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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에 익숙한 서기관 에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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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05월호>
“이 에스라가 바빌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께서 주셨던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서기관인데 그에게 내린 주 그의 하나님의 도우심대로 왕이 그의 요구하는 것을 다 허락하였더라”(스 7:6).유다가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 재건을 완료했을 때(스 6장), 에스라가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하게 된다(스 7장). 그는 코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스 1:1) 제1차 귀환 때 돌아오지 않았고, 아탁세르세스 왕 제7년에 공포된 칙령에 따라 제2차 귀환 때 돌아왔다(스 7:7,8). 제1차 귀환은 유대인의 총독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이루어졌고(B.C. 536), 그로부터 약 80년 후인 B.C. 457년에는 제2차 귀환이 에스라의 인도하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느헤미야는 그보다 12년 뒤인 제3차 귀환 때 돌아오게 된다(B.C. 445). 에스라 8장에 의하면 에스라가 귀환했을 때 약1,700명의 사람들이 함께 돌아왔다.
“에스라”란 이름은 “여호와께서 도우신다.”라는 뜻이다. 에스라는 “제사장”이자 “서기관”으로서 아론의 16대손이었고(스 7:5), 힐키야의 증손이자, 스라야의 아들이었다(스 7:1). 여기에서 “힐키야”는 바빌론 포로로 사로잡혀가기 전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개혁, 곧 “요시야 왕의 개혁”을 주도했던 대제사장이었다(왕하 22:8). 당시 그는 왕의 명령에 따라 성전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어딘가에 방치되어 있었던 “율법책”을 발견했고, 그 책을 서기관 사판에게 건네주었다(대하 34:14,15). 그리고 사판은 그 율법책을 요시야 왕에게로 가져가 『제사장 힐키야가 내게 책 한 권을 주었나이다.』라고 하면서 『그 책을 왕 앞에서』 읽었다(대하 34:18).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요시야 왕과 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위대한 부흥과 개혁이 일어났는데,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 마음이 겸손해진 요시야 왕이 바로 그 자리에서 옷을 찢고 눈물로 회개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책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유다가 그 말씀에 경청하지 않음으로써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그래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크게 임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단하게 굳어진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 준다. 마음의 밭을 파고 쟁기질하여 뒤집어엎고, 깊숙이 박혀 있는 돌들을 완전히 제거하든지 잘게 부수든지 해서 우리의 마음을 편평하고 고르게 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만한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겸손하게 해 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옷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찢고 눈물로 회개하게 만든다. 우리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 말씀을 들을 때 무미건조하고 냉랭한 마음으로 앉아 있으면 안 된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 말씀이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와 죽은 심장을 뛰게 하고, 우리의 죄악들과 육신적인 생각들을 말씀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내서 우리의 마음이 철저히 자백하고 돌아서도록 해야 한다. 말씀을 통해 마음과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결코 행동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설교를 통해 양심을 찌르지도, 마음을 찢어 놓지도 못하고, 행동과 헌신에 변화를 주지도 못했다면, 그날의 경배는 사탄에게 빼앗긴 것이 된다. 소중한 시간을 낭비한 죄를 지은 것이며, 온전하고 거룩해야 할 경배를 망쳐 버린 것이다. 따라서 간절한 기대와 열망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가서야 한다. 잡다한 생각을 몰아내 주시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가득 채워 주시라고 기도해야 한다. 따분해 하는 얼굴빛과 흐리멍덩한 눈빛, 지겨워하는 귀를 가지고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군 복무 시절 필자는 몇 개월 동안 조교로서 신병들을 훈련시킨 적이 있었다. 조교들이 햇병아리 같은 신병들에게 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제군들, 나는 제군들에게 다른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살아 있는 눈빛, 우렁찬 목소리 그것만 원합니다. 알겠습니까!”
성경에는 “아침부터 정오까지,” 즉 오전 6시부터 12시까지 전체 예배 시간이 6시간 정도 지속된 두 번의 서로 다른성격의 예배가 나온다. 하나는 바알을 부르면서 자해를 하고 미쳐 날뛰는 가운데 파멸을 자초한 우상 숭배자들의 예배이고(왕상 18:26),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부르고 온전한 경배를 드리는 가운데 부흥과 개혁을 낳은 이스라엘백성들의 예배이다(느 8:3). 후자의 경우와 관련하여, 오늘날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를 듣는 교회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기독교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 역시 과거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1500-1900)라면 모를까 지금 그런 식의 긴 집회를 갖는 교회는 드물다. 현대의 교회들에서 대부분의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시간은 10분도 채 안 된다는 뉴스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지루해”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강단에 선 목사들이 성경 말씀을 전하기보다 소위 “쇼”를 하면서 많은 흥밋거리와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이유로 설교 시간이 계속해서 짧아지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미국에서 교회들의 주일 예배 설교 시간을 조사해 보았더니 대부분이 “30분 정도”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이렇듯 설교 시간이 짧다 보니, 설교 대신에 연극적인 요소와 영화 설교, 선정적인 록 음악, 전자 기타와 드럼, 경배와 찬양, 랩, CCM 가수와 워십 댄서들 등으로 예배시간을 “때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잡다한 것들로 사람들의 감정을 고조시키지 않고서는 예배를 오랜 시간 지속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 느헤미야 8:3에서 물문 앞에 모여든 백성들은 무려 6시간 동안 에스라가 읽어 주는 율법책에 “경청”했다. 대충 듣고 넘긴 것이 아니라 아주 주의 깊게 귀 기울여 듣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에스라는 백성들의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해 전자 악기나 드럼을 이용한다든지 벨리댄스를 추는 찬양 팀을 동원하고 스피커 볼륨을 한껏 높이는 등 그런 도구들로 백성들의 주의를 집중시키지 않았다. 에스라가 한 일은 오직 한 가지뿐인데, “율법책,” 곧 하나님의 말씀을 펼친 것이다.『에스라가 백성들 목전에서 책을 펴니라』(느 8:5). 그러자 백성들은 모두 그 말씀을 듣기 위해 일어섰고, 에스라가 읽어 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했다. 에스라가 가진 것은 이 한 권의 책이 전부였고, 그 책을 펼쳐서 읽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책 하나가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 안에 엄청난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죄에 대해 눈물로 뉘우치는 가운데 대대적인 부흥이 일어났던 것이다(느 8:9-10:39).
