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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언의 산봉우리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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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2년 06월호>
성경 이외의 다른 모든 경전들은 미래에 관한 예언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 만약 그 저자들이 미래의 사건들을 예언하려 했었다면 예언들이 성취되지 못함으로 인해 그들의 작품들은 신뢰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성취된 예언은 기적들 보다도 성경의 영감성과 확실성에 대한 더 강한 증거가 된다. 예언은 “대강 추측”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일기예보”처럼 불확실한 자료로 이루어진 확률도 아니다. 예언은 “미리 앞서 기록한 역사”이다. 혹자는 “예언은 역사의 주형틀이다”라고도 말한다. 성경의 예언을 연구하는 중요한 이유는 성경의 ⅔가 모형, 상징, 직접적인 진술로 된 예언들이며, 구약 예언의 ½ 이상과 신약의 거의 대부분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 사건들을 예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두운 세상이어서 베드로후서 1:19의 말씀처럼 우리들에게는 광풍이 부는 이 “노도의 시기”에 비춰 줄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필요하다. 그리스도께서 계시던 그 당시에도 종교 지도자들은 성경의 예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므로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 분이 그리스도인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시대의 기독교 지도자들도 성경의 예언에 관한 연구를 무시하고 거절한다면,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예비하지 못할 것이다.성경에는 분명하게 나타나는 “네 가지 예언의 기간”들이 있다.
1.족장 시대 - B.C. 1921-1491
2.모세 시대 - B.C. 1491-1370
3.유대인 시대
--- 바벨론 포로 이전 B.C. 900-600
--- 바벨론 포로 B.C. 600-500
--- 바벨론 포로 이후 B.C. 500-400
(400년간의 침묵 기간)
4.사도 시대 - A.D. 27-100
이 예언들은 자체적으로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1.과거 - 이미 성취된 예언
2.현재 - 성취되고 있는 예언
(이것들은 그 시대들의 유대인, 이방인들, 그리고 도덕적, 종교적 인물에 관한 예언들이다)
3.미래 - 성취되지 않은 예언
참된 예언이 되는 구성 요건은 다섯 가지가 있다.
1.예언은 그것이 성취되기 이전에 알려져 있어야만 한다.
2.모든 인간의 예견을 능가해야 한다.
3.아주 상세해야 한다.
4.예언자가 예언한 것이 성취되었는지는 충분한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알 수 있다.
5.그 예언의 성취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예언으로부터 “성경의 영감”에 대해 살펴 보는 가치척도는 “복식 확률”의 법칙을 공부해 볼 때 분명해 진다. 만약 내가 내년에 필라델피아에서 지진이 일어난다고 예언할 경우에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은 1/2이다. 만약 내가 지진이 7월4일에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할 경우 그 확률은 1/4로 감소된다. 또 거기에다 지진이 낮에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할 경우 그 확률은 1/8로 되며, 그리고 또 한가지 덧붙여 예언할 경우 그 확률은 1/16로 줄게 된다. 그리고 네번째 사실을 덧붙일 경우 확률은 1/32이 된다. 그러한 방법으로 10회를 거듭하면 그 확률은 1/1024이 될 것이다.
