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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령의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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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06월호>
의로운 자의 열매는 생명의 나무니, 혼들을 이겨오는 자는 현명하니라. (잠 11:30)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옥을 향해 질주하는 불쌍하고 가련한 ‘혼들’(souls)을 하나님께로 ‘이겨오는 일’(winning)”이다. 이것이 바로 “구령”(Soul Winning)이다. “구령”은 일종의 “영적 전쟁”인데, 치열한 영적 전장에서 “구원받지 않은 혼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게 함으로써, 그 혼들을 사로잡고 있는 마귀들과 싸워 “이기고,” 그 혼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 오는 일”인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로부터 구하여 내셔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으니』(골 1:13). “혼들을 구해 내는 과정”은 그 혼들을 장악하고 있는 『흑암의 권세』와 격렬하게 싸우는 과정이기에, 변개된 “개역개정판”이나 “개역한글판성경” 또는 “정동수”의 “흠정역”처럼, “win”이란 단어를 “얻다” 정도의 “사전적인 의미”로 번역해서는 “구령의 참된 의미”를 설명할 수 없다.
언젠가 “경상북도 순회 설교”에서 여정을 함께했던 한 형제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목사님은 이 땅에서 무엇을 하다가 하늘로 들려 올라가기를 원하십니까? 강단에서 설교하는 중에 올라가고 싶습니까, 아니면 기도하는 중에 올라가고 싶습니까? 아니면 성경 말씀을 가르치다가, 아니면 상담을 하다가, 아니면 지금처럼 순회 설교를 하다가 들려 올라가고 싶습니까?” 그전에는 “교회 강단에서 설교하는 중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 질문을 받았을 때는 “순회 설교를 하는 중에 들려 올라가고 싶은 마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렇게 바뀐 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순회 설교 둘째 날, 우리 일행이 단 한 명도 구령하지 못한 “경산 오거리”에서 설교할 때, 하나님께서 필자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키신 아주 “특별한 감정” 때문이었다. 그날 필자는 오전 내내 “달성군 화원역”을 시작으로 “수성구 범어역”까지 “대구”의 다섯 지역을 네 시간 정도 이동하면서 20분 분량의 설교를 5회, 곧 전체 “1시간 40분 동안”을 설교한 것인데, 그것도 마음이 가장 완고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교했다. 첫째 날 일정에서는 설교에 경청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전도지도 잘 받아 가고 영접 기도도 따라 하는 등 복음을 전하기가 수월했다. 하지만 둘째 날 복음을 전한 “대구광역시”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사람들이 먹고살 만해서 그런지, 마귀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과, 단단하게 굳어 버린 완고한 마음속을 복음의 씨앗이 파고들어 가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절감했다. 그래서 “죄에 대한 심판”과 “죽음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 관해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파해야만 했고 그만큼 필자의 온몸도 지치고 소진되어 갔다. 그야말로 치열한 “영적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투를 벌이듯 복음을 전하다가 “경산 오거리”로 온 것인데, 그곳 사람들 역시 들은 체 만 체했다. 날씨도, 햇볕이 쨍쨍 내리쬐던 오전과 달리 하늘에는 어느새 먹구름이 짙게 끼며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했다. 설교하는 동안, 중간중간 ‘설교를 마칠 때까지는 비가 오지 않도록 비구름을 붙잡아 주옵소서.’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렇게 완고한 죄인들을 향해 좀 더 강력한 메시지를 담아 복음을 전하면서 몸과 마음이 서서히 지쳐 갈 무렵, 하늘에서 먹구름이 마구 일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로 격려하시며 위로를 주시는 것 같았다. “힘을 내라! 네가 설교하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고 있노라. 내가 네 설교를 기뻐하고 있으며, 너를 통해 영광을 받고 있도다!” 마침 “요한복음 3:16”의 말씀을 죄인들에게 선포하려 했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감정과 확신 그리고 용기”에 힘입어,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말씀을 더 우렁차게 외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저 옛날 완고한 유대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저 하늘에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던 “스테판”의 심경이 어떠했을지 느껴졌다. 난생처음 경험해 보는 “특별한 감정”이었던 것이다.