그렇다면 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설교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인가?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켜 주는 요소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그런 쾌락적인 요소들에 비하면 설교는 매우 지루하고 따분한 대상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공급해 주신 “만나”에 대해 『이 보잘것없는 음식을 싫어하나이다.』(민 21:5)라고 불평한 것처럼 말씀에 대해 진저리를 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말씀에 익숙해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즐거워하여 언제라도 경청할 수 있을 만큼“익숙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서기관』(스 7:6)이었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신실한 청지기이자,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지켜야 할 책무가 있는 서기관으로서 성경에 익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선지자 호세아가 활동하던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과 서기관들은 율법에 익숙한 자들이 아니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내 율법의 많은 것들을 기록하였으나그것들이 이상한[strange] 것으로 여겨졌도다』(호 8:12). 결국 이스라엘은 지식의 부족으로 멸망하고 말았다(호4:6). 성경이 이상하고 낯선 책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익숙한 책이 되어야 한다. 성경의 어느 구절을 펼쳐 읽어도 익숙할 만큼의 성경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전공과목”은 성경이다. 우리는 학교 시험 성적이 좀 나쁠 수 있다. 자격증 시험에서 여러 번 떨어질 수도 있고, 영어를 좀 못 할 수도 있다. 직장 상사로부터 인정을 못 받을 수있으며, 남보다 승진이 느리고 성과 연봉을 덜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에 관해서 만큼은 남보다 뒤져서는 안 된다.성경적 지식과 실행에 관한 한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실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정해진 시간”이 있다고(욥 7:1) 성경은 말씀한다. 이 제한된 시간 속에서 성경에 소위 “올인”(all in)할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갈 때까지 읽는 것과 권고하는 것과, 교리에 전념하라.』(딤전 4:13)라고 권면했다. 정해져 있는 인생에서 최고의 투자는 성경에 대한 투자다. 그것은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해 볼 만한 의미 있는 도전이다. 사실 “평생”을 성경에 투자한다 해도 아깝지 않은 것이다.
힐키야가 “모세가 준 주의 율법책”을 발견함으로써 마지막 부흥과 개혁에 박차를 가했던 것처럼,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에스라가 성전 재건이 완성된 시점에서 또 하나의 부흥과 개혁을 일으키기 위해 귀환한 것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일이었다.『에스라가 주의 율법을 찾고 그것을 행하고 규례들과 명령들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칠 것을 마음으로 준비하였더라』(스7:10). 율법의 규례들과 명령들을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성별과 연관되어 있다. 당시의 백성들은 오랫동안 이방인들과 어울려 살았기에 그들의 관습에 젖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온전한 경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율법을 통한 성별을 배워야 했다. 에스라는 이 일을 위한 적임자였다. 그는 제사장이요 서기관으로서 율법에 관한 한 박사였기 때문이다.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서기관이라고 했을 때 그것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당시 에스라가 “바빌론”에서 돌아왔다는(스 7:6)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포로 기간은 무려 70년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70년이면 강산이 변해도 일곱 번은 변했을 수 있는 기간이다. 인생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했듯이, 70년이면 한 사람의 인생에 맞먹는 기간이다. 더군다나 성전도 무너지고 없는 상황이다. 율법에 따라 희생제사를 드릴 수도 없고 절기를 지킬 수도 없었다. 율법을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무의미해져 버린 기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머나먼 이국땅 바빌론에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바빌론의 문화와 생활에 적응하며 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스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율법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는 그 포로 기간 중에도 그는 신실하게 율법을 연구했던 것이다. 망국의 백성으로서 고난도 많고 세상살이가 힘든 그런 상황에서도 율법에 익숙할 만큼 부지런히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공부했던 것이다. 그는 결코 제사장이자 서기관으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서도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면서 주님을 온전한 믿음으로 신뢰하는 신실한 성도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에스라가 지금 귀환하고 있는 것이다!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