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과도기의 경륜적 진리 분류

“다른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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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06월호>

성경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들 중에 "유사와 대조"가 있다. "유사"(Similitude)는 서로 비슷한 것을 비교하는 방법으로서, 모형과 원형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의 사역을 통해서 비유[similitudes]를 사용』하셨다(호 12:10). 주로 "~처럼"이나 "~같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하는 이 비유는 겉으로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 진리들을 쉽게 이해시켜 준다. 반면 "대조"(Contrast)는 서로 다른 것을 비교하는 공부 방법으로, "올바르게 나누라"(딤후 2:15)는 기본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주님께서 묶으신 것들을 임의로 나눠서도 안 되지만, 나누어 놓으신 것들을 인간 마음대로 합쳐서도 안 된다.
『개와 고양이는 둘 다 다리가 네 개이다. 모두 꼬리를 가지고 있다. 털도 있다. 그러므로 개와 고양이는 "똑같은" 동물이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배교한 기독교계는 이런 식의 추론을 무분별하게 수용한다. "다른 것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이 한 가지만 제대로 알아도 성경의 많은 부분을 깨닫게 된다. 마태복음의 대부분은 십자가 이전이고, 왕국이 임하기 직전의 상황이다. 왕국이 준비되는 과정 속에 왕국 백성(유대인)과 유관한 교리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교회 시대의 교리들과 상당한 대조를 이룬다. 이는 모순이나 오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경륜도, 세대도, 언약도, 대상도 다른데, 어찌하여 "교리"가 같을 수 있겠는가! 서로 다른 것은 다른 상태로 그냥 놓아두라. 억지로 똑같게 만들거나 끼워 맞추려 할 때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결국 멸망을 자초하게 된다. 『무식한 자들과 견고하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들처럼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그렇다면 교회 시대와 비교하여, 교리적으로 마태복음에서 볼 수 있는 "주된 차이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1. 왕국 복음과 은혜의 복음
우선 가장 크게 다른 부분이 "복음의 내용"이다. 성경에서 복음이라고 하면 모두 같은 복음이고, 구약 성도와 신약 성도가 동일한 방법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가르치는 자는 성경을 전혀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다.
마태복음에서 왕의 선두주자였던 침례인 요한이 전파한 복음은 "왕국 복음"으로서, 그 내용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였다. 즉 메시아 왕국의 도래가 임박했으므로, 왕을 맞을 준비를 하고 왕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상 숭배, 율법을 버린 죄, 종교적(형식적)인 의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켜야 한다고 선포했던 것이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역시 동일한 메시지를 전파하셨고(마 4:17), 이와 똑같은 복음을 열두 사도에게도 위임하셨다(마 10:7). 이것이 전파되는 시기로는 왕국이 임하기 직전이므로 과거 초림 때와 재림 직전인 미래의 대환란 때가 해당된다. 반면 "은혜의 복음"은 이와 사뭇 다르다. 이는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고전 15:1-4)이 핵심 내용이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져야만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복음인 것이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은 즉시 거듭나고 "하나님의 나라"(천국이 아님)에 들어간다. 따라서 여기에는 회개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약적인 믿음"이 필요하다(행 20:21). 이 복음이 전파되는 시기는 교회 시대로서, 왕국 복음이 전파되는 초림과 대환란(재림) 사이에 위치한다. 그러니까 이 두 복음은 전파되는 내용도 다르고 시기도 다른 것이다.
또한 "대상"도 다르다. 왕국 복음은 반드시 "유대인들에게만" 전파되어야 한다. 『이방인들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인의 성읍에도 들어가지 말고, 다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 성경을 사사롭게 해석하는 자들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그리스도인"(영적인 이스라엘)으로, "이방인들"을 "불신자들"로 적용한다. 그러면 "사마리아인"은 누구인가? 또한 이방인들의 길로도 가지 말아야 한다면, 우리 역시 구원받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이방 민족들에게 선교사를 파송해서도 안 된다. 본문은 각각 "문자적인" 이방인과 사마리아인과 이스라엘에 적용해야 한다. 아직은 십자가 이전이므로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을 위한 경륜은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에는 경륜이 바뀌기 때문에, 대상이 유대인에게 한정되지 않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행 1:8)로 확대된다. 마태복음 28장에서도 복음의 전파 대상이 『모든 민족들』(마 28:19)로 변화되는데, 이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피가 흘려진(마 27장) 이후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받게 된다(롬 10:12,13). 이처럼 십자가 이전과 이후의 상황을 동일하다고 보는 것은 난센스이다. 이는 고양이와 개가 똑같다고 보는 사람과 매한가지이다.
복음에 수반되는 "표적"의 유무에서도 큰 대조를 이룬다. 왕국 복음에는 반드시 표적이 뒤따른다. 이는 전파 대상이 유대인들이기 때문인데, 이들은 표적과 더불어 시작되었고(출 4:30,31) 항상 표적을 구하는 민족이었다(고전 1:22). 심지어 표적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 왕을 식별할 수 있는 증거이기도 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왕으로서(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역하시는 가운데 표적들을 보여 주신 것이다(마 4:23,24). 이는 왕국 복음이 제자들에게 위임되었을 때에도 동일하게 나타났다(마 10:7,8). 그러나 교회 시대에는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표적을 행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표적을 행하는 자들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고전 1:22,23).