오래 전 어느 신문에 “비극적인 기사” 하나가 실렸다. “다섯 살 난 어린아이”가 평소에는 그토록 다정하게 지내던 자기 집 “큰 개”에게 물려 죽은 사건이었다. 그 개는 주인이나 자기 새끼도 문다는 성질 사나운 대형 “도사견”이었다. 이 난폭한 개가 아이를 물고 30분 동안이나 으르렁거리며 돌아다녔음에도, 주위에 있던 100여 명의 “방관자” 중 어느 누구도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살려 달라”는 아이의 처절한 비명을 못 들은 척 외면하거나 눈앞의 광경이 너무나 무서워 그저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야말로 매정하고 비정한 세태가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벧전 5:8) 다니는 “마귀”는 그 포악한 “도사견”같이 수많은 죄인들의 혼을 물고는, 그들이 지옥으로 떨어질 때까지 잔인하게 으르렁대고 있다. 누가 “그들의 생명”을 건져 낼 것인가? 마귀에게 물린 자들이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가고 있는데 언제까지 그들을 외면하겠는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구원받지 않은 죄인들이 죽은 뒤에 어디로 가는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뿐 아니라 그들을 그 비극에서 건져 낼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죽음으로 끌려가는 자들과 살해될 자들을 구해 주는 것을 삼가고 말하기를 “보라,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잠 24:11,12)라고 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런 성도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신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 어찌 주시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혼을 지키시는 분이 어찌 그것을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분께서 각자의 행위에 따라 보응하지 않으시겠느냐?』(잠 24:12) “구령의 열정”도 없고, 복음 전파에 관심조차 없는 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죄인들이 지옥에 가지 않을 것처럼 처신한다. 이 시대의 매정한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세상이 깨닫지 못한 진리를 알고 있음에도, 세상과 잘 지내기 위해, 괜히 복음을 꺼냈다가 어색한 관계가 되는 게 싫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양 비겁하게 살아간다. 죽음으로 끌려가는 죄인들이, 바로 오늘 저녁에 함께 식사했던 그 죄인들이 내일 아침에도 과연 살아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가? <구령의 열정>의 저자 “오스왈드 스미스”는 이렇게 외쳤다. “사랑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사랑하던 사람이 죽어 집을 나서는 상여를 바라볼 때 슬퍼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그럴 때 눈물을 흘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고귀한 혼들이 우리 주위에서 암흑과 절망의 어둠 속에 빠져 영원한 파멸로 치닫고 있음을 보면서도, 아무런 고통이나 아픔도 느끼지 않고, 눈물조차 흘리지 않은 채,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 버린 이 현실을 보라! 분명 하나님께서는 그런 연민의 마음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지만, 항상 그런 애통함을 간직하며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잘못이다.”
“알렉산더 더프” 목사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중단하는 교회는 머지않아 ‘복음적인 교회’로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으며, “진젠도르프”는 “나는 나 자신의 개인적인 목표와 관계없이 복음을 선포하도록 운명이 정해졌다.”라고 말했다. “요한 웨슬리”는 이렇게 말했다. “전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듣기 원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나는 이것을 나의 고귀한 의무로 여긴다.” 영국의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는 “천사는 복음을 전할 수 없다. 오직 ‘바울’과 당신, 그리고 나 같은 존재들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라고 했으며, “스코트” 목사는 “교회에 명령이 떨어졌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지체하는 것은 명백한 불순종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복음 전도자 “윌버 채프만”은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프로그램이나 전략들 따위가 필요하지 않다. 교회 안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며, 성경을 통해 배운 진리의 말씀대로 삶 속에서 실제로 살아 내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오스왈드 스미스”는 이렇게 탄식했다. “우리는 수많은 교회 활동 때문에 지칠 정도로 일하지만, 정작 교회의 진정한 임무인 복음을 전파하고 잃어버린 혼들을 주님께로 이겨오는 일은 거의 소홀히 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 있으나 마나 한 “부끄러운 교회들의 현주소”이다. 또한 출산 장려금을 쥐여 주고, 집을 지어 주며, 노숙자들에게 밥을 퍼 주고, 불우 이웃을 도와주며, 동성애자들을 보호하고, 독거노인들에게 김치를 담가 주거나 연탄을 배달해 주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는 교회들을 향한 엄중한 경고이다. 특히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채, 세상 정욕들로 마음을 채우고 있는 모든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1846년부터 “인도의 복음화”를 위해 자신의 일생을 온전히 바친 “로열 와일더” 목사의 삶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미들베리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세상에서 부와 명예가 보장된 탄탄한 앞날을 뒤로한 채 “앤도버신학교”를 거쳐 “인도 선교사”로 헌신했다. 그는 인도의 3,000여 개 마을을 30년 이상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했는데, 그가 배포한 전도지는 3백만 장에 달했다. 또한 그는 거리를 배회하는 3,300명의 아이들을 교회와 선교 학교로 데려와 가르치기도 했다. 그 결과 수많은 혼들이 구원받을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폰 웰츠” 남작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이후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귀족’의 위치에서 내려와, 평생을 종으로 섬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겠다!” 이에 그는 “남작의 지위”를 버리고 부동산과 재산을 모두 포기한 채 척박한 “남미”의 “수리남” 땅으로 들어가 원주민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면서 주님을 섬겼다. “그의 고백”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내가 하나님의 종이 되었는데, 내게 섬기는 일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리요? 모든 허영심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발아래에만 거하며 모든 것을 바치겠다.”
