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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의 제사장직과 붉은 암송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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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2년 04월호>

(민수기 17-19장)

민수기 17장은 16장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16장에서 코라가 일단의 무리와 더불어 반역하다가 멸망을 당했고, 그의 반역 자체가 제사장직에 대한 도전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아론의 제사장직을 확정지어 주신다.


1. 아론에게 제사장직을 확정하심(17:1-18:7)


1) 지팡이의 증거(17:1-13)
확정지어 주시는 방법은 지파별로 하나씩 막대기를 취하라는 것이다(2절). 레위 지파의 막대기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고, 다른 지파의 막대기에도 대표되는 고관들의 이름을 썼다. 그 막대기들은 성막 안에 두었으며, 이튿날엔 아론의 막대기에서만 움이 돋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아몬드 열매들이 열렸다(8절). 죽은 막대기에서, 그것도 하루 만에 “열매”까지 맺혔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로서 아론의 제사장 직분을 확정시켜 주신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일은 레위인 가문들 중에서 아론 가문을 확정짓는 문제가 아니었다. 코라가 제기한 문제는, 자기도 레위인(코핫 자손)인데 왜 아론뿐이냐는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주제넘은 문제 제기에는 일일이 답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를 위한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써 넣으라고 하셨던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마음속에 아론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이 일은 문제 제기를 할 것이 아니라 당연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었다.
한편 이 경우에 있어 아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 직분이 대제사장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그의 막대기에서 싹이 났다는 것 또한 그렇다. 죽은 나무에 움이 돋는 것은 분명 죽음 가운데 생명이 임했다는 것이다.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하셨다. 그분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완벽하신 대제사장의 모습을 보이셨다. 즉 “죽으심으로써” 대제사장 사역을 이루셨고(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대제사장), “부활로써” 위대한 대제사장이심이 선포되었다(히 7:25). 히브리서에서는 그분이 “살아 계시는 것”이 대제사장의 중요한 요건이라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구약 제사장들은 죽음으로 그 직무를 계속할 수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 사역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마찬가지로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언약궤에 넣어져 보관되었다. 그 생명이 하나님 안에서 계속되기 위해 그랬던 것이다.

2) 아론에게 제사장직과 레위의 보조를 주심(18:1-7)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 『너와 네 아들들은 너와 함께 너희 제사장 직분에 대한 죄악을 담당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1절). 아론 가문은 속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레위인들은 성막의 책무를 담당한다(3절). 이들의 “책무”는 민수기의 앞부분에서도 언급했듯이 성막의 기구들을 옮기는 등의 봉사다(민 3:28,32,38). 아론과 그 아들들(제사장들)은 성소와 제단의 책무를 이행해야 하는데(5절),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제사장들을 포함한 레위인들의 책무를 구분해 주셨다. 그렇게 할 때 이스라엘에는 어떤 진노도 없을 것이다(5절). 이와 같이 권위에 따라 질서대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지 않으시며 온전히 복을 주실 것이다. 그러니까 코라의 문제 제기에 대한 대답이 18장에서 제공되는 것이다.
이 경우 레위인들에 대해서는 『너에게 합세하게 해서 너를 섬기게 하고...』라 말씀하며(2절), 『주를 위한 선물로 너희에게 주어..』라고 말씀한다(6절). 말하자면 레위인들은 “예배 보조자들”이라 할 수 있겠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는 있지만, 실제적인 견지에서 오늘날도 예배를 돕는 여러 손길들이 있다. 그들의 역할이 크든지 작든지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성결해야 한다. 레위인들도 역할이 크든 작든 성결해야 했다. 주의 일을 맡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어떤 형태로든 주의 봉사를 맡은 자들에게 실제적인 적용이 될 것이다.
7절에서는 제단과 성소에 관련한 직무에 대해서 『접근하는 다른 사람은 죽일지니라.』고 말씀한다. 이는 지극히 구약적인 명령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섣불리 신약에 적용하면 안 된다. 신약에서는 거듭난 모든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이다(벧전 2:9). 신약에서 목사들은 전임사역자일 뿐이다. 그들은 회중들에게 영적 양식을 제공하여 양육하고 지역 교회를 이끌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임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면에서 회중들은 목사들을 따라야 한다. 이것이 지역 교회의 질서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문제에 있어서는 목사와 회중들 간에 어떠한 구별도 없다. 누구나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 죄사함을 받을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무엇이든 하나님께 직접 얻을 수 있다. 구약 동물의 피들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성취되었지, 성직자들 안에서 성취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마 27:51).


