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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방언과 신유에서 벗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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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10월호>
필자가 아주 어릴 적부터 사귄 한 친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살던 가난한 이였다. 그는 사춘기 때 방탕하게 살다가 그만 뇌종양에 걸리고 말았는데, 의사들이 그를 포기하자 어머니는 한국 교회에서 잘 알려진 어느 기도원의 소위 “신유”를 잘한다는 여자 원장에게 병든 아들을 데려갔었다. 훗날 들려온 소식은 그가 죽었다는 것이었는데, 신유를 한다던 그 “은사주의자”가 꽤 유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짜였음이 판명난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그 여자는 기독교계 안으로 들어온 “무당”이었다. 그녀가 흉내 냈던 신유의 표적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사도들에 의해 한시적으로 실행되었던 것인데도, 사도들이 모두 사라진 오늘날 소위 “사도적 직분”을 계승했다는 은사주의자들은 돈을 벌려고 무지한 군상들을 모아 갖가지 거짓 쇼를 하며 하나님을 심히 모독하고 있다.“표적”은 선지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대상으로 주어진 것이었으며, 그 시작이 바로 “신유”였다. 곧 하나님께서 막대기가 뱀으로 변한 표적 이외에 “문둥병에 걸렸다가 치유된 손”의 표적을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것이다. 『주께서 그에게 또 말씀하시기를 “네 손을 지금 네 품에 넣으라.” 하시기에, 그가 자기 손을 품에 넣었다 꺼내니, 보라, 그의 손이 문둥병에 걸려 눈처럼 되었더라.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손을 네 품에 다시 넣으라.” 하시므로 그가 그의 손을 품에 다시 넣었다가 품에서 꺼내니, 보라, 그의 손이 그의 다른 살과 같이 되었더라. “만일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고 처음 표적의 소리에 경청하지 아니하면, 그들이 나중 표적의 소리를 믿으리라』(출 4:6-8). 이것은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표적을 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는데, 초림 당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표적을 행하심으로써 구약에 예언된 “모세와 같은 선지자”(신 18:18)가 바로 주님 자신이심을 증명하셨다. 주님께서는 모세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인들의 속박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이셨던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초림 때 “왕국 복음의 표적”으로서 “신유”를 행하셨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또 왕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가운데 모든 질병과 모든 허약함을 고쳐 주시더라』(마 4:23). 이 신유의 표적은 주님께로부터 왕국 복음을 위임받은 열두 제자에게도 주어졌는데, 제자들은 그 권세를 받아 백성들에게서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모든 병과 허약함을 치유할 수 있었다(마 10:1). 이 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도 그분의 부활을 전파하는 사도들에 의해 실행되었으며, 그 내용을 사도행전 곳곳에서 쉽게 목도할 수 있다(행 4:16; 6:8; 8:6; 15:12; 19:11 등).
한편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사도들이 유대인들에게 전파한 최초의 메시지는 “방언”(외국어), 곧 “각 나라의 언어”로 전달되었다.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께서 그들에게 발설하게 하신 대로 다른 방언들로 말하기 시작하더라. 당시 예루살렘에는 신앙심이 깊은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머물고 있었는데 그때 이 소문이 퍼지자 무리가 함께 모여 혼란이 생겼으니 이는 각 사람이 자기 나라 말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라』(행 2:4-6). 이처럼 “방언”은 외국어를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이 일시적으로 그 외국어를 초자연적으로 이해하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를 확증해 주던 “사도들의 시대의 표적”이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고전 1:22)라는 말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표적을 구하기에(마 12:38; 16:1, 요 4:48; 6:30 등), 신유와 더불어 방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임이 분명했다.
특히 방언은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에 의해 “성령 침례(세례)”의 증거로 오해되고 있는데, 그들이 말하는 성령 세례는 성경에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 그들이 그러한 주장의 근거로 삼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행 2장)은 실제로 성령 침례가 일어나긴 했어도 그들이 말하는 성령 세례와는 전혀 무관한 사건이었고, 그날 있었던 사도들의 방언 또한 결코 “성령 침례의 증거”가 아니었다. 『그후 오순절 날이 되자 그들이 다 하나가 되어 한 장소에 모였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친 강풍 같은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우더라. 거기에 불 같은 모양으로 갈라진 혀들이 나타나 그들 각 사람 위에 머물더니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께서 그들에게 발설하게 하신 대로 다른 방언들로 말하기 시작하더라』(행 2:1-4). 이 사건이 “성령 침례”와 결부되는 이유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약속하신 “영적 침례”가 성취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정녕 물로 침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여러 날이 지나지 않아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행 1:5). 오순절 날 행해진 “방언”은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아”이셨음을 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신앙심이 깊은 유대인들』(행 2:5)에게 증명하기 위한 표적으로 사용된 것이었고(고전 14:21,22), 당시 그곳에 있던 유대인들은 그들 각자가 태어난 곳의 고유 언어로 사도들이 초자연적으로 말하는 것을(행 2:8) 듣고 놀라워하며 선포된 메시지를 믿을 수 있었다. 그들이 “알아들은” 방언은 그들이 태어난 바로 그곳의 고유 언어, 곧 “외국어”였던 것이다!
