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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성경에 겁먹은 자들의 학술대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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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02월호>
지난 2024년 11월, 한국기독교이단연구학회에서는 “KJV, 영감된 유일한 성경인가?”라는 주제로 제2회 정기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학회장 유영권 박사의 주제발표에 있었던 대로, 그들은 <킹제임스성경> 외의 다른 사본과 역본이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교인들이 혼란을 느끼는 데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했고, 그러한 주장에 대항하고자 <킹제임스성경> 및 그 성경으로부터 번역된 성경의 무오성을 공격하는 4개의 발제가 이어졌다. 지난 호에서는 앞선 두 개의 발제를 다뤘다. 이번 호에서는 남은 두 개의 발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세 번째 발제를 맡은 사람은 한천설 박사(총신대학교 신약학 은퇴교수)였다. 제목은 “KJV와 다른 역본과의 관계 고찰”이라고 내걸었으나, 그 내용은 국내의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자들”의 기원, 분류, 영향력, 오류 등에 관한 것이었다. 국내의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자들”은 피터 럭크만 목사의 영향을 받은 이송오 목사로부터 시작했으며, 그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자들”은 현대의 비평 본문이 탄생하는 데에 마귀의 개입이 있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골자였다.
한 박사는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사탄이 활동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벧전 5:8),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려든다는 사실을 “터무니없다”고 매도하지는 못했을 테니 말이다. 성경 변개는 성경이 기록되던 그때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뿌리 깊은 범죄다(고후 2:17). 지금은 그때보다도 더욱 세상이 악해졌을진대 어째서 거짓말의 아비 사탄의 역사를 따라 행하는 사기꾼들의 활동이 거꾸로 줄어들거나 없어질 수 있겠는가?(딤후 3:1-13) 그런데도 현대 비평 본문을 옹호하는 자들은 “의도적 성경 변개란 없다”는 비상식적인 입장을 취한다. 현대 헬라어 비평 본문의 창시자격인 웨스트코트와 홀트 또한 이렇게 말했다. “틀림없이 가짜인 신약 본문들이 다수 있을지라도, 어떤 신조에 입각하여 목적을 가지고 고의적으로 본문을 위조한 흔적은 없다는 것이 우리들의 믿음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탄의 손길”을 볼 수 없는 까닭은 바로 사탄이 그들 “뒤”에 있기 때문이었다.
웨스트코트는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예수님]는 결코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한 적이 없다,” “그는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하게 확증하지 않았다.”라는 것이 웨스트코트 본인의 주장이다. 태초부터 계셨으며 하나님 그분이셨던 『말씀』께서 우리를 위해 죽어 주시고자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으며(요 1:1,14),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셨다는(요 10:30-38) 진리를 부정했던 것이다. 성경은 그런 영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씀하신다(요일 2:22; 4:3). 다윗이 “주”라고 불렀던 그 그리스도(마 22:45)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다는 사실, 곧 하나님 그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요일 4:2,3) 통제받는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바로 현대의 비평 본문인 것이다.
웨스트코트뿐 아니라 그와 함께 헬라어 본문을 편집했던 홀트, ASV가 나오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미국 성경 개정위원회의 전 의장 필립 샤프, NIV 성경 번역 위원회의 전 사무국장 에드윈 팔머 등 성경을 고쳐 보겠다고 나섰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왜곡된 관점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개정한 성경 본문에 예수님께서 요셉의 “아들”이었다고 되어 있고(눅 2:33,43),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이 아니라 그저 “육신으로 오셔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신 분”(딤전 3:16)이라고 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도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철저하게 반영한 성서를 펴냈던 것이다.
마지막 발제자 김홍기 박사(Christ Lives Ministries 대표)는 “KJV의 잘못된 활용사례 및 비평”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는데, 그의 특징적 주장은 <킹제임스성경>은 1611년 출간된 이후 무려 11차례나 오류들을 개정해 왔고, 또 여전히 오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1611년판에서 “개정”이 이뤄진 예를 총 3가지 제시했는데, 민수기 6:14에서 “lamb”으로 잘못 되었던 것이 “ram”으로, 에스겔 24:7에서 “powered”로 잘못 되었던 것이 “poured”으로, 요한복음 15:20에서 “the Lord”로 잘못 되었던 것이 “his lord”로 후대에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그가 제시한 것 외에도 그러한 종류의 실수들은 적지 않았다. 심지어 <킹제임스성경>이 출간되고 1612년에 나온 판본들 중에는 “통치자들[princes]이 까닭없이 나를 박해”(시 119:161)했다고 되어 있어야 할 부분이, 구약 시대에는 존재했을 리가 없는 “인쇄공들[printers]이 까닭없이 나를 박해”했다는 다소 우스운 실수가 반영되어 출간된 판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인쇄상의 오류에 불과할 뿐 번역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17세기의 인쇄술로는 오류 없이 출판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당시에는 일일이 글자를 손으로 배열하여 제판(製版)한 판본을 찍어 내는 방식으로 인쇄 공정이 수행되었으므로, 실수에 취약할 수밖에는 없었으며, 심지어 같은 시기에 인쇄되었다고 해도 인쇄소가 다르면 으레 “이본”(異本)이 생기곤 했다.
