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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문이 닫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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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7년 10월호>
성경에는 몇 가지 열쇠들이 등장한다. 열쇠는 기본적으로 어떤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도구이지만, 때때로 통치나 정부를 상징하는 경우가 있어서 그 열쇠를 지닌 사람에게는 권위와 권세가 부여되기도 한다. 그래서 고대 및 중세 국가들에서는 왕이 성을 방문했을 때 환대의 뜻으로 성문 열쇠를 바쳤고, 전쟁에서 패하여 성이 점령당했을 때는 항복의 표시로서 적장에게 성문 열쇠를 바침으로 성에 대한 모든 권리를 넘겼다고 한다.영국과 프랑스 간에 일어난 백년전쟁에서 프랑스의 해안 도시 칼레가 영국에게 함락된 적이 있었다. 당시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1년간이나 격렬하게 저항했던 칼레의 시민들을 몰살시키려 했지만, 살려 달라는 그들의 간절한 애원에 그 결정을 철회하는 조건으로 시민들의 목숨을 대신할 대표자 6명이 밧줄을 목에 매고 맨발로 성문을 걸어 나와 성문 열쇠를 자신에게 바친 뒤 교수형당할 것을 요구했다. 이 절망적인 요구 조건으로 칼레의 시민들은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바로 그때 도시 최고의 부자였던 유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자신이 대표로 죽겠다며 선뜻 나섰고 그 희생정신에 감격한 다른 5명의 고위층도 뒤따라 동참했다. 그리고 시민들의 통곡의 행렬 속에 이들 6명은 교수형을 위한 밧줄을 스스로 목에 묶은 채 성문을 열어 줄 커다란 열쇠를 들고 담담히 걸어 나갔다. 결국 죽기를 각오했던 이들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고, 그들의 희생정신 덕분에 칼레는 몰살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6인의 칼레 시민 대표야말로 "성문 열쇠"를 지닐 자격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전직 대통령, 정부 고위 관리, 대기업 총수 등 주요 권력층 인사들이 손을 묶인 채로 줄줄이 감옥 문을 들락거리는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그들에게는 칼레 시민들처럼 그들의 처지를 위해 눈물을 흘려 줄 국민도 없다. 왜냐하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진정한 희생정신을 발휘한 적이 없는, 곧 한 나라의 통치와 권위를 상징하는 열쇠를 지닐 자격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갇혀 있는 감옥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열쇠 꾸러미조차 지닐 수 없는 자들인 것이다.
성문 열쇠를 지키는 자들은 그 열쇠를 어깨끈에 단단히 묶은 채로 임무를 수행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마치 견장을 군복 어깨에 차는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 또한 『정부가 그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요』(사 9:6)라는 말씀과도 잘 어울리는데, 이 구절은 재림 때 메시아 왕국에서 다윗의 보좌 위에 앉아 통치하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다. 이와 연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하고 있는 이사야 22:22에서는 "다윗 집의 열쇠"가 언급되고 있다. 『내가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그가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이 열쇠는 영원한 공의와 정의와 화평으로 통치되는 메시아 왕국에서, "다윗의 보좌"(사 9:7)에 대한 정통성을 지닌 왕으로서 다스리게 될 권세를 의미하는데, 요한계시록 3:7에서는 "다윗의 열쇠"로도 표현이 된다.
이런 위대한 권세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도 갖고 계신다. 『나는 살아 있는 자며, 죽은 자였으나,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아멘. 또한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졌노라』(계 1:18). 지옥은 여러 부분들로 구분되어 있으므로, 거기에는 여러 개의 "문들"(마 16:18)과 "빗장들"(욘 2:6)이 있고 그것들을 열 수 있는 "열쇠들"도 있다. 심지어 끝없이 깊은 구렁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열쇠도 있다(계 9:1; 20:1). 에베소서 4:9에서는 "땅의 더 낮은 부분들"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이런 요소들을 잘 보여 주고 있는데, 이를테면 지하 세계가 기본적으로는 낙원과 지옥과 깊은 구렁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눅 16:19-31).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내용은 결코 단순한 "비유"가 아니며, "실명"(나사로, 아브라함, 모세)이 거명되고 있을 만큼 지하 세계, 특히 지옥의 실체를 보여 주고 있는 실제 사건이다.