특히 사도행전 2장의 성령 침례는 “성령 침례의 증거가 방언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왜냐하면 오순절에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던 사람은 약 120명이었는데, 그날 성령 침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방언을 한 사람은 “열두 사도”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제비를 뽑으니 맛디아에게 떨어진지라,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계수되더라. 그후 오순절 날이 되자 그들이 다 하나가 되어 한 장소에 모였는데...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께서 그들에게 발설하게 하신 대로 다른 방언들로 말하기 시작하더라... 그러자 그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겨 서로 말하기를 “보라,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그때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서서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말하기를』(행 1:26; 2:1,4,7,14). 은사주의자들은 성령 세례의 증거가 방언이라면서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방언을 한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방언을 한 사람은 고작 열두 사도뿐이었으니, 그런 거짓 은사를 자랑하는 자들의 주장은 그야말로 “거짓말”인 것이다.
또한 성경에서 말씀하는 “성령 침례”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죄인이 거듭나는 순간 성령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가는 “영적 침례”를 의미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또 모두가 한 성령 안으로 마시게 되었느니라』(고전 12:13). 성령 침례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 성령님께서 그를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잠기게(침례) 해 주신 사건이며,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유일한 성령 침례다. 죄인이 구원받은 후 성령을 다시 받는다는 은사주의 거짓 교리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들이요, 둘째는 선지자들이요, 셋째는 교사들이요, 그 다음은 기적들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들이며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여러 가지 방언들이라. 다 사도들이겠느냐? 다 선지자들이겠느냐? 다 교사들이겠느냐? 다 기적들을 행하는 자들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들을 가졌겠느냐? 다 방언들을 말하겠느냐? 다 통역하겠느냐?』(고전 12:28-30)
이처럼 방언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에게 주어진 다양한 은사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며, 열두 사도만 했던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이러한 원칙대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은사주의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을 들먹이면서 방언은 방언을 말하는 그 사람조차 모르는 “알지 못하는 방언”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당시 방언이 실행되던 교회 내에서 그 방언(외국어)을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었다는 뜻일 뿐이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안에서 방언을 하려면 “통역”을 해야 한다고 했으며, 그렇지 못하겠거든 혼자 있을 때 “자신”과 “하나님”께만 말하라고 권면했다(고전 14:27,28). 또한 바울은 세상에 수많은 종류의 말이 있을지라도 뜻 없는 말은 하나도 없다고 했으니(고전 14:10), 교회에서 너 나 할 것 없이 떠들어 대는 은사주의자들의 뜻 없는 소리는 마귀가 넣어 준 비성경적인 잡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사도들이 사역하던 시대가 끝나면서 본격적으로 펼쳐진 “교회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표적이 아니라 “믿음”이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라』(고후 5:7). 말하자면 믿음 없는 자들이 눈에 보이는 거짓 표적들에 현혹되어 멸망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인 것이다. 바울은 “방언”에 관하여 『방언들이라도 그치게 될 것이며』(고전 13:8, A.D. 57-59)라고 말했다. “신유”에 관해서는 디모데에게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앓는 질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 A.D. 65-68)라고 했으며, 『트로피모는 몸이 아파서 밀레토에 남겨 두었느니라.』(딤후 4:20, A.D. 68)라고 말했다. 이 서신들이 기록된 시기를 보면, 바울의 사역 말년에는 “신유의 표적”이 사라져 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딤후 4:11, A.D. 68)라는 말씀처럼 의사 누가를 데리고 다녀야 했었다.
바울의 사역이 끝나갈 무렵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도의 증거를 최종적으로 거부했다. 『그 중에는 그가 말한 것을 믿는 사람들도 있고 또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자리를 뜰 때 바울이 한 마디 부언하기를 “성령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우리 조상에게 잘 말씀하셨도다.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라. 이 백성의 마음이 무디어지고, 그들의 귀는 듣는 데 둔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며 마음으로 깨닫지도 못하고 회심하지도 못하게 되어 나로 그들을 치유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방인들에게 보낸 것과 그들이 그것을 들을 것을 너희가 알라.”고 하더라』(행 28:24-28). 이로써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행한 『사도의 표적들』(고후 12:12)은 완전히 중단되고 말았다. 이는 “이방인”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교회 시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바울은 『영적인 은사들을 열망하되 특별히 예언을 할 수 있도록 하라.』(고전 14:1)라고 말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은사주의자들처럼 방언에 집착했던 “육신적인”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방언보다 중요한 것이 “예언”임을 일깨워 준 권면이었다. 방언이 행해질 때도 예언이 더 중요했다면, 방언이 중단된 지금은 얼마나 더 중요하겠는가! 이제는 사도들 시대 이후로 중단된 방언에 대한 무의미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대비하며 바른 성경을 근거로 다가올 미래에 관해 예언하기를 열망하는 것이 지금 이 시대의 성도들이 취해야 할 올바른 자세이며, 그것이 곧 휴거를 올바르게 대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