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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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의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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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2년 03월호>

『 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오니, 내가 일찍 주를 찾으리이다. 내 혼이 주를 갈망하오며 내 육신이 건조하고 메마른 물 없는 땅에서 주를 사모하오니 이는 내가 성소에서 주를 보았던 것처럼 주의 권능과 주의 영광을 보기 위함이니이다』
(시 63:1,2).

시편 63편은 다윗이 유다 광야에 있을 때 지은 시이다. 이곳은『 건조하고 메마른』
곳이다. 강렬한 태양 아래에서 숨 막힐 듯한 열기로 인해 숨 쉬는 것조차 힘든 이곳은 『 물 없는 땅』이다. 물이 절실하다. 그 어떤 것으로도 갈증을 해소할 물을 대체할 수는 없다. 다윗이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광야에서 물을 찾듯이 간절히 주님을 찾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성도도 이와 같이 주님을 갈망해야 한다.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주님이어야 한다. 그리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다른 것을 전혀 즐기지 말라는 금욕적인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도가 주님 외에 다른 것을 더욱 만족해 하고 신뢰한다면, 그의 마음은 지방이 가득한 살찐 상태가 되어 주님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 끝은 비참할 뿐이다. 호세아 13장은 이처럼 주님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스스로 멸망시킨 한 대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바로 이스라엘이다.

『 나는 광야의 지극히 메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노라』(호 13:5). 주님은 이스라엘이 노예였을 때 먼저 찾으셨다. 그리고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속하신 후, 광야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어 주셨다. 따라서 주님은 그들이 주님만을 알기를 원하셨고 그들에게 유일한 분이 되고 싶어 하셨다. 『 ...너는 나 외에 어떤 신도 알지 말지니라. 이는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음이니라』(호 13:4). 하지만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의 열매를 먹고 배가 부르자 주님을 잊어버렸다. 『 그들의 초장에 따라 그들이 배불렀으니, 그들이 배불렀으므로 마음이 교만해져 나를 잊었느니라』(호 13:6).
배부를 때를 주의하라. 평안하고 안전할 때를 주의하라. 재물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보다 더한 만족을 주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는 기도로 응답받은 무엇인가가 그것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보다 더한 만족을 주어서도 안 된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교만으로 살찌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교만으로 살찐 마음은 정말 무서운 결과를 낳는데, 주님으로 하여금 그를 대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 그러므로 나는 그들에게 사자같이 될 것이요, 길가의 표범같이 나는 그들을 주시하리라. 나는 새끼들을 잃은 곰처럼 그들을 만날 것이요, 그들의 심장의 꺼풀을 찢고 거기에서 내가 그들을 사자처럼 먹어 치울 것이니, 들짐승이 그들을 찢으리라』(호 13:7,8).
