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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타락”은 자유의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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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3월호>
우리는 지금까지 극단적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전적타락의 교리가 우리 죄의 심각성과 무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칼빈주의자들은 그들의 논리체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몇 개의 성경구절들을 인용합니다. 그들이 전적타락을 증명하기 위해 남용하는 본문 중 하나는 고린도전서 2:14입니다. 칼빈주의자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읽습니다. “자연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가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왜곡은 그들을 이상한 논리체계로 인도할 뿐입니다.
성경의 본문은 분명히 “일들”(th- ings)에 대해서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일들은 고린도전서 2:9-13에서 논의되는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영적인 일들을 알 수 있습니다(고전2:12).
하나님은 영적인 지각을 가지도록 그의 아들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이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죽은 이방의 죄인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가십니다(엡1:13, 롬8:9).
이미 살펴본 에베소서 2:1과 고린도전서 2:14 외에도 “전적타락”(Total Depravity)교리의 중요한 구절은 로마서 3:11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죄인은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그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이 구절을 번번이 사용하지만 이 구절을 포함해 그 전후 문맥 어디에도 아무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그 어떤 내용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현재형으로 쓰인 “하나님을 찾는”이란 의미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모두가 죄 아래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 시편에서 인용하여 그의 논쟁을 뒷받침한 것이며, 특별히 온 인류가 죄인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쓰여 진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찾으라고 명령합니다(사55:6).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찾도록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으며(행17:26- 27), 사람들이 자신을 찾을 것이라고 선언하셨고, 그를 열심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하신다는 약속도 하셨습니다(히11:6).
다음의 세 구절들은 전적타락과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위해서 칼빈주의자들이 빈번이 인용하는 구절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또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쫒지 아니하리라』(요6:3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느니라. 그러나 내게 오면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4).
『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내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자가 아니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노라.”고 하시니라』(요6:65).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원래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의 몇몇 구절만을 문맥에서 분리하여 어떤 교리나 사상체계를 만들게 되면 그것과 상반된 나머지 구절과 내용들을 무시해 버리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심지어 사탄도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특정한 부분만을 주장함으로 성경전체를 무시하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먼저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과 산에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요6:3).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에 많은 유대인 제자들이 모여들었고, 예수님께서는 그 가운데 5000명의 유대인들을 먹이는 이적을 베푸셨습니다(요6:10-13), 그 다음날 유대 백성은 다시 카퍼나움에서 예수님께로 모였습니다(요6:22 -24).
예수님께서 그들을 먹이셨기 때문에 그 유대 백성들은 다시 예수님께로 나온 것입니다(요6:26). 이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썩는 음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는 음식을 위하여 일하라. 인자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리니 이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를 인치셨기 때문이라.』(요6:2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일을 말하셨기 때문에 유대 군중들은 그 일이 무엇인가를 예수님께 질문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니, 즉 그 분이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라..』(요6:2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영생은 예수님을 믿는 것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요6:35). 예수님께서 그것을 무리들에게 주시겠다고 확언하신 것을 주의하십시오(요6:27). 모든 군중들이 “선택”받았습니까? 당신은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모두 영생을 받은 것이 아님은 알 것입니다(요6:36).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주신 누구도 잃지 않는다고(요6:39) 말씀하셨고,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의 원대로 나아온 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요6:40).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 중 하나는 잃어버렸고(요17:12) 그분께 나아온 어떤 사람들은 물러가서 더 이상 주와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요6:66).
칼빈주의자들이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 자주 인용하는 요한복음 6:44,45,65은 영적으로는 이 시대에 적용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구원을 받기 원한다면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기다릴 필요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끄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습니다. 핑크(Pink)도 심지어 “나를 이끄시도록 아버지께 간구하는 것은 나의 의무”라고 주장합니다(약4:8). 교리적으로 이 말씀은 갈보리 이전입니다. 새로운 언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마6:28, 히9:17) 성령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요7:39).
주님께서는 재림의 구절들(미4:1- 2)을 가져오셔서 그의 지상 사역에 적용하신 것입니다. 이 구절은 성령께서 유대의 양들을 염소로부터 성별하셔서 메시아에게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들이 이끌릴까요? 아버지께 듣고 배우는 자들이(막4:9, 마11 :27; 16:17) 그리스도에게 오는 것입니다. 『네 모든 자식들은 주를 배울 것이며 네 자식들의 화평이 크리라』(사54:13). 자연히 이 모든 것들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나서 바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에 의해 예수님께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자신이 모든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신 것입니다.
『또 내가 땅에서 들리 우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어 오리라』(요12:32). 이 이끄심이 요한복음 6:44에 나오는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것과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삼위의 구별된 사역들을 혼미케 하는 것입니다. 이끄는 것은 결코 저항할 수 없는 은혜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만인구원론(보편구원론)을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칼빈주의자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만들어 “이끄는 것”과 “구원의 행동” 그 자체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들리우심 그 자체가 모든 사람을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통한 구원으로 이끄시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광야에서 놋 뱀이 들리운 것 자체가 불뱀에게 물린 백성 모두를 구원하지 않았듯이 말입니다(민21: 4-9).
