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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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8 - 토기장이의 표적과 예레미야의 박해 (예레미야 18-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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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0년 08월호>

13장부터 예레미야는 표적들을 사용하여 예언하기 시작한다. 13장에서는 베띠의 표적을, 16장에서는 결혼하지 않는 표적을 통해 예언했으며, 여기 18-19장에서는 토기장이와 그 그릇을 표적으로 사용하여 예언을 한다. 그리고 이 예언들은 모두 유다의 심판과 멸망에 대한 표적들이다.

1. 토기장이의 표적(18-19장)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집으로 가서, 토기를 만들기도 부수기도 하는 토기장이를 본다(18:2-4). 토기장이는 진흙을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만들며, 필요없으면 부수고 새로 만들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표적을 통하여 그분 원하시는 대로 민족들을 다루실 수 있음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이 표적에서 핵심은 『그 그릇이 그 토기장이의 손에서 손상을 입었으니』(4절)라는 부분이다. 손상을 입은 그릇은 이스라엘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진흙이며 그것으로 좋은 그릇을 만들었는데 이제 그 그릇을 깨버리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 구절의 뒷부분을 보니, 그 토기장이는 먼저 그릇을 대신하여 새로운 그릇을 다시 만들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해 그들을 심판하시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 자체가 없어져 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더러워졌다고 그분의 일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들은 심판받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심판 후 새로워진 이스라엘을 통해 그분의 일을 이루실 수 있다. 과거 출애굽 때에도, 출애굽 당시 세대가 범죄하여 멸망했지만 그 다음 세대를 통하여 그분의 목적을 완수하셨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이스라엘 대신에 신약의 교회를 통해서 그분의 뜻을 이어나가기도 하신다. 오늘날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그 누구라 할지라도 그가 그분의 뜻에 합당치 않으면 언제라도 다른 일꾼으로 바꿔 버리실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토기장이의 권리인 것이다. 문제는 그 버림받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든 그분의 일을 이뤄나가시겠지만, 그 버림받은 자는 그분의 일이 성취되는 기쁨을 함께 누릴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혹은 우리에게) 떨어져 나가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이다. 토기장이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그릇은 그 상태에 따라서 쓰임받든지 못받든지 할 수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 그릇의 상태에 달린 것이다. 그래서 18:7-10에서는, 하나님께서 한 민족을 멸망시키겠다 하셨어도 그들이 돌이키면 하나님께서도 그 재앙에서 돌이키시며, 한 민족을 세우겠다 하셨어도 그들이 악을 행하면 그 복에서 돌이키시겠다 말씀하신다. 니느웨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통해 멸망을 선포하셨지만 그들의 회개로 인해 용서해 주시기도 하셨다. 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이 지속적으로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행한 지속적인 범죄로 인해 결국은 버림받게 되었다. 결국은 그 "그릇"의 상태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돌이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가서 고하여 말하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재앙을 만들고 너희에게 한 책략을 마련하노니 너희는 이제 각기 자기의 악한 길에서 돌이켜 너희의 길과 행위를 선하게 하라』(18:11).
특별히 이 표적은 로마서 9:21과 더불어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 잘 사용하는 비유이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하나는 귀한 그릇을, 하나는 천한 그릇을 만들 권리가 있듯이, 하나님께서도 그분의 주권으로 어떤 사람은 영원 전부터 구원받을 자로, 어떤 사람은 영원 전부터 멸망시킬 자로 선택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문은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니다. 문맥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죄와 연관된 것이고, 그것도 그들의 상태가 조건인 것이다. 이외에도 성경에서 토기장이와 연관된 비유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전적인 권리와 능력, 혹은 그분의 심판을 보여 준다(시 2:9, 사 29:16; 30:14; 41:25). 하지만 하나님의 이 모든 심판이 무조건적인 경우는 없다. 그들이 잘못했을 때 심판하시는 것이다.
19장에서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옹기병 하나를 가지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들의 어른들 일부와 함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간다. 거기서 그 병을 깨뜨리며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한다(19:1-3,10).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는 2절에 설명하는 그대로, 예루살렘 동문 입구 옆에 있는 골짜기다. 여기에서 그들은 가증한 우상 숭배 행위를 하였으며, 그 제단을 꾸며 놓은 곳을 토펫이라고도 불렀다. 이 제단에서는 특히 아이들을 바알에게 제물로 바치는 사악한 종교 행위가 행해졌다(렘 7:31; 19:5).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제사장들이 이곳에 왔을 때, 그들은 이 장소가 어떤 장소인지 잘 알았을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옹기병을 깬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왜 그들에게 임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보여 주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에 바알의 제단이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요, 인신제사가 있어서는 더더욱 안 되는 것이다. 그곳은 우상 숭배의 제단일 뿐 아니라 살육의 제단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심판 날에 그곳을 "살육의 골짜기"로 삼는다 하셨다(19:6). 얼마나 큰 살육이 있는지, 『매장할 자리가 없을 때까지 그들을 토펫에 묻으리라.』(19:11)고 말씀한다.
특별히 이 자리는 예루살렘 동문 곁에 있다. 동문은 왕의 문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들어오실 문이다. 지금 현재 예루살렘 성 동문은 막혀 있다. 우리 주님께서 그곳으로 들어오실 때 그 문은 다시 열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문 앞에 이러한 더러운 자리가 있다. 그러므로 그곳은 완전히 처리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 자리가 바로 살육의 자리가 되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인 것이다.
이곳이 살육의 골짜기인 것은 아마겟돈 전쟁과도 관련이 있다. 7절에서는 "그들의 시체들을 하늘의 새들과 땅의 짐승들에게 먹이로 주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요한계시록 19:17,18의 모습이기도 하다. 아마겟돈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 하늘의 새들이 와서 만찬을 벌인다고 기록되어 있다.

