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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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욥의 명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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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3월호>

지난 2월 필자는 한 성도의 부친이 주님께로 가셔서 장례식에 다녀왔다. 장례식장 로비에서 빈소를 찾아 올라가는 길에 아이들이 모여 있었는데, 하얀 조의금 봉투에 펜으로 "할아버지..."라고 쓰고 있었다. 알고 보니 부친의 손자들이었고, 이어지는 내용은 아마도 "...사랑해요."나 "...안녕히 가세요."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이들은 쪼그마한 손에 쥔 봉투를 펄럭이며 조의금함 쪽으로 달려갔는데, 필자가 본 장면은 거기까지였다. 필경 조문객들이 함에 봉투를 집어넣는 것을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넣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우한 폐렴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곳곳에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을 때, 어느 점포를 지나다가 "그런데 사람들이 올까?"라는 통화 내용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장례식장에 사람들이 오냐는 질문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우려로 조문객들의 발걸음이 뜸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는데, 전화기 속에서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죽음이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영향을 주고 있음이 분명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은 이유는 죽음이 모든 사람의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사람이 그것을 자기 마음에 유념할 수 있기 때문이지만(전 7:2), 폐렴 바이러스가 위세를 떨치는 때여서인지 사람들은 모이기를 꺼리면서 죽음을 현실적으로 경계하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유념이 아니라 "경계"였으니, 곧 "나도 죽을 텐데 사후의 생을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라고 숙고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폐렴에 걸려 죽으면 어떻게 하나?"라며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은 거듭나지 못한 인생들의 두려운 현실이다. 이 두려움을 떨쳐 버리기 위해 "웰 다잉(Well-Dying)론"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한마디로 "잘 죽는 법"을 배우자는 것이다. "잘 죽다"라는 말에는 이중적인 뉘앙스가 있는데, 악인에 대해 "그놈 잘 죽었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고, 웰 다잉을 주장하는 사람들처럼 다가오는 죽음을 준비하고 연습하는 것 정도를 뜻할 때가 있다. 『한국죽음학회』라는 곳에서는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이라는 말로 웰 다잉을 정의한다. 죽음에 대해 답도 없는 사람들이 죽음을 학문적인 소재로 삼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 부류들은 유서를 남기거나 자기 묘비명을 미리 지어 보고, 삶을 정리하는 기록을 남기는가 하면, "관"에 실제로 들어가 누워 보는 연습을 하기도 한다.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겠는가? 죽음은 그들이 불의한 죄인들임을 입증할 뿐이다. 『죽을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 의롭겠느냐? 사람이 자기의 창조주보다 더 순결하겠느냐?』(욥 4:17) 이런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서 죽음의 품이 마냥 아늑하고 달콤하겠는가? 『그러나 그는 무덤으로 옮겨져서 묘지에 남게 되리라. 골짜기의 흙덩어리가 그에게는 달겠고 그보다 앞서 간 자들이 무수한 것같이 모든 사람이 그를 뒤따르리라』(욥 21:32,33). 『악인은 지옥으로 돌려질 것이요,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민족들도 그러하리라』(시 9:17). 그들은 죽음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모든 인생은 사후의 심판을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은 사람과 사람을 분리시킨다. 룻은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나오미의 요구에 울먹이며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거기서 장사되리니, 죽음 외에 그 무엇이 어머니와 나를 떼어놓는다면 주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7)라고 말했다.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을 속절없이 분리시키고, 심지어 원수들까지도 분리시켜 자취를 감추게 한다. 죽음은 결국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을 우리 곁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날수가 적고 고통으로 가득 찼도다. 그는 꽃같이 나와서 잘려져 버리고 그는 또한 그림자처럼 사라지고 머물지 아니하도다』(욥 14:1,2). 욥은 아내에게서 태어난 일곱 아들과 세 딸을 한날에 잃어버렸다. 그들은 실로 날수가 적고 고통스럽게 죽었으며, 꽃같이 나와서 잘려져 버렸고, 그림자처럼 사라지고 머물지 아니했던 것이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는다는 말이 있듯이, 정녕 죽음에 관한 한 열 명의 자식을 한날에 잃어버린 욥의 슬픔과 인식을 대체할 만한 것이 없다. 욥 자신마저도 육체에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어가고 있었으니, 실로 죽음에 관한 가장 현실적인 강론을 욥에게서 들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욥은 불가항력적인 극심한 고난이 불현듯 철퇴처럼 내려치자 살기를 거부하고 죽음을 찾기 시작했다. 우선 자신의 출생을 비관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가 배에서 나왔을 때 숨을 거두지 아니하였던가?』(욥 3:11) 그리고 모질고 질긴 삶보다 죽음을 더 찾기 시작했다. 『어찌하여 불행에 처한 자에게 빛을 주시며 혼이 쓰라린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고. 이런 자는 죽음을 바라나 오지 아니하므로 숨겨진 보배를 찾는 것보다 죽음을 찾아 더 파나니 그들이 무덤을 찾을 수 있을 때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아니하랴?』(욥 3:20-22) E.M. 레마르크가 쓴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전쟁 소설이다. 작품 속 주인공인 폴 바우머는 거듭되는 전투 속에서 전우들이 하나둘씩 사라지자 전쟁에 대해 깊이 비관하게 되고, 그 자신도 어느 10월의 맑은 날 전사하게 된다. 그런데 앞으로 고꾸라져 쓰러진 그의 모습은 마치 자고 있는 것처럼 평온했다. "몸을 뒤집어 보니 마치 이런 최후로 삶이 끝나는 것을 오히려 만족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 같은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라고 작가는 기술한다. 죽어 사라져 간 전우들에 대한 슬픔과 낙심으로 지쳐 버린 바우머는 "무덤을 찾았을 때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것이다.