전적타락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구원받을 어떤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셔서 그들만을 구원하셔야만 한다는 논리를 필요로 합니다. 전적타락은 필수적으로 무조건적 선택과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교리들을 필요로 합니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수 없는 상태에서 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논리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이 누구인지 먼저 결정하시고 그들을 중생시킴으로 그들의 “무능력”을 “저항할 수 없도록” 압도하시어 그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수 있게 하신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게 됩니다.
또한 전적타락은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은혜가 죽은 죄인들을 위한 유일한 소망임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전적타락이라는 교리가 실제로는 전적 무능력을 의미하며, 타락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보았습니다. 그 교리는 단지 사람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은혜를 영접하느냐, 거절하느냐의 문제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에 아담을 선이나 악에 치우침 없이 “정직하게”(전7:29) 창조하셨다는 것은 확실히 성경적입니다.
극단적 칼빈주의 학자들은 죄인의 의지는 악으로 기울어져 있어 악의 방향으로만 자유롭다고 주장합니다. 워필드(Warfield)는 “아무도 그의 성품에 상반되게 선택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안셀름(Anselm)은 사람이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하고 “사람의 자유의지는 두 악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규정합니다.
존 칼빈 자신은 “타락한 사람의 의지는 부패되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타락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핑크(Pink)도 “타락한 사람의 의지는 부패되어 완전히 죄에 속박되어 있다”고 덧붙입니다.
칼빈주의자는 두 가지 점에서 오류를 범하는데, 성품과 의지의 차이를 구분할 줄 모르는 점과 그들의 반대자의 입장을 오해했다는 점입니다.
첫째, 인간의 의지가 부패되었을까요? 어떻게 의지가 부패될 수 있습니까? 의지는 양심이나 성품이나 인격 같은 개체가 아니라 다만 선택의 기능(faculty)일 뿐입니다. 의지는 부패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성품과 양심이나 외부의 힘들에 의해 영향받고 규정되는 것입니다.
둘째, 어떤 반대자가 사람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그의 성품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까? 자유주의, 인본주의로 무장한 현대 신학자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그러한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사실 칼빈주의자들만이 성경에서 자유의지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창2:16). 성막을 짓는 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원하여 주님께 드렸습니다(출35:29). 레위기에서 자유의지로 드리는 것에 대한 교훈이 주어집니다(레22:23). 이 자유의지에 의한 제사는 민수기와(민15:3,29:39) 신명기에서도(신12:6,16:10, 23:23) 다시 언급됩니다.
재판관들의 시대 동안에도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사용했습니다(판5:2). 다윗은 솔로몬에게 그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격려했으며(대상28:9), 성전의 건축도 사람들이 자유로이 돕도록 요구했고(대상29:5-6), 재건축 때에도 사람들의 자유의지 제사가 더욱 많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스3:5). 히스키야 아래에서 이스라엘의 재부흥 때도 사람들이 다시 자원하여 드렸고(대하31:14), 다윗도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섬기든지 안 섬기든지 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시54:6, 119:108).
신약에서도 기도의 약속들이 자유의지에 기초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요15:7).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진다는 것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제시되는 성경적 교리입니다(눅17;1, 행2:23; 3:14-15; 7:52).
반면에 칼빈주의자들의 신앙고백인 주권적 은혜와 저항할 수 없는 은혜는 성경 어느 곳에도 찾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10-13에서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혈로 나지 아니하고”는 육체적 탄생이 아니고 영적 탄생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탄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존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영접하는 순간 새로운 탄생을 주십니다. 새로운 탄생 자체는 육신의 뜻이나 사람의 뜻이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사람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구원받기 전에 자비를 베푸실 수 없으실까요? 아닙니다. 또한 이 자비는 선택된 자에게만 국한되지도 않습니다(롬11: 30-32). “누구든지 믿는 자는”의 원칙은 신약 전체를 통해 발견됩니다(요3:15,16, 행13:39, 롬1: 16, 벧전2:6).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과 칼빈주의자들은 성경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주장을 합니다. 택함을 받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비록 말씀 전파를 통하여 부름을 받고 성령의 일반적 역사를 어느 정도 받더라도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에게 참으로 돌아오지 않으며 따라서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제 10장 효력있는 부르심에 관하여 4절).
사람은 성령에 의해 살아나게 되고 새로워질 때까지 수동적인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새로워지면 이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고 이 부르심을 통해 제공되고 전달되는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제 10장 2절). 칼빈주의자인 팔머(Palmer)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성령을 사람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도록 보내사 그들이 악에서 선한 사람으로 결정적이고 확실히 변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항할 수 없는 은혜가 실제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단지 이 ‘은혜’의 결과가 될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성경이 신학자의 권위나 종교회의의 명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상, 잘못된 교리와 사상들은 성경의 바른 교리로 비추어 보아서 폐기되어야만 합니다.
극단적 칼빈주의나 알미니안주의가 성경만큼 정확 무오한 교리를 제공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편견과 사상체계를 우선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자신의 생각에 반대되는 성경구절들도 겸손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죄인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죄의 종인 상태에 있을지라도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너희가 죄의 종이었으나 너희에게 전하여 준 교리의 본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음이라』(롬6:17-18).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