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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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주의 vs. 계약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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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6월호>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위대함을 입증할 때 종종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성경은 약 40여 명의 각각 다른 신분의 사람들이 약 1500년의 기간 동안 여러 가지 다른 상황 속에서 기록한 것이지만 66권의 모든 성경이 한 주제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영감성을 믿는 사람들이나, 성경을 연구하는 성경학도는 모두 이 말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일관된 주제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서로 동의하지 못하는 두 개의 커다란 상반된 주장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의 주제가 구속이냐, 아니면 왕국이냐 하는 문제이다.
이 두 가지 주장은 신학체계가 계약신학(契約神學)이나 세대주의로 구분되는 주된 논점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신학체계 모두를 “보수주의”라는 틀 안에서 받아들이고 상호보완하며 발전된 신학을 향해 나아가자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서로 다른 이 주장들은 결코 서로 일치할 수 없으며, 나머지 하나가 맞다면 분명히 둘 중의 하나는 틀린 이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는 가운데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의 주제를 발견하여 틀린 이론을 과감히 던져버리고, 계시된 진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행하여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이 되어야 한다(딤후2:15).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경의 주제는 왕국이다. 이 왕국은 하나님께서 태초이래로 꾸준하게 관심을 갖고 계시던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왕국을 이룩하시고자 일하셨고, 사탄의 끊임없는 방해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그 계획하신 왕국을 이룩하실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역사하시어 각 시대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구원하기도 하시고 벌하기도 하시며 하나님의 섭리적 계획을 나타내신다. 이것이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이다.
이 왕국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신정통치의 왕국”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구약에서 지속적으로 예언된 왕국이며, 이 왕국은 마태복음에서 “천국”(kingdom of heaven)으로 제시되었고, 그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

1. 성경의 주제를 구속으로 보면...

계약신학자들이 성경의 주제를 “구속”으로 볼 때, 성경 전체에 대해 갖는 관점은 “창조-타락-구속”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모든 만물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는데, 인간의 타락으로 모든 것이 망가졌고, 이 타락의 모습은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으며, 이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 분을 통해 만물을 구속하신다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이 성경의 핵심이 된다면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계획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예표”였을 뿐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고 보게 된다. 그들의 역사관은 “창조-타락-구속”이며, “구속”은 완성이기 때문에 그 이후에 더이상의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두 개, 곧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나누는데, 타락 이후에 주어진 은혜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계약이다. 그 언약은 창세기 3장에서 “그녀의 씨”를 언급한 것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이후에 주어진 모든 언약과 모든 사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위한 언약과 예표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구속하신다는 것은 사실이다. 실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재림하셔서 인간뿐 아니라 모든 만물을 회복하실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계약신학자들이 그 구속을 “십자가”에서 이루신 인간 구속을 중심으로만 생각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의 모든 부분을 십자가에다가만 초점을 맞춘다. 그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또한 크게 부상하게 된다. 그 분의 구속받은 성도인 교회는 예수님과 더불어 성경의 큰 주제가 되어 성경의 모든 부분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촛점이 맞추어진다.
이들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성도들이 이미 십자가의 피로 구속받았기 때문에 만물은 바로 그 성도들을 통해 회복되어야 한다는 후천년주의적 사고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이 구속받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형대로의 회복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 된다. 재림이라는 것은 “구속”을 위한 또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없으며, 모든 문제의 해답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그 말씀 안에서 발견된다.
이스라엘은 교회를 위한 예표일 뿐이고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약속과 축복은 교회를 통해 성취되므로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그 분의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구속”이라는 성경의 전체 주제 속에서 다루어진다.
그러나 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모든 시대에 걸쳐 구원받는 방법이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이 갖는 교회시대의 구원관은 비교적 정확하다. 그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행15:11). 여기에는 어떠한 행위도 필요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엡2:8). 성도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정결케 되어 구원받으며, 한번 구원받은 성도는 결코 그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것은 신약시대의 올바른 구원교리이다.)
문제는 그들이 이러한 구원방법을 모든 시대에 동일하게 적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노아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앞으로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많은 사건들이 십자가의 “모형”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모형”이 그들을 “구원해” 준 것은 아니다. 구약시대의 어느 누구도 그 모형”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단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들을 “지켜 행함으로” 구원받았을 뿐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이브는 “여자의 씨”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받았다. 그 씨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씨가 어떻게 그들을 구원할 것인가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언약”만 받았을 뿐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은 알지 못했다.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받고 방주를 지어 구원받았다. 성경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히 11:7), 그가 가진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었다. 그는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구원받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을 두려움으로 믿고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구원받은 것이다.
아브라함도 십자가를 바라보고 구원받지 않았다. 그는 단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고향에서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함으로 복을 받았다.
모세에게 있어서 이것은 더욱 분명하다.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이나 레위기의 제사법이나 신명기의 여러 규율들에서 십자가의 은혜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모세도, 그 이후의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율법 아래 있었고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만 했다. 율법을 모두 지키지는 못하여 범죄 하였을지라도 그들은 속죄하는 짐승의 피로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아야 했다. 이 짐승의 피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 했을지라도 그것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아니었다. 그들은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았고 율법을 지켰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는 것은 오직 교회시대에 한정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고, 또 몸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 속에서 움직인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릴 것이다. 하지만 교회시대는 곧 끝나고, 하나님께서는 다른 경륜으로 다른 세대들을 경영하실 것이며, 그에 따라 구원받는 방법 역시 달라진다. 앞으로 있을 환란시대에는 믿음과 더불어 행위가 필요하며(계12:7), 천년왕국시대에는 구약의 율법보다 더 엄격한 왕국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마5:20).

