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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중들에게 저주를 선포하는 박옥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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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7년 07월호>
최근 기쁜소식선교회(이하 구원파)의 박옥수 목사가 동아일보에 전면광고 형식으로 창세기 강해를 여러 번에 걸쳐 게재하고 있다. 필자는 이미 본지 181호를 통해 그의 강해 아닌 강해의 잘못들을 바로잡아 준 바 있다. 이번에 다시 한 번 펜을 든 것은 박옥수 목사의 거짓 교리가 지속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보고 그 심각성을 한 번 더 느꼈기 때문이다.먼젓번 글에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그의 가장 큰 오류는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구원의 복음에만 적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구원에 대한 메시지와 영적 성장에 관한 메시지를 혼동할 뿐 아니라, 때로는 아주 심각한 이단 교리를 양산해 내기도 한다.
1. 참회는 어리석고 선은 무익하다(?)
필자는 신문에 실린 그의 강해 설교를, “구원받았지만 죄 가운데서 허덕이는 사람”의 관점으로 읽어 봤다. 하지만 박목사는 지속적으로 “십자가에서 처리된 것”만 반복적으로 말하지, 실제적으로 죄를 이기는 능력은 제시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죄짓는 성도들을 안심시키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살아가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성도라면 지속적으로 죄를 짓는 자신을 볼 때,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제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내일은 죄를 짓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할 것이다. 하지만 박옥수 목사는 이러한 기도를 아주 무가치한 기도라고 말한다(창세기 강해 6). 단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죄를 처리해 주셨다는 것을 믿고 의를 주장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우리가 정말 십자가의 보혈을 경험했다면, 그 보혈의 능력으로 그 죄의 유혹에서 이겨내야 한다. 혹 넘어지게 된다면 자백하고 참회함으로 다시 돌이켜야 한다(요일 1:9). 하지만 박목사는 자백하고 참회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며, 율법적인 자기 의의 행위라고 오해하고 있다.
이러한 오해는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서 더욱 증폭된다.
그는 창세기 강해에서 이 탕자의 비유를 예로 들어 말하면서, 탕자가 돼지를 치는 모습을 율법적인 의로 구원을 받으려는 어리석은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둘째 아들이 돼지우리에서 노력한 것처럼 내가 노력해서 깨끗해지려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내가 율법을 지키고 충성해서 하나님 앞에 떳떳이 나가려고 발버둥쳤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이 돼지우리에서 애를 쓸수록 더 더러워지고 더 굶주렸듯이...”(창세기 강해 2).
그러나 탕자가 돼지우리에 들어간 것은 재산을 탕진한 결과지 아버지를 기쁘게 해보려고 “노력”한 결과가 전혀 아니었다. 돼지우리에서 무엇을 노력했다는 말인가? 그는 죄의 결과인 비참함에 빠져 있는 것뿐이었다. 재산을 탕진한 것도 율법적인 의로 무엇을 이뤄 보려는 것이 아니라, 죄로 방탕한 모습이었다. 따라서 이 비유는 구원받은 성도가 타락했다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장면에 적용되어야 한다. 분명 범죄하고 타락한 성도는 참회하고 돌아와야 한다. 그러면 주님께서 받아 주신다.
그런데도 박목사는 여기서 율법의 무익함만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실 성도의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한 건전한 행위까지도 율법의 테두리 안으로 묶어 정죄해 버리기 위함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날마다 죄들을 성찰함으로써 전진해 나가는 우리의 신앙을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행하라”는 것이었다. 비록 그 율법을 완벽히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율법에는 하나님의 뜻과 거룩하신 성품이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운 것이었다(롬 7:12). 우리는 율법으로 구원받거나 율법적인 삶을 살지는 않아도, 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루셨다. 이것은 율법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하여 율법보다 더 온전한 의를 이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들을 모두 율법이라고 정죄해 버린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죄를 짓는 것은 용서라는 미명하에 덮어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은 율법이라는 잣대로 정죄해 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마귀의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 카인의 표는 유월절 양의 피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박옥수 목사의 강해 설교 중에 필자를 가장 경악케 한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카인의 표”에 관한 것이다. 아무리 성경을 몰라, 모든 구절들을 구원의 복음에 한정한다 할지라도 어떻게 이 정도란 말인가?
그는 카인이 하나님께 쫓겨나는 장면을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 “가인은 자기가 행한 모든 일이 무익하고, 자기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나는 죄가 많고, 그 죄의 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창세기 강해 8).
