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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의 누룩 (유 아 세 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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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4월호>
그리스도인들은 칼빈주의와 유아세례(infant baptism, “baptism”의 올바른 번역은 “침례”이지만 카톨릭이나 개신교에서 유아를 물에 잠궈 침례를 주는 사람은 없고, 그들에게 물을 뿌려 “세례”를 준다. 그러므로 이 용어는 편의상 그들의 용어에 맞춰 “유아세례”라고 부른다. “유아침례”나 “유아세례”는 전혀 성경적인 용어가 아니다.)와의 관계를 특별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지 칼빈주의자들이 유아세례의 실행에 앞장섰기 때문만은 아니며, 그보다 더 깊은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를 체계화한 것이 칼빈이라면, 칼빈주의의 모든 기본적인 구도를 짜 놓은 사람은 바로 어거스틴이다. 그런데 이 어거스틴이야말로 유아세례의 누룩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신학적 근거를 가지고 유아세례를 주장하고 실행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G.H. 오쳐드는 “카톨릭 신앙으로서의 유아세례는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A.D.354-430)이라는 아프리카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어거스틴 이전에도 침례에 대한 비성경적인 견해들이 있었지만 유아세례를 주장하고 실행할 정도는 아니었다. 터툴리안은 성인들만이 침례의 대상임을 분명히 했으며, 아타나시우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기까지는 그 누구도 침례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성경적인 믿음하에서 유아세례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아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으며 그것을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가?
이것은 저스틴이나 오리겐, 클레멘트처럼 물세례가 중생을 가져온다고 믿는 자들에게 책임이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세례에 의해 거듭난다는 생각은 당연히 유아세례의 실행을 가져오게 되었다. 성인이 아니라도 거듭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점점 연령을 낮추어 어린이에서 결국 갓난아기에게까지 세례를 주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지할 수 없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구주인 줄도 알지 못하는 아기에게 어떻게 침례를 주느냐는 점이다.
어거스틴은 공개적으로 “은혜의 성사, 즉 세례에 의해 새롭게 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유아들이 영생을 받는다고 주장하면서, 갓 태어난 아기들에게 원죄를 제거해 주는 세례를 베풀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저주를 받으리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그는 누미디아 공회(A.D. 415)를 통해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는 로마 카톨릭의 공식 입장을 세우는 데도 일조했다.
어거스틴은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유아세례와 연관시켜 생각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영원한 선택도 카톨릭 사제가 유아에게 물을 뿌릴 때에만 성취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의 어떠한 믿음도 필요 없다고 강조한 그가 이제는 유아세례에 의해 하나님의 주권이 제한당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결국 그가 말하는 영원한 선택을 판결하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은 다름아닌 유아세례를 시행하는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일 뿐이다.
어거스틴과 동시대에 살았던 도나티스트들은 성경을 통해 침례의 올바른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물세례로 인해 거듭난다는 속임수에 속지 않았고 로마 카톨릭이 이러한 의미로 주는 침례가 잘못되었음을 공개적으로 알렸다. 이들이 유아세례도 거부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로마 카톨릭에게 이단으로 정죄받은 것이다.
세례로 유아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이단적인 교리이다. “이단”이라는 칭호는 그 수가 적거나 자신의 의견을 거부하는 자들을 비난하기 위해 붙이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없는 사실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명백한 이단인 것이다. 유아세례를 실행하는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이단”이라고 지적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또 하나의 가관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침례는,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육신이 죄에 대하여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함께 묻혔고 함께 부활했다는 표일 뿐이다. 침례는 성도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다만 성도의 신앙 간증에 불과하다. 침례가 죄를 용서하는 수단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베드로전서 3:21에서 이에 관해 명백히 설명하고 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모형이니, 곧 침례라.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라)』(벧전 3:21). 침례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교회의 의식이다.
이들 외에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었던 노바티안즈, 보고밀즈, 알비겐스, 왈덴시스, 폴리시안, 몬타니스트 등도 동일한 이유로 로마 카톨릭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받았다. 이로 인해 유아세례의 문제는 로마 카톨릭과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구별시키는 뚜렷한 특징이 되었다.