2. 성경의 주제를 왕국으로 보면...

구약의 많은 부분들은 그리스도와 그 분의 교회에 해당하는 모형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어떤 부분은 대환란을 직간접적으로 말하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적그리스도를 말하기도 하며, 어떤 부분은 신약성도가 아니라 환란성도를 예표하며, 어떤 부분은 천년왕국을 예표한다. 오히려 십자가보다는 재림과 영광이 더욱 두드러지며, 교회라는 유기체보다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부각된다. 오히려 교회는 성경 전체의 맥락으로 볼 때 일부분일 뿐이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왕국을 중심으로 일관되게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의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을 때 그 곳은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아름다웠다. 그러나 사탄의 타락으로 피조세계는 흔들렸으며, 그 때부터 사탄은 하나님과 분리된 또 하나의 세력을 갖기 시작했고, 하나님과 사탄의 길고 긴 전쟁이 시작된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승리하실 이 전쟁은 사실 전쟁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사탄이 방해하다가 마지막에 멸망당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편에서 볼 때는 이것은 아주 무서운 영적 전쟁이다. 루시퍼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통해서 그 분의 왕국을 이루려 하셨고, 사탄도 인간을 통해서 자신의 왕국을 세워 하나님의 뜻을 무너뜨리려 한다. 이것은 단지 신약성도들이 겪는 “영적전쟁” 이상의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창조 이래 전역사에 걸쳐서 자신의 왕국을 세워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하는 사탄의 방해이다.

아담 성경의 주제가 왕국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신 최초의 명령에서도 발견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시 채우고 그것을 정복하라. 그리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여기에 인간 창조의 목적이 나오는데(창1:26),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 분의 왕국을 다스리라고 하시는 “왕국위임”의 명령이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소위 “문화명령”이 아니다.) 아담의 통치 범위는 주로 “땅”이었는데, 아담이 타락한 후에 “땅”은 더이상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창3:17-18). 창세기 4:17에서 카인은 “도성”(도시)을 세우는데, 그와 그의 자손들은 인간통치의 범위를 구성해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려 한다.

노아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타락으로 홍수를 일으키신 다음 이 땅을 다스릴 다른 한 사람을 택하셨는데, 그는 노아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도 “통치”를 위임하셨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시 채우라. 너희를 두려워함과 너희를 무서워함이 땅의 모든 짐승들과 공중의 모든 새들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과 바다의 모든 고기들에게 미치리니, 그들이 너희 손에 넘겨졌음이라』(창9:1-2). 한편 노아 이후에 사탄은 함의 후손 중에서 님롯을 일으켜 “왕국”을 세우게 했다. 『그의 왕국의 시작은 시날 땅에 있는 바벨과 에렉과 악캇과 칼네에서였으며』(창10: 10).

