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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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사도” 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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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12월호>

지난 11월 5일 이스라엘의 라빈 수상이 한 극우 과격파 청년에 의해서 암살당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는 놀랐으며, 그의 죽음 앞에 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했다. 거의 모든 언론들은 “평화의 사도”가 죽은 것으로 보도했으며, 대부분의 기독교 언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죽음 앞에서 성경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과 종교인들이 “평화”를 외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 인간 역사 속에 개입되어 온 전쟁에 지쳐 있다. 사람들은 전쟁을 해결하고자 평화 협상도 맺어 보았고, 국제 협력 기구를 조직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20세기에 UN이 설립된 이후에 세계의 전쟁이 그칠 날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슈퍼맨”과 같은 존재가 나타나서 인류의 고민인 전쟁을 해결해 주기를 항상 바라고 있다. 그래서 평화 협상을 성공적으로 맺은 사람은 전쟁의 영웅보다 더 위대한 영웅이 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평화의 영웅”이 나타나도 세상의 전쟁은 “그 날”이 올 때까지 그치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성경은 인간의 힘으로는 이 땅에 평화가 이룩되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성경에서의 평화는 항상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 아래 주어진다. 그래서 이 평화는 절대적인 평화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전능하신 힘으로 이 평화를 가져오신다. 이 평화는 전쟁을 동반하는데, 하나님의 평화는 공의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전쟁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 이사야 2:4이 이 사실을 잘 나타내 준다. 『그가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심판하시며 많은 백성을 책망하시리니, 그들이 자기 칼들을 두들겨서 보습을 만들며 자기 창들을 두들겨서 낫을 만들 것이요,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여 칼을 들어올리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더이상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사 2:4, UN 빌딩 앞에는 이 구절이 심판에 관한 앞부분이 생략된 채 인용되어 있다). 『보스라에서 물들인 옷을 입고 에돔에서 오는 이가 누구인가?... 나의 분함으로 그들을 밟고 나의 진노함 속에서 그들을 짓밟으리니, 그러면 그들의 피가 내 옷에 튀어서 내가 내 의복을 모두 얼룩지게 할 것이라』(사 63:1-3). 그러므로 이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 모든 이방 나라들을 심판하신 후에 가져오시는 평화이다. 비록 이방인들은 “슈퍼맨”과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평화를 이룩하기 원하지만 그들은 전능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적리스도가 오는 날 그와 함께 온 이방 나라들은 한 데 뭉쳐 주님을 대적할 것이다. 『어찌하여 이방이 분노하며 백성들이 헛된 것을 꾀하는가? 땅의 왕들이 나서고 치리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주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이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그들의 결박을 끊고 그들의 멍에를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시 2:1-3).
하나님께서 전쟁으로 평화를 가져다 주시는 모습은 출애굽 사건에서 잘 묘사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카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 거민들을 죽이고 내어 쫓으라고 말씀하셨고, 여호수아는 이 말씀에 순종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 땅을 승리로 차지한 후, 그들이 지속적으로 섬길 때 그들을 평안하게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땅이 창세기 13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이후에(창 13:14-17) 하나님께선 한 번도 이 땅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다. 오히려 여호수아가 그 땅의 거민과 평화협정을 맺을 때(수 9:3-15), 그리고 사울이 아말렉을 완전히 진멸하지 않았을 때(삼상 15:1-9)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셨다. 하나님의 평화는 전쟁으로 쟁취하시는 평화이다.
솔로몬이 팔레스타인 온 지역을 유프라테스 강까지 평화롭게 다스리기(왕상 4:21-25) 이전에는 그 지역에 다윗이 흘린 많은 피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그 땅으로 회복시키실 계획을 한 번도 취소하지 않으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하는 일은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도 가자(아사)에서부터 유프라테스 강까지 차지할 것이다(왕상 4:21-25).
우리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을 기억한다. 그 두 전쟁이 누구의 계획과 음모로 인해 일어났든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볼 때 그 전쟁들은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백성 이스라엘을 그 땅에 데려가시려고 일으키신 전쟁이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에 발포아 선언으로 그 땅이 유대인들을 위해 예비되었다. 시오니즘 운동이 일어나고 많은 유대인들이 좋아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많은 유대인들이 그때까지 유지했던 생활의 안정 때문에 그 땅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그 땅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히틀러를 일으키셔서 그들을 무참히 징벌하셨다. 이는 그들이 심은 대로 거둔 것이었다(마 27:25).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약속하셨고, 여호수아를 통해 그들을 그 땅으로 인도하셨고, 바빌론 포로 후에 느헤미야와 스룹바벨을 통해 다시 그 땅으로 들이셨고, 또 다시 1948년에 그 땅을 회복시키셨다. 그리고 그 땅에 들어갈 때마다 항상 그 곳에 있던 거민들이 유대인들을 방해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그들을 치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 땅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이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에 이스라엘이 그 땅으로 들어갔을 때 거기에는 옛날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들은 잘 싸워 왔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날에도 여호수아의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그들은 거짓 평화를 원한 것이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번에 저격된 라빈 총리는 1967년에 있었던 “6일 전쟁”의 영웅이었다. 그는 마치 여호수아 같았다. 그러나 이제 그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세상과 손잡을 때, 하나님께서는 한 “과격파”의 손을 빌어 그를 치신 것이다.
물론 지금 이스라엘이 독립해 있는 상태가 구약에서 예언한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은 아니다. 그들은 다시 적그리스도에게 그 땅을 빼앗겨야 할 것이고, 다시 메시야 왕,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천 년 간의 안식을 위해 그 땅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 그들이 땅을 더 차지하고 빼앗기고 하는 것은 문제가 안될 수도 있다. 오히려 지금은 교회시대이므로 유대인들은 그 땅에 연연하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여 우리와 같이 구원받는 것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은 예언의 마지막 때가 가까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초림 때에 그러셨던 것처럼, 재림 때에도 그들을 그 땅에 놓으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계획으로서, 그들이 그 땅에서 주님을 맞도록 하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 유대인들의 자세이다. 적어도 “극우 과격파”들은 구약성경의 약속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땅을 자기들이 차지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성경적인 믿음이며, 그들은 이 믿음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 불행하게도 라빈 총리는 이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사람으로서, 환란시대에 믿음과 행위로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사람의 한 예표가 된 것이다.
지금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평화의 사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괴로워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이끌어 가던 평화협상이 끊기지 않고 더 잘 진행되기를 원하고 있다. 이제 그들이 기다리는, 라빈보다 더 위대한 “평화의 사도”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그들의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아 자기에게로 돌릴 것이며, 자신을 경배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그렇게도 바라던 평화, 그 평화를 도구로 삼아 많은 사람을 죽일 것이다(단 8:25). 마지막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원수를 짓밟아 승리하실 때까지 그 “평화의 사도”는 계속 백성을 미혹하고, 또 억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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