이것은 완전한 거짓말이다. 박목사는 카인이 자기가 행한 일이 무익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는데, 도대체 카인이 어떤 일을 무익하다고 느꼈단 말인가? 이러한 표현은 자기 의지로 하나님을 섬긴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하는 말이다. 카인이 자기 의지로 하나님을 섬긴 것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바친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카인이 그 행위에 대해 회개했다는 말인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카인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분노하여 아벨을 죽였다. 카인은 여기서 하나님께 항변하고 있는 것이지, 자기 행위가 헛된 것에 대해 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박목사의 말과 반대로 카인은 아무것도 깨달은 것이 없다.
여기서 박옥수 목사는 성경을 변개시키기까지 한다. 성경은 카인의 말을 “내 벌이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크니이다.”(창 4:13)라고만 인용하고 있는 반면, 박목사는 카인이 “나는 죄가 많고, 그 죄의 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한다. 이렇게 되면 명백하게 카인이 자신의 죄를 뉘우친 것이 된다. 하지만 성경을 보라. 언제 카인이 “나는 죄가 많습니다.”라고 죄에 대해 고백한 적이 있는가? 그는 죄의 짐에 허덕이는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바라고 나아온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내리신 저주(창 4:11,12)에 대해 항변하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박목사의 설명은 더 가관이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누구든지 그를 죽일 수 없게 확실한 표를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서는 집집마다 표가 있었습니다. 그 표가 있는 집에는 사망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주신 그 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 그 피가 내 죄에 대한 벌을 다 받은 표가 되기 때문에 내게는 다시 심판이 찾아올 수 없습니다...”
박목사는 카인이 받은 표가 유월절 어린 양의 피와 동일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얼마나 무지한 말이며, 이단적인 교리인가? 카인이 받은 표는 저주의 표식이다. 그 표로 인해 카인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창세기 4장에서 카인과 아벨이 어떻게 비교되는지를 본다. 아벨은 목자였으며, 따라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예표다. 반면 카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한 적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또한 아벨의 제사는 피의 희생제사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상징한다. 반면 카인의 제사는 땅의 소산이었고 땀과 노동의 결과였다. 즉 자기 의에 따른 행위를 상징한다. 여러 가지를 볼 때 아벨은 복받은 인물이고, 카인은 저주받은 자다. 더욱이 카인도 표를 받았지만 적그리스도, 즉 짐승에게도 표가 있다(계 13:16). 카인의 표는 바로 이 짐승의 표를 예표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3:12은 『카인같이 되지 말라. 그는 그 악한 자로부터 나왔으며 자기 아우를 살해하였으니...』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그 악한 자”는 바로 마귀이다. 결국 카인은 적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깊은 진리까지는 혹 모른다 할지라도, 성경에서 카인을 긍정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곳이 한 구절이라도 있는지 보라. 유다서 11절에서도 『그들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그들이 카인의 길로 갔고...』(유 11)라고 말씀한다. 더욱이 카인은 아담과 같이 가죽옷 같은 것을 받은 적이 없다. 하나님의 의나 어린 양의 피를 상징하는 그 어떤 것도 이 장면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도대체 박옥수 목사는 무엇을 근거로 카인이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는 도피자와 유랑자로 저주받았다. 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죽임당하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것은 한마디로 낙인찍힌 것뿐이다. 그런데도 박옥수 목사는 그 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같은 표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박목사는 그의 회중들에게도 그 표를 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구원의 표를 주어서 멸망을 면케 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 믿음으로 그 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는 구원의 표라고 말하지만, 그 표는 사실 저주의 표다. 그렇다면 박옥수 목사는 그의 회중들에게 저주받으라고 선포를 하고 있는 셈이 아닌가! 이 설교를 들은 회중들이 설교가 끝나고 기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주여! 우리에게 가인의 표를 주시옵소서!” 하고 통성기도 하고 있는 회중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란 말이다.
이와 같이 성경에 대한 무지로 인해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전혀 분별하지 않고 오로지 구원의 복음에만 한정시키는 결과는 엄청나다. 사람들은 보통 구원파에 대해서 “그들은 구원의 복음은 제대로 전하는데 깊은 진리를 모른다.”라고들 평가하곤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보는 바대로 박옥수 목사의 설교는 거짓 교리로 점철되어 있다. 이러한 것이 어떻게 “복음”이 될 수 있겠는가? 죄에 대해 참회하는 것을 어리석다 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선을 행하는 것을 무익하다 하며, 심지어 악한 자의 저주까지 불러들이고 있지 않은가?
성경에 대한 무지는 단순히 무식하다는 말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거짓 교리로 인도하는 길이요, 그 어리석은 길에 들어선 자가 회중들을 가르친다면 온 회중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게 된다. 소위 “구원파”에 속한 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깊이 알아야 할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