아브라함 이때부터 인간들은 본격적으로 “왕국”을 세웠고, 그 왕국들은 하나님의 뜻을 대적했으며,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라는 또 한 사람을 택하셔서 그 분의 통치를 이루려는 계획을 세우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며 네게 복을 주고 네 이름을 위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되리라』(창12:2).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한 위대한 민족을 약속하셨다. 노아 때처럼 모든 인류를 심판하시는 대신 이번에는 한 민족을 택하셔서 그 민족을 통해 모든 나라들에 자신의 통치를 펼치고자 하시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그 민족은 하나님의 통치가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민족이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땅을 약속하셨다. 『그 날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언약을 세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땅을 이집트 강에서부터 큰 강 유프라테스까지 네 씨에게 주었으니...』(창15:18). 민족이 이루어졌고, 영토가 확정되었고, 주권은 여전히 하나님께 있는 분명한 “왕국”이었다.
신정통치에 대한 반역 이 “왕국” 은 하나님의 신정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으로서, 출애굽 사건으로 이스라엘은 정식으로 민족이 되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의 역사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벌받고, 다시 회개하여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하는데, 갑자기 반란이 일어난다.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법도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제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상8:5). 이들은 단순히 사무엘에게 반역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반역했다(삼상 8:7). 사탄은 이제까지 해온 것처럼 하나님의 왕국을 무너뜨리고자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닌 다른 왕을 구하게 했다. 그 왕은 적그리스도의 모형인 사울이었다.

다윗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지신 그 분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 분은 자신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을 기름부어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릴 왕으로 삼으신다. 그리고 그에게 매우 중요한 언약을 하신다. 『네 연수가 차서 네가 네 조상들과 함께 잠들 때, 내가 네 몸에서 나올 네 씨를 네 뒤에 세우고, 그의 왕국을 견고하게 하리
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한 집을 세울 것이요, 내가 그의 왕국의 보좌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네 집과 네 왕국이 네 앞에서 영원히 서리라. 네 보좌가 영원히 서리라』(삼하7:12-16). 이 언약은 신정통치 왕국의 절정을 약속한다. 그것은 메시야 왕에 대한 예언이다. “한 집을 세울 것이요”(13절)에서 “집”을 성전 건축 정도로만 제한적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집”, 곧 이스라엘 왕국을 의미한다(렘31:31).
다시 말해서 이 언약은 신정통치의 왕국을 다스릴 강력한 한 왕,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세주 되시고 교회의 머리 되시는 분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이스라엘 왕국의 왕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그의 왕국의 보좌는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약속하셨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차례 반역하여서 하나님께 징벌을 받고, 그 반역이 극심해서 그들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지만(롬11:25),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영원한 약속대로 그들을 회복시켜 그들의 왕국을 견고하게 세우실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왕이신 그리스도 구약의 역사서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특히 유다 왕국을 어떻게 다스리셨으며, 또 인간들의 죄성과 사탄의 방해로 그 왕국이 어떻게 실패되었는지를 자세히 볼 수 있다. 그 역사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신정통치국가의 역사이다. 그들이 실패하는 동안도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 왕국의 회복을 예언하셨다. 그 예언들은 주로 이스라엘의 회복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왕에 대한 예언인데, 그 안에는 물론 그 분의 초림과 구속사역에 대한 예언도 있지만(사7:14; 53장),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나타나는 그 분의 심판과 의로운 통치를 다루고 있다(사 11장; 13:9,10; 26 :1, 40:1-5, 시24:7-10).

왕국과 예수 그리스도 성경의 주제가 왕국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 전파하기 시작하여 말씀하시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시더라』(마4:17).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었다. 이 “천국”은 구약에서 그렇게도 예언했던, 메시야 왕에 의해 다스려지는 “신정통치의 왕국”이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 왕국의 증거자가 되신 것이다. 이 왕국은 “다윗의 보좌”로 표현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무엘하 7:12에서 예언된 것처럼 다윗의 씨로 오셨으며(마1:1, 눅1:31-33), “다윗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으셨고(마9:27; 15:22), 다윗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호산나 찬미를 받으셨다(마 21:9). 예수님은 다윗 왕국의 보좌의 정통성을 가지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이 왕국복음(천국복음)을 지속적으로 전파하셨으며, 제자들에게도 이스라엘 집에 한정된 천국복음을 전하라고 위임하셨다(마10:5-7).

