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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천년주의와 하나님의 경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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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9년 10월호>

일반적으로 종말론에 관한 세 가지 이론을 전천년주의, 후천년주의, 무천년주의로 제시하곤 한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천 년”과 그리스도의 재림의 관계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석에서 나온 것으로, 각 이론들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전천년주의는 천년왕국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이요, 후천년주의는 천년왕국 이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이며, 무천년주의는 천 년이라는 기간은 불특정한 기간으로서, 하나님의 어떤 완성된 기간을 뜻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천 년이 될 필요는 없으며, 단지 천년왕국 같은 세상이 일정 기간 지난 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 이론에 대한 극히 제한적인 지식일 뿐이다. 이 세 이론에 대한 진정한 차이점은 성경의 역사관과 성경의 해석 문제, 또한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에까지 관계되는 성경 전체에 대한 각각의 관점이다.

전천년주의는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믿고 해석한다. 문자적으로 해석함에 따라 발견되는 여러 다른 경륜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종말에 대한 자세에도, 단지 주님께서 천년왕국 이전에 오신다는 정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세상은 극도로 타락하고 부패한다는 것, 인간의 힘으로는 그에 대한 해결 방법이 없고,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 따라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임무는 이 세상을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께 구령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갖는다.
반면 후천년주의나 무천년주의 체계에서는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는다. 특별히 예언에 관한 부분에서 두드러지는데, 초림 때 이미 이루어진 부분에 대해서는 문자적으로 믿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속한 예언 부분에서는 비유적으로 해석해 버린다. 종말에 관한 부분 또한 전천년주의와 큰 차이를 보이는데, 이 두 체계에서는 주님께서 재림하신 다음에 천년왕국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천 년 또는 불특정한 일정 기간이 의롭고 아름다운 상태로 지난 다음에 주님께서 재림하신다고 생각하므로, 그리스도인의 임무를 개인의 구령보다는 오히려 사회와 세상에서의 역할에 더 초점을 맞춘다. 세상을 보는 관점도 “악하니까 떠난다.”가 아니라 “악하니까 고쳐야 한다.”이다. 심지어 세상 문화를 악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까지 한다.
이런 점에서 전천년주의와 나머지 두 체계는 상반된다고 말할 수 있으며, 후천년주의와 무천년주의는 거의 차이가 없다 하겠다. 천 년이라는 기간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후천년주의가 무천년주의보다 문자적인 해석을 더 취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후천년주의의 입장을 취한다면, 언제부터 천 년의 시점을 잡느냐 하는 문제점이 생긴다. 후천년주의자들의 천 년이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복음 전파와 개혁 등을 통해 세상이 의롭고 아름답게 되는 천 년인데, 언제부터가 천 년이었는가?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부터 천 년인가? 그렇다면 1313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셨어야 한다. 루터가 종교개혁할 때부터 천 년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2523년에 재림하시게 되니 앞으로 500년 이상이 남았다. 아니면 아직 그 천 년이 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재림은 적어도 1000년 이상이 남았으니, 아주 요원할 뿐이다. 결국 후천년주의를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겠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그런지 비록 입으로라도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는 사람들은 후천년주의보다는 무천년주의를 택한다. 무천년주의를 택할 때 이들은 매우 편리하다. 일단 요한계시록 20장의 천 년을 문자적인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아무 때라도 재림하실 수 있다는 “편리한”(?) 입장을 갖게 되고, 칠천 년이라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도 믿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되면 또한 왕국에 관한 구약의 모든 예언이나, 모형들에 대해서도 믿지 않게 되며, 결국 성경은 전혀 나눌 필요가 없는 책이 되고 만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천 년”이라는 기간에 대해서는 믿지 않지만, 종말에 대한 관점은 후천년주의자들과 동일하다. 즉 인간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의롭고 화평한 세상이 이루어지면, 즉 세상이 점점 발전되면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무천년주의는 후천년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또한 후천년주의도 무천년주의의 입장을 취하는데, 그것은 성경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을 거부하는 것이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진다는 말은 없다. 아무리 복음 전파를 하고 아무리 사람들을 계몽하고 교육시켜도 세상은 악으로 치닫는다. 이 이론들은 이 악한 세상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제시하지 않는다. 결국 이 두 이론은 전천년주의를 반대하는 하나의 주의로 묶이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전천년주의는 단순히 재림의 시점만을 다루는 종말론 이론이 아니다. 전천년주의는 성경을 대하는 모든 관점과 관계가 되는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성경의 구도이다. 흔히 말하는 시대 구분이 바로 그것인데, 각 시대들은 몇 가지 중요한 사건이 발생할 때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다루시는 방법이 달라지는 시기를 기준으로 삼아 나뉘어진다.
예를 들어 십자가 사건은 매우 커다란 획을 긋는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하나님의 경륜은 대폭 바뀌게 된다. 십자가 이전에는 율법이 있었고, 동물의 피가 있었고, 이스라엘이 다루심을 받게 되었으나, 십자가 이후에는 한 번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만 있게 되고, 율법 대신 복음과 자유의 법(약 2:12)이 있게 되며, 이스라엘이 아니라 교회가 다루심을 받게 된다.