유아세례는 로마 카톨릭에 의해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이슈화되었다. 로마 카톨릭은 A.D. 413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와 호노리우스 황제를 통해 유아세례를 실행하지 않는 그리스도인과 재침례를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형을 언도한 바 있다. 이미 종교국가로 탈바꿈한 로마 카톨릭은 A.D. 789년에는 샤를마뉴 대제를 통해 유아세례를 국법으로 제정하여 의무화시켰다. 유아세례를 통한 입교를 제도화함으로 교회국가는 국민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한 셈이 되었다. 그들은 죽음이나 파문의 위협을 통해 대규모의 교인들을 확보했고, 태어날 때부터 국민들을 종교적, 정치적으로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거듭남도 구원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카톨릭이 하나로 묶어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유아세례 덕분이었다. 미사와 더불어 유아세례는 지금까지 로마 카톨릭의 종교적, 정치적인 단합의 핵심적인 수단이 되어 왔다.
성경에 없는 것을 실행하는 것은 가장 악랄한 사기극이다. 이 사기극에 반대했다는 이유만으로 로마 카톨릭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무려 5천만 명이나 살상했다. 이것이 카톨릭이 성도들의 손에서 성경을 빼앗아 버렸던 암흑시대(A.D. 450년경부터 약 1000년 동안)에 자행된 일이다.
이처럼 작은 누룩 하나가 빵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하는 것이다(마 13:33).
로마 카톨릭의 이 누룩은 너무나 심각하고 그 뿌리가 깊어서 종교개혁가들(칼빈, 루터, 쯔빙글리 등)마저도 이 누룩을 제거하지 못하였고, 결국 유아침례나 국가와 교회의 분리에 대한 문제들을 그대로 수용하고 말았다.
칼빈은 그의 동료 개혁자들처럼 유아에게 물을 뿌림으로 세례를 주었으나 그의 <기독교강요>에서는 침례가 바른 방법이라고 시인하고 있다. 강경한 반카톨릭적 입장을 취한 알미니우스도 칼빈주의자였기에 칼빈이나 다른 개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유아세례를 고수했던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이 하나같이 유아세례를 주장하고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대조적으로 칼빈주의를 반대한 자들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유아세례의 반대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펠라기우스는 유아세례를 반대함으로 어거스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칼빈을 반대한 세르베투스도 유아세례를 가리켜 “마귀의 교리요 교황의 창안이며 기독교를 완전히 전복시키려는 수작”이라고 했다.
유아세례 문제가 왜 종교개혁자들의 손에서 해결되지 못했으며 왜 칼빈주의와 붙어다니게 되었는지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주의는 구원을 선택과 예정이라는 단어로 바꿈으로 인해 아무도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지 알지 못하게 하고 말았다. 물론 대부분의 칼빈주의 신학자들은 확실히 거듭났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이나 주권적 은혜, 유아세례의 위력으로 인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여전히 선택과 버림받음에 있으며, 그들은 그 중 어떤 사람들만 선택받았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선택받음의 증거는 과연 무엇인가? 누가 선택받았음을 확신할 수 있는가? 칼빈주의 교리에만 충실하여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고 불안해 하는 자들을 위해 칼빈주의자들은 선택을 확인하는 수단을 제공하였다. 그 증거는 그들의 거룩한 행위와 성도의 견인이다. “성도의 견인”의 교리에 와서는 그들이 비성경적인 알미니안주의자들과 화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칼빈주의는 결코 무조건적으로 모든 유아의 구원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유아들도 선택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로 나뉜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유아세례이다. 교회사가 샤프에 의하면 “칼빈주의자 어거스틴은 선택받지 못하고 세례받지 못한 유아들이 저주받았다고 주장했고, 종교개혁자들 중 유일하게 쯔빙글리만이 모든 유아가 그리스도의 속죄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구원받는다고 믿었다.”고 진술한다. 사실 성경에 의하면 모든 유아는 구원을 받는다(신 1:39, 욘 4:11). 그들 가운데 이와 같은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도 있겠지만, 왜 그들은 성경에서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 비성경적 교리인 “유아세례”를 버리지 못하는가? 위대한 사역자였고 칼빈주의자로 불리는 스펄젼도 분명히 말하기를 “유아세례는 인간이 만든 육신적인 발상이고 성경에 첨가하는 행위이며, 악하고 해로운 것이다”라고 못 박는다. 왜 그들은 존경하는 선배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가?
이 문제로 인해 성경대로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 카톨릭에 의해 박해받았고, 그것도 모자라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도 핍박받은 것을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지 않는 칼빈주의자들은 유아들도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선택된 유아”라는 것을 만들어 냈고 그 증거로 유아세례를 실행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