬퍼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며,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졌느니라』(고후 6:3-10).
칼빈은 성경을 여는 열쇠인 요한계시록도 해석하지 못했다. 그의 성경 주석은 헛점투성이다. 그는 성경 주석을 써서는 안 되고 그 성경을 가르쳐서도 안 될 인물이었다. 그의 <기독교강요>는 교리를 정립해 놓은 것이 아니라 어거스틴에게서 얻은 철학 사상을 성경과 어설프게 접목시켜 놓은 것이다.


그래도 존 칼빈을 따르겠는가? 그렇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런 존 칼빈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BB

BB칼럼 309 / 13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