자, 성경이 이 십자가 사건 하나로만 나뉘어진다면 얼마나 편리하겠는가? 무천년주의자들도 이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경륜이 바뀔 만한 사건은 그 외에도 여럿 있다. 인간의 타락이 그것이고, 노아의 홍수가 그것이고, 아브라함의 선택이 그것이며, 출애굽도 매우 중요한 기점이다. 십자가 이후에는 또한 그리스도인의 휴거와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과 그로부터 1000년 후에 있을 새 하늘과 새 땅 창조 또한 커다란 기점이다.
인간의 창조 때부터 타락까지는 그 기간이 매우 짧을지라도 한 시대로 분류되는데, 그것은 인간에게 죄가 없었던 유일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때를 “무죄 시대”라고 하는데,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자유롭게 교제하셨다. 타락한 이후에는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으며, 하나님의 경륜은 무죄한 인간을 다룰 때와 같을 수 없었다. 이들은 양심에 따라 심판을 받기 때문에 “양심 시대”라고 불린다. 노아의 홍수는 인간의 죄성에 대해서는 변화가 없지만, 홍수 이후에 노아는 마치 아담과 같이 아무도 없는 광활한 땅에 새로운 종족을 번식시킬 첫 인류가 되었다. 하나님의 경륜은 노아와 더불어 새롭게 시작되어야 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부터는 조금 다르게 경륜이 바뀐다. 홍수 이후에는 바벨탑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들이 연합하여서 하나님을 대적한다. 그들이 흩어졌을 때에는 여러 민족들을 이루어 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물론 인간의 죄성이나 구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인간의 양심을 다루시기는 하나, 왕국의 관점으로 볼 때 이 시대를 “인간정부 시대”라 한다. 이 기간 동안 인간의 교만이 극에 달했던 적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노아 때처럼 온 인류를 멸하지 않으셨다. 이때 변한 하나님의 경륜은 온 세상이 아니라 한 민족을 택하시는 것이었다. 그가 바로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을 택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시작될 한 민족, 즉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셨고, 그 민족을 온 세상 민족으로부터 구별하셔서 위대한 민족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위엄을 보이심과 동시에 그분의 통치의 모델 국가를 만드시려 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복으로 언약해 주셨고(창 12:1-3; 13:14-17; 15:18-21), 그 언약은 그의 아들인 이삭과 야곱에게 계승되어 간다. 이들에게 주신 민족적인 복은 아직 언약이었을 뿐이고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대를 “언약 시대”라고 하며, 다루어지는 사람들이 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족장들이었기 때문에 “족장 시대”라고도 한다.
그러다가 이 언약이 구체화된 것이 모세를 통한 출애굽 사건이었는데, 이때 그들은 민족적인 탄생을 하고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율법은 이 새로운 국가의 통치 기틀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의 관점으로 보자면 양심을 대체할 만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거나 구원하실 때 구체적인 기준을 그들에게 제시해 주신 것이다. 이방인들은 여전히 양심의 통제를 받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의통제를 받는다. 따라서 이때를 “율법 시대”라고 한다.
십자가로 인해서는 교회가 탄생했고, 이때는 “교회 시대”라 불린다. 다른 말로 “은혜 시대”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약간 불완전한 이름이다. 왜냐하면 은혜는 이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있어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시대에 걸쳐 저변에 깔려 있었다. 예를 들어 율법 시대에 아무리 희생제사로 용서받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왜 그 사람을 죄를 지은 즉시 죽이지 않으셨는가? 그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신약 시대에는 오직 은혜로,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 이때 주어지는 은혜는 다른 시대에 누구에게나 주어졌던 은혜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런 점에서 이 시대를 “은혜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교회 시대는 그리스도인들의 휴거로 끝나게 되는데, 그 후에는 왕국이 펼쳐지기까지 잠시 동안의 과도기로 “환란 시대”가 있게 되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이후에는 모든 경륜들을 완성하듯이 메시야께서 직접 이 땅에 내려오셔서 천 년 동안을 다스리게 되는데, 이때 이 세상은 의와 화평으로 회복된다. 이때를 “왕국 시대”라고 한다. 그 후에는 잠깐 동안의 마귀의 반역과 그에 대한 심판으로 땅과 하늘을 소멸시키시는 것과, 백보좌 심판이 있게 되고, 드디어 영원히 그분의 왕국이 펼쳐지는 “영원 시대”가 있게 된다.