성경에는 구약 선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배반당하시고, 시련을 겪고, 죽으시고, 장사되는 것등을 예언한 25가지의 특정한 예언들이 있다. 이 예언들은 B.C. 1500년에서 A.D 30년 사이에 각기 다른 선지자들이 예언했으나, 24시간 내에 한 사람에게 그대로 성취되었다. “복식 확률”의 법칙에 따라 이러한 25가지 예언들이 예언대로 성취될 확률은 1/33,554,432이다. 혹자는 한 선지자가 어떤 일에 관해 몇 가지 예언을 할 경우, 다른 선지자와 모의함으로써 그 예언을 성취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세기(약 1700년)에 걸쳐 분포되어 있었던 많은 선지자들이 상세하고도 특정한 예언들을 했을 경우 그러한 공모의 책임은 성립될 수 없다. 하지만 무려 109가지 예언들이 육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실제적으로 성취되었다. “복식 확률”의 법칙을 이 숫자에 적용해 볼때 그것들이 한 사람에게 성취될 확률은 “수십 억 분의 일”이 된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죽음을 슬퍼하며 엠마오로 가고 있던 두 제자에게 그분이 “메시야”이심을 확신시키기 위해 동행하신 것도 예언에 대해 알리시기 위해서 였다.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부터 시작하여 자신에 관하여 모든 성경에 있는 것들을 그들에게 설명하시더라』(눅24:27). 우리가 그날 오후에 있었던 두 제자와의 대화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본다면 아마 매우 흥미롭고, 놀라울 정도로 유익한 기록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시련을 당하시며,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시던 그 전 주간에 일어났던 일들뿐만 아니라 그분의 부활에 관한 소문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메시야가 오실 때 그에게 일어나리라고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내용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보여 주신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성취된 예언들의 파노라마를 간단히 펼쳐보자. 메시야가 은 30에 팔리고(슼11:12), 친구도 그를 대적하며(시41:9),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고(슼 13:7), 불의한 증인이 그를 힐문하며(시35:11), 그를 참소한 자 앞에서 그 입을 열지 않을 것이고(사53:7), 매를 맞으며(사50:6), 겉옷이 나뉘어지고(시22:18), 원수들이 조롱하며(시22:7,8), 원수들이 쓸개를 주고, 초를 마시게 하며(시69:21), 뼈가 꺽이지 아니하고(시34:20), 범죄자와 함께 죽으며(사53:12), 그를 배반한 값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살 것(슼11:13)과 그분께서 부자의 묘실에 장사되어져야 함을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언했다. 메시야에 대한 “예언된 초상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된다. 창세기 22:7-8에서 이삭은 그리스도의 한 ‘모형’이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들은 아끼셨으나 그 분 자신의 아들은 아끼지 않으셨다. 그리고 “유월절” 절기를 살펴보면, 양을 굽기 위해 준비할 때 두 개의 불꼬챙이를 사용하여 하나는 몸통 속에 세로로 길게 찔러 불 위에서 지탱할 수 있게 하고, 또 하나는 양쪽 어깨를 가로로 찔러 돌릴 수 있게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 매달리신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또 내가 땅에서 들리우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어오리라』(요12:32)는 그 말씀을 상기시켜 준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놋뱀’에 관한 사건은 사람들이 죄로 말미암아 뱀에게 물려 구세주를 필요로 할 때 예수께서 땅에서 들리심으로 ‘놋뱀’의 역할을 하시고 믿음으로 그를 보는 자는 누구나 죄에서 구속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또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되지만 사흘 낮과 밤을 땅 속에 계시다가 부활하실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곧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고래 뱃속에 있었듯이 인자도 그처럼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의 심장 속에 있을 것이라』(마12:40).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에 예언을 알고 살펴본 사람이라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기이하고 놀랍고, 두려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언된 그리스도”이자 제자들이 사랑했던 “역사 속의 그리스도”를 제자들에게 설명하시고 성경을 펼쳐 주셨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진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눅24:32). 어려운 수수께끼도 정답을 알고나면 얼마나 쉬운가? 성경 속에서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모든 것이 얼마나 단순하게 되겠는가? 왜냐하면 “예수의 증거는 예언의 영”이기 때문이다(계19:10) 다시 말해서, 성경의 모든 예언의 목적은 예수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언에 대한 연구는 얼마나 중요한가?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 가운데 109가지가 문자적으로 성취된 것임을 알고 있다. 