2.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유업(18:8-32)


1) 제사장의 유업(18:8-19)
이스라엘에게 있어 유업이란 소산을 취할 수 있도록 주시는 땅이다. 이스라엘 각 지파는 땅을 할당 받아서 그들의 삶을 영위했다. 그러나 레위인들은 땅의 유업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성전에 봉사하는 것으로 먹고 살아야 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유업인 것이다(민 18:20, 신 10:9).
제사장들의 경우, 제물로 바쳐진 것들이 그들의 몫이 된다(9절). 이것은 거룩한 곳에서 남자들이 먹어야 한다(10절). 물론 모든 제물을 제사장들이 먹는 것은 아니다. 번제나 속죄제의 경우는 온전히 태워져야 했으므로 제사장이 먹을 것이 없다. 이것은 화목제의 경우이다(레 7:11-21).
11절에는 흔드는 제물과 들어올리는 제물이 있는데, 이 역시 화목제이며(레 7:28-34), 이러한 일반적 헌물은 들어올려 드린 후 가족 모두 먹게 된다. 기름과 포도주와 밀 등 첫열매는 제사장 가족이 먹게 된다(12-13절). 동물이나 사람의 첫태생들은 경우마다 다르다(15-17절). 사람이나 불결한 짐승들은 대속할 것이며, 소나 양이나 염소는 제단에 바쳐야 한다. 이 경우 이 짐승들의 고기는 제사장들의 몫이다. 여하튼 모든 들어올리는 제물들은 제사장 가족에게 주어진다. 이것을 “소금의 언약”이라 말씀한다(19절). 소금의 맛처럼 영원히 변치 않는 확실한 언약이라는 말이다.

2) 레위인들의 유업(18:20-32)
레위인이 받을 유업은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이 바치는 십일조다(21절). 하지만 십일조 중에 십분의 일은 들어올리는 제물로 바쳐 제사장에게 드려야 한다(26,28절). 제사장들은 레위인들을 통해 백성의 십일조를 받는 것이다.
제사장(혹은 레위인)이 무엇을 받든지 그것은 그들에게 “타작마당의 곡식과 포도즙틀에 충만한 것”(27,30절), 즉 풍성한 수확물과 같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드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풍성함으로 갚으실 것이다(말 3:8-11. 느 13:10-12 참조).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헌물에 있어서 “가장 좋은 모든 것”을 드리라고 말씀하신다(29,32절).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헌물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 헌물들을 실제적으로 받는 것은 사람(레위인, 제사장)일지라도, 드리는 자들로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3. 붉은 암송아지와 성별의 물(19장)


1) 붉은 암송아지의 규례(1-10절)
민수기 19장에는 붉은 암송아지라는 특별한 제물에 대한 규례가 나온다. 이 암송아지는 누군가 불결하게 되었을 때 그를 정결케 하기 위한 “성별의 물”을 만들기 위해 사용된다.
먼저 점도 흠도 없는,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준비한다. 그 송아지는 진영 밖에서 잡아야 하며, 잡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잡을지라도, 제사장 엘르아살이 그 피를 찍어 회중의 성막 앞을 향해 일곱 번 뿌린다(3-4절). 또 그 암송아지는 가죽, 고기, 피, 똥 등 모든 것을 불사른다(5절). 여기서 진영 밖에서 잡는다는 것을 통해 그 암송아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영 밖에서 죽으셨으며(히 13:12), 그곳은 제물들의 재를 처리하는 곳, 더러운 똥을 처리하는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처럼 더러운 모습으로 취급받으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죄가 되시고(고후 5:21)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다(갈 3:13).
그리고 제사장은 백향목과 우슬초와 주홍색 실을 암송아지와 함께 불태우는데(6절), 여기서 백향목과 우슬초는 정결을, 주홍색실은 보혈을 상징한다. 또 암송아지를 태운 그 재는 진영 밖 깨끗한 곳에 쌓아 두어 “성별의 물”을 위해 간직한다(9절). 이 경우 송아지를 불태운 사람과 제사장은 둘 다 저녁까지 불결하게 된다(6-7절).