잊지 말라. 마음이 교만한 자에게 주님은 마주치기만 해도 떨리는 무서운 분이시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만이 당신의 만족을 채워 주는 유일한 분이 되시게 하라. 성도의 영과 마음은 풍족한 상황에서도 항상 주님만을 갈망하는 가난함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그분의 돌보심 안에 늘 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내가 보살피리니 곧 영이 가난하고 통회하고 내 말에 떠는 자라』(사 66:2).
히스키야는 이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준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선포되자 심히 울며 간구했다(왕하 20:3).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에 15년을 더 연장해 주셨다. 훌륭한 기도였고, 은혜가 넘치는 응답이었다. 하지만 응답을 받은 히스키야는 곧바로 마음이 높아져서 그것을 은혜로 여기지 않았다(대하 32:25). 그러다가 주님의 진노가 임하자 잠시 겸손해지더니(대하 32:26), 바빌론의 사자들이 오자 곧 다시 교만해져서 자신의 모든 부귀영화를 보여 주며 자랑하였다. 히스키야는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의 시험에 탈락한 것이다(대하 32:31). 이것이 히스키야가 보여 준 자기중심적이고 배반적인 성품이다. 자신의 필요할 때와 심판의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해지다가, 은혜의 하나님 앞에서는 곧 다시 교만해지는 것이다. 성도들도 주의해야 한다. 이 같은 가증한 짓을 한 것은 다른 악한 왕들이 아닌, 주님께로부터 선하다고 인정받았던 히스키야였다. 그에게 하나님은 그의 만족을 채워 주는 유일한 분이 아니었다. 성도들도 자신이 이처럼 가증한 짓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늘 마음을 살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교만으로 보답한 히스키야의 15년의 열매가 무엇이었는가? 바로 므낫세다. 히스키야가 죽은 뒤, 그는 십이 세의 나이로 유다를 통치했는데, 유다 왕국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 되었고, 그의 가증한 악행들은 하나님께서 유다를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시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명심하라.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 늘 그 삶에 지속되어야 한다. 기도 응답을 받았다면 곧바로 자신의 마음을 점검하여야 한다. 응답 받은 내용이 마음을 교만으로 잠식되게 하지 않나 살펴보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받은 그 큰 은혜를 악으로 보답하는 불충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오아시스란 ‘사막과 같은 건조지역의 특정한 위치에서 물 공급이 지속적으로 일어나 외부와 단절된 하나의 식생을 이루는 곳’을 말한다. 주님이 나의 오아시스라면 주님을 제외한 내 주위는 모두 사막이다. 이는 그 어떤 곳도 내 앞에 있는 오아시스보다 만족을 줄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내 모든 필요와 만족을 지속적으로 채워 주실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의 갈망을 채우기 위해 주님을 지속적으로 찾았고 묵상했으며 기뻐 찬양하고 그분에게 밀착했다(시 63:1-8).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이 무엇이든지 그리스도를 풍성히 소유하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되었다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손실과 배설물로 여겼다(빌 3:7,8). 이와 같이 성도들도 주님을 갈망하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자가 되어서 주님의 날개 그늘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시 63:7). BB
『 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오니, 내가 일찍 주를 찾으리이다. 내 혼이 주를 갈망하오며 내 육신이 건조하고 메마른 물 없는 땅에서 주를 사모하오니 이는 내가 성소에서 주를 보았던 것처럼 주의 권능과 주의 영광을 보기 위함이니이다』
(시 63:1,2).