신약은 구약성경 말씀을 845회나 인용하였는데 그 중 333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다. 그것들은 그리스도를 대입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비유나 상징으로부터 시작해서 때로는 정확한 예언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신약에서 인용되지 않는 구약의 유일한 책들은 룻기, 에스라, 느헤미야, 솔로몬의 노래, 오바댜 뿐이다. 구약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이중 증거”를 하고 있다. 즉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둘 다 증거해 준다. 똑같은 선지자가 “초림과 재림”에 대해 언급할 때 항상 순차적으로 그것들을 기록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이 그리스도 당시의 성경 연구가나 종교 지도자들을 혼동하게 했다. 사실 그들은“두번의 오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거절했다고 너무 가혹하게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 지상 왕국을 건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분의 “고난 당하심”에 대한 예언과 그분의 “영광”에 대한 예언을 구분하지 못했다(벧전1:10-12). 그들은 메시아에 관해 언급한 모든 예언들, 곧 왕으로 오셔서 지상왕국을 건설하시는 것에 대한 예언들이 그 분의 초림 때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이 그리스도 당시의 사람들이 그 분께서 지상왕국을 세우실 것을 기대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들은 지금 “현재의 세대” 혹은 “교회시대”가 그분의 “고난(십자가)”과 “영광”(면류관) 사이에 끼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갈보리의 이쪽 편에 서서 예언이 성취된 “초림”과 아직 성취되지 않은 “재림”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이것은 “예언의 산봉우리들”이라는 여기 실린 도표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 도표에서 보면 구약 선지자는 미래를 “하나의 산”에서 분리되어진 산봉우리들로 보았다. 그는 이 봉우리들이 무리별로 모여 있고 무리와 무리 사이에 골짜기 즉 ‘교회의 골짜기’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첫번째 산의 무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갈보리” 그리고 “오순절”이 있다. 두번째 산의 무리에는 “적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권”이 있다. 이사야 61:1-2의 두번째 절에 기록된 “주의 받으실 만한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복수의 날” 사이의 “콤마”는 “현재의 세대” 전체를 망라하는 기간으로서 이미 2000년을 육박하는 세월이 흘렀음을 말해 준다. 마찬가지로 선지자 예레미야(렘23:5-6)도 초림과 재림의 “의로운 가지”와 “통치하시고 번성케 하실 왕” 사이를 “콤마”로 구분하고 있다. 선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와 “왕적” 사역은 보았으나 “제사장 직분”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희생제를 위한 제단”과 “보좌”는 보았으나 “주님의 만찬의 상”은 보지 못했다. 도표에서 보듯이 선지자는 “예언의 산봉우리들”을 직선으로 보았기 때문에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 있는 “교회의 골짜기”는 보지 못했다. 우리의 관점은 측면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왼편으로는 초림(십자가)과 오른편으로는 재림(면류관)이 있는 골짜기를 볼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예언에서 “초림”에 관한 예언을 분리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재림과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 이것은 예언을 연구하는 것을 단순하게 만들어 준다. 이사야의 예언은 주로 메시야와 이스라엘을 다루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그들 자신의 땅으로 돌아오는 것을 예언한 선지자였다. 에스겔은 그들 자신의 땅으로 돌아오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천년왕국의 영토와 성전, 회복된 정권 그리고 예배형태를 다루고 있다. 다니엘은 이방인과 이방인의 위대한 지도자 적그리스도를 다루었다. 스카랴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일어날 사건들에 관해 많이 다루었는데 다음과 같다.
1. 적그리스도(우매한 목자) → 스카랴 11:15-17
2. 아마겟돈 → 스카랴 14:1-3
3. 이스라엘의 회심 → 스카랴 12:9-14
4. 감람산에 재림하시는 그리스도 → 스카랴 14:4-11
5. 예루살렘에 있는 늙은 사람들 → 스카랴 8:3-8
6. 장막절 → 스카랴 14:16-21
스카랴는 이러한 일들을 연대순으로 보지 않았음을 주목해야 한다. 모든 대선지자들과 소선지자들 중 9명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강조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종교적 지도자들을 혼동시킨 것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었다(그리스도의 왕권은 그 분의 재림 후 천년왕국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이제 예언의 원근에 있어서 선지자들이 그리스도 탄생부터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개개인이 어떤 일들을 미리 보았는지를 알 수 있다. 곧 나훔 선지자는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 이상을 보지 못한 반면에 이사야 선지자는 모든 선지자들 보다 가장 먼 앞날까지 내다 보았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