“물 건너 생명 줄 던지어라. 누가 저 죄인을 구원하랴. 멸망 중에 빠진 죄인이니, 이 생명 줄을 누가 던지려나(1절). 너 빨리 생명 줄 던지어라. 형제여, 왜 지체하고 있나. 보아라, 죄인들 떠나간다. 이 ‘구조선’ 타고서 속히 가세(2절). 시급히 생명 줄 던지어라. 극심한 고난을 당하누나. 사망의 바다와 세상 물결, 저 캄캄한 곳으로 쉬 가겠네(3절). 이 세상 풍파는 쉬 지나고, 건너편 언덕에 이르리니, 형제여, 왜 지체하려느냐. 이 생명 줄 던져서 구원하게(4절). 생명 줄 던져, 생명 줄 던져, 물속에 빠져 간다. 생명 줄 던져, 생명 줄 던져, 지금 곧 던지어라(후렴)”(찬송가 <영광을 주께>, 475장). 이 찬송가는 1888년 미국의 침례교 목사 “에드워드 어포드”가 작사, 작곡한 곡이다. 그는 “보스턴” 부근의 작은 마을 “웨스트우드교회”에서 사역하던 1886년 어느 날, “난타스켓” 해변의 “해난구조본부”에서 구조대원들이 “난파선 승객들”을 구출하기 위해 “생명 줄을 던지는 훈련 장면”을 목격하고 이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생명 줄을 던져라!” 하면서 크게 소리치는 구조대원들의 외침을 가사에 그대로 담아낸 것인데, 이 찬송의 절박한 외침처럼 우리 모두는 죄인들이 “불못,” 곧 영원한 “불바다”로 던져지기 전에 그들을 속히 구해 내야 한다.
여러분은 “영원한 불못”으로 끌려가는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이 현재 얼마나 위험천만한 상태에 놓여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한번은 “어떤 목사”가 “이제 곧 ‘급행열차’가 지나갈 선로 위에서 ‘술’에 취해 깊이 잠들어 버린 사람”에 관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회중들에게 “만일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직면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엄숙하게 물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일어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가장 먼저 그 술 취한 사람을 선로 밖으로 끌어낼 겁니다. 물론 곱게 다룰 수는 없겠죠.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러서 차분하게 걸어 나오게 할 수도 없을 겁니다. ‘정신을 차려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그의 멱살이라도 거칠게 움켜잡고 끌어내야 할 겁니다. 설령 너무 힘에 부치고 지쳐서 그 사람 옆에 주저앉게 된다 해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끌어낼 겁니다.” 그러자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 상태가 바로 사망과 지옥으로 끌려가는 모든 혼들이 처해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은 선로에 쓰러진 채로 깊은 잠에 빠져 있으면 안 됩니다. 이제 곧 하나님의 심판의 열차가 당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내게 자랑할 것이 없으니 이는 내가 부득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정녕 내게 화가 있으리라! 내가 기꺼이 이 일을 하면 상이 있으려니와 기꺼이 하지 아니한다 해도 복음의 경륜이 내게 맡겨졌음이라. 그렇다면 내 상이 무엇이냐?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복음으로 인한 내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아니하는 것이로다』(고전 9:16-18).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부득불 해야 할 일』이다. 절대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불가피한 일”이며, 극심한 두려움과 강한 압박이 밀려오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고,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인 것이다. 심지어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지 않을 때 그에게 “화”가 미칠 것으로 여겼다. “구령의 열정”이 없는 성도는 “깊은 잠에 빠진 성도”이고, “구령의 열매”가 없는 교회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죽은 교회”이다.
“신실한 구령자”의 “복음 전파”를 통해, 죄인들이 돌이켜 회개의 진실한 눈물을 흘리고, 마시던 술병을 내던지며, 창녀 짓을 청산하고, 도박과 폭력을 멈추며, 자살의 늪에서 벗어나 추악하고 가증스러운 행위를 중단하는 “기적”을 본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도 여전히 안일하게 앉아만 있겠는가?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의 혼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막 8:36) 한 사람의 혼은 세상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가치를 지녔기에, 우리가 구령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럽고 위대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령의 열정”을 품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는 성도가 돼라. “눈물”로 씨를 뿌리고 “귀한 씨”를 가지고 나가서 울라!(시 126:5,6) 열정이 식었다면, “구령의 열정”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라. 『현명한 자들은 창공의 광명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의로 돌이키는 자들은 별들처럼 영원무궁토록 빛나리라』(단 12:3). B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