2. 요한의 침례와 이방인의 침례
침례인 요한은 목자 없는 양같이 흩어져 있던 백성들을 돌이킬 때 "회개의 침례"를 베풀었다. 즉 그가 전파한 복음을 듣고 회개한 백성들은 합당한 열매를 맺고, 회개의 표시로 죄들을 자백하고 침례를 받았던 것이다(마 3:6,8).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왕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었다. 요한이 침례를 베푼 목적은 메시아를 이스라엘에 알리는 것이었으므로(요 1:31), 이 침례는 유대인들이 왕을 맞이하는 데 필요한 행위였다. 구약에서는 부정하게 되었을 때 성소의 정결례를 따라 몸을 물로 깨끗이 씻어야 했다. 유다의 개혁을 주도했던 히스키야왕은 주 하나님을 찾기 위해 자기 마음을 준비한 자는 성소의 정결례를 통해 깨끗하게 되지 않았을지라도 용서해주시라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한 적이 있었다(대하 30:19). 이것은 주님을 받아들일 준비를 위한 전제 조건이 정결례임을 보여 준다. 이처럼 초림 당시의 유대인들은 회개의 침례를 통해 일종의 정결례를 행함으로써 왕을 맞을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 시대와 무관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었을 때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잠기는 영적 침례(롬 6:3,4, 골 2:12), 곧 성령 침례(고전 12:13)를 받는다. 이로써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영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구원과 성령 침례는 동시에 이루어지기에(엡 1:13,14), 이 사실을 부인하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성령 침례를 경험한 성도는 물 침례에 순종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이방인의 침례"이다. 여기에서 침례를 받는 목적은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다. 왕을 맞이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묻혔고, 부활했다는 사실을 모형으로 보여 주는 것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다(벧전 3:21). 십자가 이후인 마태복음 28:19에서는 모든 민족들, 곧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줄 것을 명령하는데, 이는 십자가 이전에 유대인들만을 위한 회개의 침례와 같지 않다.
3. 구원의 상실 가능성과 영원한 보장
마태복음에는 믿음뿐 아니라 계명을 행하는 행위가 있어야 구원받을 수 있고 또 왕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일례로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의 비유"를 들 수 있다(마 7:24-27). 여기에서 "집"은 이스라엘로서(마 12:42-45), 전자는 "듣고 행하는" 백성들이고, 후자는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듣는 것"은 믿음을 의미한다(롬 10:17). 따라서 믿음과 행함이 있는 유대인들은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은 채 왕국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모래 위에 지은 사람은 끝까지 인내의 행위를 지키지 못한 까닭에 무너짐이 극심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믿음과 행위에 대해, 요한계시록 12:17에서는 각각 "예수님의 증거를 가진 것"과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이처럼 행위가 필요한 시대이기 때문에 "끝까지" 견디지 못하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마 10:22; 24:13). 여기에서 "끝"이란 왕국이 임하기 직전에 왕국 복음이 전파되는 기간의 끝, 곧 "대환란의 끝"(마 24:13,14,21)으로서 교회 시대와는 무관하다.
이렇게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내용들은 마태복음 곳곳에서 등장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혼인 잔치의 비유"이다(마 22:1-14). 여기서는 "손님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교회"(그리스도인들)가 아니다. 교회는 어린양의 혼인식에서 초대받는 손님들이 아니라 주인공인 "신부"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손님들처럼 복수가 아니라, 하나뿐인 순결한 처녀(고후 11:2), 곧 단수로 표현된다. 따라서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에 나오는 "처녀들"(복수)과도 다른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 혼인 잔치에서 구원을 잃어버린 한 사람이 등장한다. 이 사람은 구원을 받아 혼인식에 참석했지만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손과 발이 묶여 바깥 흑암에 던져진다. 이것은 지옥에 던져지는 것으로서, 그는 구원을 잃어버린 것이다. 즉 대환란 시대에는 예복을 인내의 행위로 끝까지 지켜야만(계 16:15) 혼인 잔치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와 달리 교회 시대에는 구원이 영원히 보장되는데, 이는 그 구원을 지켜 주시는 분이 성도 개개인이 아니라 죄인들을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께서 너희를 끝까지 확고하게 지키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게 하시리라』(고전 1:8). 그래서 교회 시대의 성도들은 행위로 인해 구원을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다만 상급과 유업을 잃어버릴 뿐이다.
무엇이 다른지 알겠는가? 다른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오늘날 마태복음을 오용하여 다른 복음과 거짓 교리를 퍼뜨리고,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위협하며 교인들의 돈을 갈취하는 저주받을 악한 사기꾼들이 있는데, 그들을 향한 "심판이 지체하지 않고 멸망도 졸지 않는다"(벧후 2:3)는 사실을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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