이것이 전천년주의의 기본적인 구도이며, 후·무천년주의의 관점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들이 시대들을 나누는 것은 십자가를 기준하여 신약과 구약을 나누는 것인데, 사실은 이 둘도 제대로 나누지 않는다. 그들은 십자가를 전후하여 시대를 나누지만, 십자가 이전과 이후의 구원에 대해서는 차이를 두지 않는다. 즉 십자가 이전에는 오실 그리스도를 보고 구원받았고, 십자가 이후에는 오신 그리스도를 보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으로, 결국 그리스도의 피로 모두가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구약에 있는 동물들의 피는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하므로, 그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피를 믿었다는 것이다. 또한 구약은 유대인들이 다루어졌고, 신약은 교회가 다루어지는데, 교회는 영적인 유대인으로서 구약 유대인들이 범죄한 이후에 그들이 받을 모든 약속들과 복들을 교회가 취하게 되었다고 하므로, 유대인과 교회에 대한 구분도 없어졌다. 결국 구약 성도들과 신약 성도들에 대한 구분도 없어지고, 구약의 모든 예언들은 신약에 모두 성취되어버려 더 이상 성취될 예언은 없고, 하나님의 경륜은 엉망이 되고 만다.

이처럼 전천년주의는 시대 구분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 구분은 단순히 구분을 위한 구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이러한 시대 구분은 하나의 종착적인 결론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천국의 완성”이다. 바로 여기에서 후·무천년주의와 구별되는 전천년주의의 특징이 있다.
후·무천년주의자들에게 있어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십자가로 인해 구속이 완성되었고, 사탄은 십자가에서 머리가 부숴졌다고 그들은 믿는다. 따라서 성도들은 승리한 기반 위에서 복음과 더불어 계속 전진에 전진을 할 것이고(계 6:1,2을 해석하는 그들의 방법에 따라), 역사는 지속적으로 선한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며, 그 시점의 한 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 이것이 십자가의 구속을 중심으로 삼는 후·무천년자들의 관점이다.
그러나 사탄은 아직 십자가에서 머리가 부숴지지 않았다. 그는 거기서 단지 형을 선고받았을 뿐이지, 아직 형의 집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집행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서야 있을 것이다(롬 16:20). 따라서 전천년주의는 성경에서 십자가라는 하나의 축이 아니라, 십자가와 재림이라는 두 개의 중심축을 발견한다. 구약의 예언들은 더러는 십자가를 예언하지만, 대부분이 재림을 예언한다. 재림으로 펼쳐질 그 의로운 왕국,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왕국을 이루시고자 그토록 여러 경륜들을 펼치시면서 시대들을 통해 역사를 주관하셨다. 아담에게 땅을 주신 것도 이 땅에 대한 그분의 통치권의 위임이요, 노아에게 다시 땅을 주신 것도 새로 펼쳐진 땅에 대한 통치권이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자기들의 정부를 세워 하나님을 대적한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어 그분이 통치하실 하나의 모델 국가로 삼으셔서 이방 위에 우뚝 서게 하셨으나, 그들은 반역하여 이방 국가들처럼 왕을 요구한다. 결국 인간들에 의해 잘못된 왕이 선출되었으나(사울),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왕(다윗)을 주심으로 그분의 통치권을 회복하셨다. 다시 그 왕국은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범죄로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고야 말았지만, 때맞춰 하나님께서는 친히 내려 오시어 천국을 전파하셨다(마 4:17). 그분께서 친히 그들을 다스릴 왕이셨다. 그러나 백성들의 거부로 그분은 대관식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시고, 인간의 죄를 제거하기 위한 십자가를 지셔야 했다.
그 후에는 더 이상 어떤 왕도 주어지지 않는다. 왕은 올라가셨고, 왕국은 연기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유대인)도 흩어졌고, 그 사이에 이 세상은 그 왕국을 차지하려는 이방 세력들의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그분의 몸된 교회를 남겨 두시어 이 세상의 빛이 되게 하셨지만, 그들은 영적인 백성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백성들마저도 이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흑암 속에 가리워져 버렸을 때, 인간이나 자연이나 망가질 대로 망가져 세상은 더 이상 희망이 없게 된 바로 그때에, 마치 역사의 클라이막스를 아주 극적인 장면으로 연출하시듯이 그분은 재림하시어 마귀를 멋지게 물리치시고, 처음부터 그분의 것이었던 그 왕국을 차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전천년주의의 역사관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누는 구도 자체는 전천년주의 신학을 따르고 있지만, 성경 해석 방법에서 문자적인 해석을 취하지 않는다. 그는 전천년주의자가 아니다. 또 전천년주의 체계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의 평화와 세상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전천년주의자가 아니다. 천년왕국 이전에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은 믿으면서도 세상이 악해진다는 것이나, 대환란이나 적그리스도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전천년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 시대를 구분한다 하면서도 각 시대의 특징을 섞어 놓거나, 교회 시대에다가 구약의 규례를 적용하거나, 유대인의 경륜에 속한 표적들을 적용하거나(예를 들어 은사주의자들) 하는 사람들도 진정한 의미의 전천년주의자가 아니다.
전천년주의를 단순한 종말론의 한 부류 정도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구약과 신약의 구원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는 체계 정도로만 인식해서도 안된다. 전천년주의는 이론이 아니라 참된 성경 해석 방법이며, 성경을 참으로 믿고자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취해야 할 체계이다. 우리는 앞으로 이와 관련해서 각 시대들과 언약들과 예언들과 모형들, 그리고 각 부류의 사람들과 사탄과 왕국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부분들을 체계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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