예수님께서는 지하 세계를 관장할 수 있는 열쇠들이 있으시기에,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 죽으신 이후 지옥의 권세와 사망을 이기시어 부활하실 수 있었고, 인간의 혼과 몸을 모두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권세도 지니실 수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죽음의 문제를 주관하시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이 반석 위에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말씀하신 것이다. <폭스의 순교사> 제1장 첫머리에는(pp.17,18) 이 예언이 실제로 성취되었다고 말하면서 다음 세 가지 내용을 환기시켜 준다.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세우셨다. 즉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벧전 2:4-8, 고전 10:4) 위에 교회를 세우신 것이다. 이 반석은 "베드로"(로마카톨릭의 주장)나 "베드로의 신앙 고백"(개신교의 주장)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교회가 베드로 위에 세워졌다면 그것은 "사탄의 교회"일 뿐이다(마 16:23). 그래서 성경은 로마카톨릭을 가리켜 "사탄의 회당"(계 2:9)과 "마귀들의 거처, 온갖 더러운 영의 소굴, 모든 더럽고 가증한 새의 소굴"(계 18:2)이라고 말씀한다. 둘째, 그 교회는 매우 강력한 지옥의 모든 힘과 권세들(통치자들과 교황들)로부터 거센 비난과 공격을 받아 왔다. 셋째, 극도에 달한 마귀의 모든 악의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신실한 성도들의 피 흘린 발자취를 통해 지옥의 문들에 대한 위대한 승리가 입증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지니신 분은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따라서 죄인들을 지옥에서 건져 내실 수 있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그들이 죽은 뒤에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것이다. 하지만 로마카톨릭은 예나 지금이나 이 열쇠들을 찬탈하려 하고 있다. 교황의 문장(紋章) 위에는 두 개의 열쇠가 교차해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본래 이것은 고대 이교도 로마의 야누스 신의 상징이었는데, 교황은 그것을 자신의 교회를 위한 권위의 상징으로 써먹은 것이다. 특히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에 대해 언급하는 마태복음 16:18을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삼으셨다는 근거 구절로 삼으면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천국의 열쇠들"(마 16:19), 곧 지상에서 묶고 풀 수 있는 그 열쇠들이 교황들을 통해 전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교황권"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성경에 무지한 조용기 목사는 이 열쇠를 "꿈과 생각"으로 해석했는데, 꿈으로 풀고 생각으로 풀면 인간의 운명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린 자들이다(눅 11:52). 그런 식으로 지식을 알고 깨달을 수 있는 열쇠를 치워 버림으로써 진리를 발견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것으로 충분치 않았는지 누군가가 진리로 통하는 문이 열린 것을 발견했을 때 그 앞에서 그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기까지 한다. 『너희 자신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고 하는 다른 사람들도 막았기 때문이라』(눅 11:52). 그러나 그런 속임수는 지상에 살아 있을 때나 통할 뿐이다. 지옥에 가서 "꿈과 생각"으로 백날 풀어 보라. 영원히 풀고 또 풀어도 지옥의 불길에서 고통받아야 할 그의 운명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천국의 열쇠들"은 천국(왕국) 복음을 통해 천국의 문을 열어 주는 열쇠들이다. 천국은 구원받은 성도가 죽은 후에 올라가는 "하늘나라"가(딤후 4:18) 아니다. 이 교회 시대에 은혜의 복음을 믿고 거듭남으로써 들어가는 영적인 왕국, 곧 "하나님의 나라"(롬 14:17)와도 본질적으로 다르다. 천국의 열쇠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돌아오실 재림 때 세워지는 물리적인 왕국, 즉 천국으로 들어가게 해 주는 열쇠들인 것이다. 실제로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재림과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에 관한 천국 복음(행위 구원)을 설교함으로써 여러 차례 천국의 문을 열어 주었다. 사도행전 2장에서 5장까지 "악하고 음란한 세대"인 그 유대인들에게 천국 복음을 지속적으로 전파했던 것이다. 이처럼 "여러 번"에 걸쳐 전파했으므로 천국의 "열쇠들" 곧 복수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그는 사도행전 초기의 과도기적인 상황에서 교회 시대나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행 20:24)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 코넬료를 만났을 때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이전에 전파했던 복음의 내용을 정정하여 행위 구원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는데(행 10:43), 이를 계기로 복음의 문은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열리게 되었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딤후 1:11) 임명받은 사람은 바울이었지만, 이방인에게 복음의 문을 처음으로 연 사람은 베드로였던 것이다.
이처럼 열쇠는 기본적으로 문을 열기 위한 도구이므로 "복음의 문을 여는 도구"(복음이 전파되는 기회, 고후 2:12)를 의미할 수 있다. 이 복음의 문이 활짝 열린 때가 있었는데 바로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다. 『내가 너의 행위들을 아노라. 보라,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아무도 그것을 닫을 수 없노라. 이는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나의 말을 지켰고 내 이름을 부인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계 3:8). 이 시대는 "문이 열린" 기간으로 위대한 구령자들과 복음전도자들과 선교사들로 빛났던 시대다. 문이 활짝 열릴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는 데 있었다. 이 시대의 역전의 용사들은 킹제임스성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다. 이들은 오직 한 가지 책, 바른 성경만을 읽었고, 바른 성경만을 사랑했고 암송했으며, 바른 성경만을 설교하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한 이 배교한 라오디케아인들의 교회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그 문은 하나둘씩 닫히기 시작했다. 덥지도 차지도 않아서 입으로 토해 내기 딱 알맞은 이 시대의 미지근한 자들이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림으로써 문을 닫아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그나마 남아 있던 문들까지 닫히고 있다. 이방인들의 죄가 충만해짐에 따라(롬 11:25) 마지막 남은 문들마저 닫히게 되면 교회 시대는 막을 내릴 수밖에 없다. 문이 마냥 열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구원받은 성도가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이든지, 지옥으로 던져질 죄인이 복음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이든지 때가 되면 그 문은 닫히게 되어 있다.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으리니』(눅 13:25).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죄인들이여,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서둘러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여, 마지막 기회마저 사라지기 전에 주님께서 열어 주신 문으로 들어가 신실하게 복음을 전파하라. 문이 닫힐 때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본향으로 부르실 그때까지 우리를 위해 열어 놓으신 문이 무엇이든지 간에(고난과 박해가 있다 해도) 그 안으로 들어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 엉덩이를 발로 차서 억지로 그 문 안으로 우리를 밀어 넣어 주시기를 기다리지 말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들어가 주님께서 지시하신 일을 신실하게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