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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위해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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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12월호>
과연 이 지구상에 “죽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있겠는가? 물론 인간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죄인”으로 태어나기에,출생하는 그 순간부터 곧장 “죄의 고속도로”를 타고 죽음을 향해 질주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한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고』(히 9:27). 『이는 주께서 나를 죽음으로... 데려가실 것을 내가앎이니이다』(욥 30:23). 이렇듯 모든 인간은 허물과 죄들 가운데서 늙어 가고, 또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이것은 “결과론적으로” 보았을 때 그렇다는 이야기이지, “목적론적인” 견지에서 보면 당초 출생할 때부터 “죽으려고”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즉 모든 사람은 “살려고, 살기 위해서, 오직 살겠다는 일념으로” 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땅에 태어난 “목적” 자체가 애초부터 “죽음”이었던 사람이 있었으니, 곧 “인자”(Son of man)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요,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몸값으로주려고 온 것이라』(막 10:45).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땅에서 “죽기 위해 태어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하시다. 이런 사실은 주님께서 사람의몸을 입고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을 때 그 몸을 감싸고 있던 “포대기”가 잘 보여 준다. 『그리하여 그녀가 자기의 첫아들을낳아 그를 포대기로 싸서 구유에 누이니, 이는 여관에 그들이 들 방이 없었기 때문이라...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리라.”고 하더라』(눅 2:7,12). “포대기”는 영어로“swaddling clothes”인데, 이것은 “붕대 따위로 어떤 물건을 단단히 꽁꽁 싸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말해 아기의 체온이 따뜻하게 유지되도록 포대기처럼 아기의 몸을 꽁꽁 둘러싸는 “넓은 세마포”인 것이다. 그렇게 세마포로둘러싼 모습은 마치 붕대로 휘감겨 있는 “죽은 미라”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아리마대 요셉과 니코데모는 예수님의 시신을 “미라”처럼 세마포로 싸서 무덤에 안치했다(요 19:38-42). 말하자면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든지, 죽으시고 장사되셨을 때든지, 똑같은 형태의 “천,” 곧 “세마포”를 가지고 똑같은방법으로 그분을 둘러싼 것이다. 이처럼 “포대기”는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내어놓으시기 위해, 곧 죽으시기위해 탄생하신 분이심을 보여 주는 “표적”이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죽으심으로써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는데, 탄생하실 당시 주님께서 누워 계셨던“구유”가 이런 사실을 잘 보여 준다. “구유”는 소나 말에게 여물을 먹이기 위한 “여물통”이다. 소나 말은 여물을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또 일할 수 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생명의 빵”으로 오셔서 인류에게 생명을주셨다. 주님께서는 생명의 빵이신 그분의 살을 먹지 않고 그분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말씀하셨다(요 6:48-58).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문자적인 의미”가 아닌 “영적인의미”로서(요 6:63 -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 생명이라.』), 예수님을 “믿는 것”과 주님께 “믿음으로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명의 빵이니라.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아니하며, 또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또 이것이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니,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사람은 누구나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라. 그리고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살리리라.”고 하시더라』(요 6:35,40).이처럼 어떤 죄인이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늘에서 내려오신 그 “참된 빵”을 먹고 그 “참된음료”를 마시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짐승들에게 먹이를 주는 “여물통,” 곧 “구유”에 누워 있는예수님의 모습이 이런 사실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왜” 그리고 “누구”를 위해 죽으신 것인가? 사실 이 문제는 “누가” 예수님을죽였는가에 관한 문제로 귀결된다. 여러분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살해한 살인범으로 “누구”를지목하겠는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의 병사들”을 가리키겠는가? 