인간은 "삶이 아니다."라고 생각될 때 죽음이 답이라고 생각하는 본능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비참한 현실을 보지도, 겪지도 않는 길은 오직 죽음뿐이라고 생각하곤 하는데, 신실하고 위대한 종 모세 역시 목이 굳은 백성들과의 여정이 몹시도 견디기 힘든 나머지 하나님께 죽음을 구했었다. 『주께서 나를 이처럼 대하신다면, 만일 내가 주의 목전에 은총을 얻었다면,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나를 즉시 죽이소서.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나의 비참함을 보지 않게 하소서』(민 11:15). 바알의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던 엘리야 역시 이세벨의 위협에 낙심해서 죽음을 구하지 않았던가! 『이것으로 족하오니, 오 주여,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내가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왕상 19:4). 삶보다 죽음을 찾아 더 파는 일의 극단적인 형태는 자살인데, 유다 이스카리옷은 돈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넘긴 것을 후회하여 자살해 버렸다(마 27:5).

삶보다 죽음을 찾아 더 파는 일이 상황에 따라서는 우리의 본이 될 수가 있으며, 이에 모범이 되는 인물이 바로 "사도 바울"이다. 바울은 삶에 대한 비관이 아닌 셋째 하늘에 대한 갈망으로 죽음을 찾아 더 파 들어간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는 루스트라에서 돌에 맞아 죽어 성읍 밖으로 끌어내어졌다가(행 14:19) 다시 살아났을 때, 두 발로 일어서서 자기를 죽인 그 성읍 안으로 또다시 들어가는 이상한 행동을 보였었다(행 14:20). 왜 그랬을까? 고린도후서 12:1-5이 그 점을 설명해 주고 있다. 『정녕 자랑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하지 못하나 내가 주의 환상들과 계시들을 말하리라. 내가 십사 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나는 말할 수 없고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시느니라.) 그 사람이 셋째 하늘로 끌려 올라갔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끌려 올라가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말하도록 허락되지 않은 것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에 관해서는 자랑하겠으나 나에 관해서는 약하다는 것 외에는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바울은 돌에 맞아 죽었을 때 혼이 몸에서 떠나 셋째 하늘로 올라간 것이다. 그곳에서 이루 다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것들을 보고 듣고 나니, 주님께서 계신 그곳에 다시 가고 싶어서 마치 "순교 편집증"에 걸린 것처럼 다시 죽으려고 루스트라로 걸어 들어갔던 것이다. 바울은 그가 지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갖는 그것이 훨씬 좋다고 했다(빌 1:23). 그리스도인은 이런 "순교 편집증적 자살 성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은 주님께로 가는 길에 놓인 "순간의 통로"일 뿐이기에, 자기가 죽어서 어디로 갈지 알고 있는 성도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을 섬겨야 한다. 그러한 섬김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값진 것이기 때문이다.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주께서 보시기에 값진 것이로다』(시 116:15).