2. 거절되는 선지자(18,20장)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보내시는 처음부터 그가 백성들에게 거절당할 것임을 말씀하셨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분명 부정적인 것이어서 백성들이 싫어할 만한 내용이었다. 그는 입만 열면 죄와 심판을 선포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좀더 구체화되어 바빌론 포로를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이미 때는 바빌론의 느부캇넷살왕이 위협하기 시작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다의 멸망을 선언한다는 것은 단지 "죄짓지 말라"고 책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따라서 이때부터 예레미야는 구체적으로 미움받기 시작한다.

(1) 저주의 간구(18:18-23)
18:18에서 유대인들은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말자.』 하며 예레미야를 대적한다. 이때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간구하는데, 이 간구는 단순하게 자기를 대적들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차원 이상의 것이다. 그는 기도를 통하여 대적들을 거의 저주하고 있다(18:19-23). 『그러므로 그들의 자녀들을 기근에 넘겨주시고 칼의 힘으로 그들의 피를 쏟게 하시며 그들의 아내들로 자기들의 자식들과 사별하며 과부들이 되게 하시며 남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청년들은 전투에서 칼로 죽게 하소서』(21절), 『그러나 주여, 주께서는 나를 대적하여 나를 죽이려 하는 그들의 모든 계략을 아시니 그들의 죄악을 용서치 마시며 주의 목전에서 그들의 죄를 가리지 마시고 그 대신 그들로 주 앞에서 넘어지게 하되 주의 노하시는 때에 그들에게 이같이 하옵소서』(23절).
이 기도는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는 대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사랑의 하나님의 속성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의를 전하다가 박해를 받으면 상이 있기 때문에 기쁘게 견디고 오히려 원수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하건만 왜 선지자는 자기의 억울함을 이토록 토로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와 비슷한 기도가 시편에 많이 나온다. 소위 "저주 시편"이라 불리는 것들인데, 대표적인 것이 시편 109편이다. 이 시에서 다윗은 악인을 사탄에게 넘겨주고 있으며(6절), 빨리 죽게 해 달라고(8절), 그의 가족도 불행에 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9,10절). 시편 137:8,9은 『오 멸망할 바빌론의 딸아, 네가 우리를 대한 대로 네게 갚는 자는 행복하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집어서 돌에 메어치는 자는 행복하리로다.』라고까지 잔인하게 저주한다.
이러한 내용들은 종종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편협성 혹은 잔인성"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 아주 보편적이고도 정상적인 내용이다. 십자가의 사랑이 제시되기 전까지 하나님의 공의는 의인에 대한 복과 악인에 대한 저주를 통해서 드러났다. 구약적 유대인들에게 악인의 번영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크나큰 도전이었다. 그들은 간혹 악인이 의인을 박해하면서도 번영하는 것을 보아야 했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크나큰 고통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단순히 자기의 어려움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서 그 일을 이루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어디까지나 구약성경이다. 신약에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법은 이러한 저주를 뛰어넘는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용서하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공의의 법 자체가 변동된 것은 아니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은 예레미야나 다윗같이 기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분의 공의를 이루실 것이다. 다만 회개하는 자들은 용서하신다.