그러한 실수들은 “교정”의 대상이지 “개정”의 대상이 아니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지금도 편집자의 실수나 인쇄상의 문제는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주 하나님”으로 인쇄되어야 하는데 잉크가 흐릿해져서 “수 하나님”으로 인쇄된다든지, 점이 찍혀서 “추 하나님”으로 인쇄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어쩌면 손으로 쓴 글씨로 되어 있던 “원본”에도 이런 부분이 있었을지 모른다. 글씨를 쓰다 보면 예컨대 알파벳 “i”에서 점이 빠져 “l”처럼 보인다거나 “h”에서 획이 조금 짧아져서 “n”처럼 보인다거나 하는 일이 많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점과 획이 사라졌다”(마 5:18)고 하겠는가? 그러나 김 박사처럼 그런 것들을 “개정”의 범주로 취급하는 자들은 “원본”에서조차 “개정할 부분”을 찾아낼 게 분명하다. 그와 같은 위선자(hypocrite), 곧 “극단적 비평가” (hypercritic)에게는 무엇을 보여 줘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김 박사가 “여전히 남아 있는 오류”랍시고 제시한 것은 열왕기하 8:26과 역대기하 22:2에서 아하시야의 나이가 각각 22세와 42세로 다르다는 케케묵은 논쟁에 관한 것이었다(이 내용은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도 동일한데, 그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오류를 지적했다). NASB, NLT, ESV, NIV 등의 현대 영문 역본 번역자들과 새번역, 표준새번역 등의 국문 역본 번역자들은 “하나님을 도와 드렸는데,” 모두 역대기하 22:2에서 아하시야의 나이를 열왕기하 8:26과 동일하게 22세로 맞춘 것이다. 어떤 히브리어 구약 필사본에도 아하시야의 나이가 22세로 되어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는 “오류”가 아니다. 오히려 열왕기와 역대기에서 아하시야가 통치를 시작한 나이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공동 통치가 흔했던 당대의 정치적 상황을 잘 보여 주는 단초이므로 수정되면 안 되는 진술이다. 유다의 여호사밧 왕 제4년, 여호사밧왕은 이스라엘의 아합 집과 친족 관계를 맺고 군사적 동맹 관계가 되었으며(대하 18:1), 후일 함께 라못길르앗으로 전투를 치르러 간다. 이는 예사로운 동맹과는 차원이 달랐는데, 이 점은 유다의 왕이었던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이라는 칭호까지 갖게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대하 21:2). 즉 아합의 유고 시 여호사밧(또는 그의 집안)이 북왕국 이스라엘을 차지하거나 적어도 상당한 수준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cf. 대하 21:4).
그렇다면 여호사밧의 유고에 대한 유다의 대비는 어땠을까? 이 점은 열왕기상 22:26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 성경은 “요아스”가 “왕의 아들”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요아스”는 “아하시야의 아들”(왕하 11:2)이었다. 그렇다. 바로 이 무렵에 22세의 아하시야는 여호사밧의 유고 시 왕위를 계승하기 위하여 “왕”으로서의 기름부음을 받았던 것이며, 그래서 성경은 “요아스”를 “왕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유고는 생기지 않았다. 아하시야는 역대기하 22:2 말씀대로 20년이 지나 42세가 되어서야 유다의 왕위에 앉았다. 보라, 성경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가 있는 것은 성경을 주어진 그대로 믿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어째서 “네거티브” 전략으로만 일관했는지, 그러니까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 성경도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너희들이 쓰는 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데만 여념 없었는지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을 보노라면 개구리를 없애 버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불러왔던 이집트의 마술사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이 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공급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악화시키기만 했다. 그런 자들은 “학자입네” 하면서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는 결코 이를 수 없다. 그런 자들에게 속지 말라. 하나님의 책을 도둑질당하지 말라!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