자살보다는 그저 어서 죽기를 바랐던 욥은 인간의 죽음을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어떤 사람은 기력이 왕성할 때 아주 평안하고 안락한 가운데 죽나니 그의 가슴은 젖으로 가득 차고 그의 뼈는 골수로 차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자기 혼의 쓰라림 속에서 죽으며 기쁨으로 먹지 못하는도다. 그들이 다 같이 흙 속에 눕고 벌레들이 그들을 덮으리로다』(욥 21:23-26). 아주 건강한 상태로 편안하게 죽는 사람과 음식도 잘 먹지 못한 채 혼의 쓰라림 속에 죽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 모두 죽어서 썩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죽음 앞에 장사 없고, 남보다 고생했다 해서 죽음이 그 사람을 비켜 가는 것도 아니다. 죽음은 만인에게 평등하며, 구더기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외모를 존중하지도 않는다. 모든 육체의 끝에는 구더기가 들끓는 것이다.

비록 구더기들이 육체를 먹어 치운다 해도 성도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다. 산 채로 벌레들에게 뒤덮였던 욥의 믿음이 바로 그것이었다. 『오, 내 말들이 지금 기록된다면! 오, 내 말들이 책에 쓰여진다면! 내 말들이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 영원히 새겨진다면! 이는 나의 구속주가 살아 계시고 훗날 그가 땅에 서실 것임을 내가 앎이라. 내 피부의 벌레들이 이 몸을 멸한 뒤에라도 내가 내 몸을 입고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비록 내 콩팥이 내 안에서 소멸된다 해도 다른 사람이 아닌 내 눈으로 보리라』(욥 19:23-27). 하나님께서 내세우신 이 믿음의 챔피언은 웰 다잉을 추구하지 않았다. 죽기 전에 법적 효력이 있는 유서를 남기지도 않았고, 묘비명을 미리 지어 보지도 않았으며, 삶을 정리하는 기록을 남기거나 "관"에 들어가 누워 보는 연습도 하지 않았다. "웰 다잉 십계명"이란 것을 지키려고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거나 자기 건강을 체크하는 일, 또는 매일 10분씩 자성의 시간을 가지면서 마음의 빚을 청산하고 추억의 물품을 보관하는 일 따위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육체의 부활을 소망하면서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 영원히 기록된 것과 같은 부활의 믿음을 간직했던 것이다.

『내 피부의 벌레들이 이 몸을 멸한 뒤에라도 내가 내 몸을 입고 하나님을 보리라.』라는 욥기 19:26의 말씀은 성경에서 육체의 부활을 다루는 핵심 구절이다. <한글개역성경>은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로 내용을 완전히 변개시켰는데, 『내가 내 몸을 입고』를 "내가 육체 밖에서"로 바꿈으로써 죽음 이후에 있을 육체의 부활을 부인해 버린 것이다. 성도들에게 부활의 교리를 계시할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이 아니다. 성경으로 부활의 소망을 가르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사가 아니다. 성경을 통해 자기 육체로 부활하리라는 소망을 갖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기하시고 복음을 통해 생명과 불멸을 밝히셨다(딤후 1:10). 초림 때에는 신약 그리스도인들의 부활과 휴거를 미리 계시해 주기도 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부활]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휴거].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 11:25,26) 죗값을 대신 치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거듭난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활과 휴거에 관한 분명한 소망이 있는 것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시리니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부활] 그리고 나서 살아남아 있는 우리도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리니[휴거],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히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위선자가 성공했다 해도 하나님께서 그의 혼을 취해 가시면 그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욥 27:8). 세상에서의 번영이나 웰 다잉 같은 것들은 주님께서 보시기에 가소로운 것들이다. 마지막 때의 교회들은 부활의 소망도 없이 세상을 흉내 내면서 교인들에게 웰 다잉을 선전하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이겠는가! 웰 다잉은 예수 그리스도의 찢겨진 살이나 피 흘리신 죽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죄와 죽음과 사후의 생에 관한 복음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 채, 진리가 아닌 것을 전염병처럼 퍼뜨리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더 경계해야 할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 교회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면 당신도 그들과 함께 멸망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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