물론 그들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무거운 나무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채찍으로 내리치면서 “해골의 장소”인 갈보리 산 정상까지 끌고 갔고, 바로 그곳에서 지름1cm에, 길이가 12-17cm나 되는 “녹이 슨 대못 세 개”를 예수님의 양손과 포개진 양발에 박았다. 못이 예수님의손목뼈와 발목뼈를 관통했을 때 손과 발로 나가는 가장 큰 “중추 신경”이 파괴되었는데, 그 고통은 펜치로 그 신경을 잡고비틀어서 뭉개는 고통과 비슷하다. 이 잔인한 짓을 벌인 자들은 분명 “로마의 병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상관의 명령에죽고 사는 병사들로서 “총독 빌라도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총독 빌라도”를 살인범으로 지명하겠는가? 당시 빌라도는 “예수님의 재판”을 맡은 총독으로서,최종적으로 “사형 선고”라는 불의한 판결을 내린 장본인이었고, 병사들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넘겨주었다. 인류역사상 가장 불법적이었던 이 재판을 집행한 책임은 분명 “빌라도”에게 있었다. 그의 판결은 공의로운 판결이 아니었고,그저 유대인들의 호감을 사고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판결이었으며, 모든 법과 양심에 따른 의를 거스르는 가장불공정한 판결이었다. 그는 이 판결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자신의 손을 “물”에 씻으면서 자기는 무죄하다고말했지만, 죄는 결코 물로 씻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이 사형당할 만한 어떤 죄도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놓아주려 했었다고 변명할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고소했던“유대인들,” 특히 “선임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관원들”의 요구가 너무 강력해서 어쩔 수 없이 십자가에못박도록 넘겨준 것이라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살해한 극악무도한 살인범들은 “유대인들”이 되는 것인가? 물론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한 그들의 책임이가장 크다! 그들은 어떤 영장이나 기소도 없이 예수님을 일방적으로 체포했고, 그것도 환한 대낮이 아닌 어두운 밤에은밀하게 체포했다. 그리고 당대의 제사장들인 “안나스”와 “카야파”는 종교적인 권력을 내세워 공적인 심리가 공회나법정에서 열리기도 전에 예수님을 사적으로 심문하고 “불법 사찰”을 진행했다. 또한 소위 신성한 법정에서 거짓 증인들이증인석에 나와 예수님을 대적하여 거짓으로 증거했고, 사법부 당국이 어떤 최종 선고도 내리지 않은 상황에서 예수님을가혹하게 대우했는데, 관원들이 손바닥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때리고 침을 뱉은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께는 자신을 위한 어떤변호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당국에서 지정해 주는 “국선 변호사”도 없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주장이 타당한지에 대한어떤 조사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붙잡히신 지 반나절도 채 안 돼서 속전속결로 유죄 선고가 이루어지고 형이 집행되었다.말하자면 본 재판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께 무조건 유죄를 선고해서 사형에 처하게 하려고 사전에 면밀히계산되고 조작된 재판이었던 것이다. 스테판 집사는 그런 그들을 엄중하게 꾸짖기를 『너희는 그 의로우신 분을 배반한 자요살인한 자가』(행 7:52) 되었다고 질책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부르짖으면서 아무 죄도없으신 예수님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마 27:25)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런 사실들로 미뤄 볼 때“유대인들”에게는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어 보인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을 살해한 진범들”을 찾아냈다. 하지만 예수님을 살해한 “공범들”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공범들”이 누구인가? 바로 이방인들인 “우리들”이다! 『과연 주께서 기름부으신 주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를대적하여 헤롯과 폰티오 빌라도가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모였으니』(행 4:27). 여기서 “로마인들” 또는“로마 병사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이라고 말씀한 것에 주목하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살인자는 다름아닌 “우리 자신,” 곧 “가증하고 더러운 죄인인 ‘나’ 자신”인 것이다. 호레이셔스 보나르는 이렇게 고백했다. “예수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를 내가 흘리게 했네. 내가 그분을 나무에 못박았네. 내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고,그분을 모독하는 일에 나도 참여했다네.”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의로운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은“나 자신”이며,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나’ 한 사람”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채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모두흘리시고 죽으셨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인 나를 위해 죽으시려고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이다! 여러분이 “양심있는 죄인”이라면 하나님의 이 “위대한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