2) 성별의 물(11-22절)
이제 암송아지의 재를 가지고 성별의 물을 만든다. 이 재를 흐르는 물에 섞어서 만들게 되는데(17절), 이 물을 우슬초로 찍어 불결한 사람에게 뿌리면 그가 깨끗해진다. 그러니까 붉은 암송아지는 직접적인 희생제가 아니라 “성별의 물”을 만들어 정결케 하기 위해 드려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불결하여 이 물을 뿌려야 하는가? 사람의 시체를 만진 사람은 7일 동안 불결하다(11절). 시체가 있는 장막 안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과 그 장막에 있는 모든 사람도 7일 동안 불결하다(14절), 또 뚜껑을 덮지 않은 그릇(15절), 들에서 살해된 자나 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진 자도 7일 동안 불결하다(16절). 이런 사람들뿐 아니라 그 집과 그릇 등에게 셋째 날과 일곱째 날, 두 번에 걸쳐서 성별의 물을 우슬초에 찍어 뿌리게 된다(18-19절). 만약 셋째 날에 뿌리지 않으면 일곱째 날에 정결케 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두 날 모두에 뿌려야 한다.
정결케 한다는 의미에서 이 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러나 죄 자체를 제거한다기보다는 불결한 자들을 정결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시된 불결들은 도덕적인 죄들이 아니다. 비록 이러한 행위에서 정결케 되지 않으면 “주의 성막을 더럽힌 것”으로 취급되긴 하지만(13절), 이것은 어디까지나 의식적인 불결이지 도덕적인 불의가 아니다. 따라서 죄 자체를 씻어 주는 그리스도의 피라기보다는 우리를 지속적으로 불결케 하는 각종 세상의 때들을 정결케 하는 “말씀”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결케 하는 물이기 때문이다(엡 5:26).
또한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은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갖고 있다. 예언에 있어서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은 같은 날이다. 하루가 천 년 같은 체계에 따르면(벧후 3:8), 일곱째 날은 세상이 창조된 이후로 일곱 번째 천 년이다. 즉 천년왕국인데, 이는 재창조주간 7일 중 마지막 일곱째 날의 안식과 통한다. 셋째 날은 그리스도께서 거절당하신 이후로 셋째 날인데, 이 역시 십자가 이후의 세 번째 천 년으로서 천년왕국이다. 즉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은 모두 재림의 날을 강조한다. 물론 민수기 본문은 재림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연결시킨다면, 주께서 재림하시어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는 것과 연결시킬 수 있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재림하실 때 이스라엘의 죄들을 정결케 하실 것이다(렘 31:31-34). 물론 그것은 대환란의 심판을 거친 후이다.
본문에서 특이한 사실이 있다. 불결한 자들에게 물을 뿌리는 것은 “깨끗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 깨끗한 자들이 성별의 일에 참여하여 불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단 암송아지를 태우는 자와 제사장이 저녁까지 불결해진다(7-8절). 그들은 물로 옷을 빨아야 한다. 또한 암송아지의 재를 모은 사람도 저녁까지 불결하다. 그도 옷을 빨아야 한다(10절). 성별의 물을 뿌린 자도 저녁까지 불결하여 옷을 빨아야 한다(21절). 왜 이와 같이 성결의 일에 참여한 사람이 불결해져야 하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인해 불결해지셨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본문의 주제에 있어서, 정결케 하는 말씀이나 재림 때의 정결 등 다양한 적용을 할 수는 있어도, 정결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정결케 하셨는데, 그때 주님은 우리로 인해 더러워지셨다. 이것은 “전가”(imputation)의 교리다. 우리의 죄를 가져 가시고, 그분의 의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한편 붉은 암송아지는 현재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다. 유대인들 중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려는 자들은 이미 성전 건축 재료 준비를 다 마쳐 놓고, 희생제를 드릴 준비를 하고 있다. 예언에 따라 대환란 때엔 성전이 세워질 것이므로, 현재 유대인들이 성전 재건 준비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관찰 요소이다. 그런데 그들은 붉은 암송아지를 갖추지 못했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붉은 암송아지가 출현했다, 아니다, 가짜다 등 여러 주장들이 오갔는데, 어쨌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민수기 19장의 이 붉은 암송아지가 빨리 나타나야 성전과 희생제에 관한 모든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틀렸다. 본문에서 붉은 암송아지는 몇 가지 경우에서 정결케 하는 요소가 되지, 희생제의 속죄 자체로 쓰이는 것이 아니다. 현재 유대인들은 아무리 “정통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성경에 무지하다. 그들은 붉은 암송아지뿐 아니라 성전 건축 및 율법 준수에 있어서도 구약 성경적으로 지키지 않는다. 대신 탈무드적 전통만을 지킬 뿐이다(본지 239호, 『특별기고: 회복된 성전과 천년왕국 성전』 참조). 결국 그들의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그들은 적그리스도를 위한 성전을 만들고야 말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 사역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십자가의 보혈이 정말 필요한 사람들이다. 지금 그 보혈을 신뢰하지 않으면, 대환란을 통과하면서 극심한 고통중에 불로써 정결케함을 받게 될 것이다.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하루라도 빨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받아들여 정결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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