(2) 파술에 의한 감금(20:1-18)
토펫에서 심판을 선포한 예레미야는 성전으로 돌아와서, 성전 뜰에서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심판을 선포한다(19:14,15). 그러자 성전 관리장이었던 제사장 임멜의 아들 파술이 예레미야를 성전 옆에서 족쇄에 채워 감금한다(20:1,2). 이것은 예레미야가 정식으로 받는 첫 번째 박해이다. 비록 그 감금이 하루에 그쳤고 곧 풀려나긴 했지만, 본문 20장에는 그 박해를 받고 있는 예레미야의 고통스런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20:10-18). 이 부분도 18장에서 말한 저주의 간구와 유사하다. 『...그들이 크게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그들이 번성하지 못할 것임이니이다. 그들의 영원한 치욕이 결코 잊혀지지 아니하리이다』(11절).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다. 18장에서는 자기를 박해하는 악인들에 대한 저주가 더 강조되었다면, 여기 20장에서는 하나님의 승리를 더 강조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신뢰했으며, 그것으로 승리를 장담했다(11절). 또한 주께서 승리케 해주신 것으로 인해 찬양하기도 한다. 『주께 노래하라.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 이는 그분이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들의 손에서 건져내셨음이라』(13절).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박해받음에 대해 여전히 고통스러워 한다. 심지어 자신의 태어난 날까지 저주하는 모습은(14-18절) 마치 욥이 "내가 태어난 날과 ‘사내 아이를 배었다.’고 말했던 그 밤이 없었더라면"이라고 스스로를 저주하는 모습과 유사하다(욥 3:1-12). 이것은 대환란을 예표한다. 앞에서 "혼인하지 않은 선지자의 표적"(16장)에서 보았지만 대환란은 『그 날들에는 아이를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 있으리라!』(마 24:19)고 말해지는 기간이다. 해산의 고통으로 말해지는 기간이기도 하다. 또한 욥의 고통은 그 자체로 대환란을 예표하고, 예레미야에서 주로 예언하는 바빌론 침공 역시 대환란을 예표한다.
여기서 예레미야를 감금한 파술은 제사장이었다. 제사장으로서 그는 율법에 충실하고 하나님의 뜻에 민감해야 했지만 전혀 그렇지 못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지 못했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 하면서도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을 박해하는 거짓 선지자의 전형이다. 더욱이 그는 성전 관리장이었는데, 그렇다면 성전에서 드려지는 모든 경배 행위를 감독하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선지자와 그분의 말씀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그 드려지는 경배가 얼마나 헛되고 위선적인 일인지를 잘 보여 준다.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그 경배를 받지 않으셨을 것이며,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 교계는 하나님께서 부르시지 않은 가짜 일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큰 건물을 멋지게 관리하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책망을 무시하며 하나님의 참 일꾼들을 박해하는 파술 같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파술을 책망하시듯 그들 역시 책망하실 것이다.
예레미야는 파술이 바빌론으로 사로잡혀 갈 것이라 예언했다. 파술뿐 아니라 그의 식솔들과, 그와 함께 거짓을 예언했던 동료들도 마찬가지로 바빌론으로 잡혀가 거기서 죽을 것이다(20:6). 이에 예레미야는 파술을 "마골밋사빕"이라 불렀는데(20:3), "파술"이 "번영"을 의미하는 이름이라면 "마골밋사빕"은 "두려움으로 둘러싸였다"는 의미이다. 이 이름처럼 파술은 그의 평생에 번영이 없고 두려움에 둘러싸이게 될 것이다. 그는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분인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다른 모든 두려움으로 온통 둘러싸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거짓 선지자는 자기의 번영만을 위해 설교하다가 멸망한다. 반면 진정한 선지자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의를 전파한다. 예레미야는 주의 말씀을 전하다가 받는 고통이 너무 커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 하였지만, 『그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서 내 뼈들 속에 사무치는 타는 불 같아서 내가 참기에 지쳤고 견딜 수 없었나이다.』(20:9)라고 고백한다. 보통 예레미야는 고난의 선지자, 혹은 슬픔의 선지자라고 부른다. 동족으로부터 고난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를 완전히 주장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가 그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그의 속에서 타들어가는 갈망을 느낄 것이다. 어떠한 고난과 역경 가운데도 전파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속에서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력히 역사하기 때문이다. 예레이먀뿐 아니라 우리 앞에 있던 무수한 성도들이 그와 같은 심정으로 진리를 전파했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역시 주의 말씀이 불타듯이 우리 마음에 역사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참지 말고 전파하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인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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