신비 속에 감추어진 왕국 하지만 이스라엘이 그 메시야 왕을 거부함에 따라 천국, 즉 신정통치의 왕국은 신비 속에 감춰지게 되고(마 13장), 이 기간 중에 비로소 교회가 드러나게 된다. 복음서들은 아직 구약적 상황 하에 있고, 사도행전은 교회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이기에, 물론 이 책들에도 신약적인 복음이 있지만, 신약적인 복음이 본격적으로 계시되는 것은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에 의해 기록된 바울서신에서이다. 여기서 만큼은 주제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구속”이다. 이것은 교회시대를 겨냥해 기록된 성경으로, 교회와 십자가, 구속에 대한 무한한 진리가 있다. 지금은 교회시대이므로 바울서신에서 발견되는 은혜의 복음 안에만 머물러 있어도 구원받기엔 충분하고, 구속에 관한 진리를 얻기에도 충분하다.

환란 이후의 천년왕국 그러나 히브리서로 넘어가면서 환란기간 중의 유대인을 다루는 내용이 발견되고 일반서신을 지나 요한계시록에 이르면 본격적인 환란시대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고 선지자들이 그렇게도 예언했던 신정통치의 왕국, “천년왕국”이 도래한다. 그 후에는 영원세계가 도래하는데, 이렇게 보면 성경에서 교회시대는 너무도 적은 부분을 차지한다. 비록 교회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되어 있었다 하더라도(엡1:4), 그것이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계시되는 부분은 바울서신서에 한정된다. 다른 성경들에서도 교회에 대한 많은 “암시”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바울서신을 제외한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신정통치의 “왕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심지어 교회시대의 교리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로마서에서조차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현명하다고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는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고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와 같이 “구원자가 시온에서 와서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제거하리라. 이는 내가 그들의 죄들을 없앨 때 그들에 대한 나의 언약이 이것임이니라.” 함과 같으니라』(롬11:25-27).

이스라엘의 구원이란 그들이 구원받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구약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하나의 “왕국”으로서 회복을 받는 것이다. 이 완전한 왕국이 이르면 자연도 회복된다. 이사야 11:6-8에서는 이 사실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으며, 바울도 로마서 8:19-23에서 이 사실을 증거한다. 교회는 성경 전체의 역사 속에서 괄호로 묶인 특수한 부분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에 대해서 특별한 경륜으로 인도하신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교회시대에도 교회의 경륜에 맞추어서 성경의 모든 부분들을 해석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비단 교회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도 2000년이 넘는 방황과 고난 속에서도 자기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선민사상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 지금은 교회시대인데도 그들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서 올바로 해석하고 올바로 적용시키지 못한 데서 나온 현상이다.
전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시대에 따라 다르게 경영하시는 경륜들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교회의 경륜으로 성경 전체를 덮어버리게 되든가 또는 왕국의 경륜으로 교회를 덮어 버리게 된다. 후자의 예는 우리가 종종 볼 수 있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가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심지어 자연환경에까지 전 영역에 걸쳐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직접 의로 통치하시는 천년왕국 때에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고, 그 이전에는 인간의 죄성 때문에 “아름다운 사회”로의 회복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성경 해석은 심지어 왕국에 주어진 권세를 교회에 주어진 것으로 착각하여 교회의 세력으로 세상을 통치하려는 로마 카톨릭 교리와 칼빈의 제네바 개혁을 낳기도 한다.
성경의 예언을 올바로 알게 되면 이러한 혼란을 피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야 할 필요성을 강력히 느낀다.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면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각각의 경륜들의 차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또 그 경륜들을 자세히 공부하면 전체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목적은 “왕국”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구약에서 무수히 예언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되며, 신약에서도 복음서에서 나타났다가 2000년을 뛰어 넘어 요한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
교회의 경륜 속에 나타난 “구속”을 가지고 성경 전체에서 나타난 “왕국”을 덮어버리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초림만을 강조하고 재림을 무시하여 그 결과 성경의 4분의 3을 덮어버리게 되는 것과 같다. 유대인들이 재림만을 강조하고 초림을 무시했듯이 그들은 초림만을 강조하고 재림을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교회시대라는 매우 복된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에는 하나님의 경륜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맞추어져 있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가 될 수 있어 영적인 축복뿐만 아니라 주님과 함께 “왕국”에서 통치할 권세까지 얻는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를 중심으로 왕국을 덮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이제 곧 교회시대가 종결될 것이고 그에 따라 하나님의 경륜도 바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더욱 공부하여 주님께서 이루실 그 영원한 왕국의 소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어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 예언의 말씀을 주의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벧후1:19).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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