시편 63편은 다윗이 유다 광야에 있을 때 지은 시이다. 이곳은『 건조하고 메마른』
곳이다. 강렬한 태양 아래에서 숨 막힐 듯한 열기로 인해 숨 쉬는 것조차 힘든 이곳은 『 물 없는 땅』이다. 물이 절실하다. 그 어떤 것으로도 갈증을 해소할 물을 대체할 수는 없다. 다윗이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광야에서 물을 찾듯이 간절히 주님을 찾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성도도 이와 같이 주님을 갈망해야 한다.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주님이어야 한다. 그리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다른 것을 전혀 즐기지 말라는 금욕적인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도가 주님 외에 다른 것을 더욱 만족해 하고 신뢰한다면, 그의 마음은 지방이 가득한 살찐 상태가 되어 주님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 끝은 비참할 뿐이다. 호세아 13장은 이처럼 주님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스스로 멸망시킨 한 대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바로 이스라엘이다.

『 나는 광야의 지극히 메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노라』(호 13:5). 주님은 이스라엘이 노예였을 때 먼저 찾으셨다. 그리고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속하신 후, 광야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어 주셨다. 따라서 주님은 그들이 주님만을 알기를 원하셨고 그들에게 유일한 분이 되고 싶어 하셨다. 『 ...너는 나 외에 어떤 신도 알지 말지니라. 이는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음이니라』(호 13:4). 하지만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의 열매를 먹고 배가 부르자 주님을 잊어버렸다. 『 그들의 초장에 따라 그들이 배불렀으니, 그들이 배불렀으므로 마음이 교만해져 나를 잊었느니라』(호 13:6).
배부를 때를 주의하라. 평안하고 안전할 때를 주의하라. 재물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보다 더한 만족을 주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는 기도로 응답받은 무엇인가가 그것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보다 더한 만족을 주어서도 안 된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교만으로 살찌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교만으로 살찐 마음은 정말 무서운 결과를 낳는데, 주님으로 하여금 그를 대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 그러므로 나는 그들에게 사자같이 될 것이요, 길가의 표범같이 나는 그들을 주시하리라. 나는 새끼들을 잃은 곰처럼 그들을 만날 것이요, 그들의 심장의 꺼풀을 찢고 거기에서 내가 그들을 사자처럼 먹어 치울 것이니, 들짐승이 그들을 찢으리라』(호 13:7,8).
잊지 말라. 마음이 교만한 자에게 주님은 마주치기만 해도 떨리는 무서운 분이시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만이 당신의 만족을 채워 주는 유일한 분이 되시게 하라. 성도의 영과 마음은 풍족한 상황에서도 항상 주님만을 갈망하는 가난함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그분의 돌보심 안에 늘 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내가 보살피리니 곧 영이 가난하고 통회하고 내 말에 떠는 자라』(사 66:2).
히스키야는 이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준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선포되자 심히 울며 간구했다(왕하 20:3).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에 15년을 더 연장해 주셨다. 훌륭한 기도였고, 은혜가 넘치는 응답이었다. 하지만 응답을 받은 히스키야는 곧바로 마음이 높아져서 그것을 은혜로 여기지 않았다(대하 32:25). 그러다가 주님의 진노가 임하자 잠시 겸손해지더니(대하 32:26), 바빌론의 사자들이 오자 곧 다시 교만해져서 자신의 모든 부귀영화를 보여 주며 자랑하였다. 히스키야는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의 시험에 탈락한 것이다(대하 32:31). 이것이 히스키야가 보여 준 자기중심적이고 배반적인 성품이다. 자신의 필요할 때와 심판의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해지다가, 은혜의 하나님 앞에서는 곧 다시 교만해지는 것이다. 성도들도 주의해야 한다. 이 같은 가증한 짓을 한 것은 다른 악한 왕들이 아닌, 주님께로부터 선하다고 인정받았던 히스키야였다. 그에게 하나님은 그의 만족을 채워 주는 유일한 분이 아니었다. 성도들도 자신이 이처럼 가증한 짓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늘 마음을 살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교만으로 보답한 히스키야의 15년의 열매가 무엇이었는가? 바로 므낫세다. 히스키야가 죽은 뒤, 그는 십이 세의 나이로 유다를 통치했는데, 유다 왕국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 되었고, 그의 가증한 악행들은 하나님께서 유다를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시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명심하라.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 늘 그 삶에 지속되어야 한다. 기도 응답을 받았다면 곧바로 자신의 마음을 점검하여야 한다. 응답 받은 내용이 마음을 교만으로 잠식되게 하지 않나 살펴보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받은 그 큰 은혜를 악으로 보답하는 불충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오아시스란 ‘사막과 같은 건조지역의 특정한 위치에서 물 공급이 지속적으로 일어나 외부와 단절된 하나의 식생을 이루는 곳’을 말한다. 주님이 나의 오아시스라면 주님을 제외한 내 주위는 모두 사막이다. 이는 그 어떤 곳도 내 앞에 있는 오아시스보다 만족을 줄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내 모든 필요와 만족을 지속적으로 채워 주실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의 갈망을 채우기 위해 주님을 지속적으로 찾았고 묵상했으며 기뻐 찬양하고 그분에게 밀착했다(시 63:1-8).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이 무엇이든지 그리스도를 풍성히 소유하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되었다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손실과 배설물로 여겼다(빌 3:7,8). 이와 같이 성도들도 주님을 갈망하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자가 되어서 주님의 날개 그늘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시 63:7).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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