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정통 교리 강좌 분류

판단에 관한 오해 : 극단인가, 정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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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07월호>

성경을 읽다 보면 “서로 상충하는 구절들”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그가 이혼증서를 써서 그녀[아내]에게 주어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신 24:1)라는 말씀이 언급되는가 하면, 『남편도 자기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전 7:11)라는 명령이 주어지고, 『이제 가서 아말렉을 치되... 남자와 여자, 아기와 젖먹이, 소와 양, 낙타와 나귀를 다 죽이라.』(삼상 15:3)라는 지시가 떨어지는가 하면,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천대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라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친구를 위하여 보증을 서...면... 덫에』 “걸린다”(잠 6:1,2)고 경고하는 반면, 『네 친구와 네 아버지의 친구를 버리지』 “말라”(잠 27:10)고 권고하고 있고, 사무엘상 14:24-26에서는 “꿀을 먹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이 적시되는 데 반해, 잠언 24:13에서는 “꿀을 먹으면 좋다”고 말씀한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라 하는 자는 누구나 지옥불의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마 5:22)라고 경고하지만, 고린도전서 15:36에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너 어리석은 자야』라고 말한 “바울”에게 “어떤 지옥 불의 심판”도 떨어지지 않았다.

“판단에 관한 가르침” 역시 마찬가지이다. 분명 『판단하지 말라.』(마 7:1)라는 명령이 나오지만, 요한복음 7:24에서는 『의로운 심판으로 판단하라.』라는 지시 사항이 내려지고, 고린도전서 10:15에서도 『너희는 판단하라.』라고 말씀한다. 사실 앞서 언급한 “서로 상충하는 본문들”은 모순이나 오류가 아니다. 이는 단지 “모순되어 보인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과 무지, 그리고 오해의 소치일 뿐이다. 이 모든 오해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딤후 2:15) “공부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의 모든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생각에, 문맥과 상관없이 아무 구절이나 붙들고 무턱대고 따라 하려는 나쁜 습관이 있다. 만약 성경의 어느 한 구절에서는 『판단하지 말라.』라고 명령하고, 다른 구절에서는 『판단하라.』라고 말씀한다면, 거기에는 각기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이해해야 한다. 즉, 서로 상충해 보이는 구절들을 올바르게 나누어 각 상황에 맞게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 땅에 사는 그 누구라도 판단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특히 의와 불의, 죄, 다가올 심판, 구원, 그리고 거짓 교리에 대해 판단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없다. 또한 올바른 진리를 제대로 세울 수도, 올바르게 가르칠 수도 없다.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구원받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할 수 있어야 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의 행위가 성경적인가, 비성경적인가?”를 판단할 수 있어야 그 사람을 진리의 말씀으로 바로잡고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오늘날 세상 사람들과 영합한 목사들은 “죄와 거짓 교리, 그리고 비성경적인 실행”에 대해 성경적으로 판단하여 설교하는 사역자들의 입을 막으려고,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마 7:1)라는 말씀을 곧잘 오용한다. 그러면서 죄에 대해 강력하게 꾸짖는 설교자들을, 마치 판단만 좋아하고 관용이나 이해심은 전혀 없는 편협하고 너그럽지 못한 사람으로 몰아가거나 교만하고 오만하며 겸손하지 못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린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의로운 심판으로 판단하라.』(요 7:24)라고 말씀하셨고, 고린도전서 2:15에서는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들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라고 말씀한다.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거듭났을 뿐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온전히 주관하시는 사람, 곧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을 의미한다. 영적인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영적인 분별력과 지혜”가 있다. 심지어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Final Authority)와 그 잣대, 그리고 기준이 “진리의 성경”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는 “영적인 사람”에 대해 감히 무슨 판단을 내릴 수 있겠는가? 설령 판단을 내린다 한들 어떤 잘못된 부분을 발견할 수 있겠으며, 그 판단에 따라 바로잡아 줄 만한 일로 무엇이 있겠는가? 성경대로 올바르게 분별하는 영적인 사람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으며, 그것이 비성경적인 잘못된 판단이라고 어떻게 조언해 줄 수 있겠는가? 제도권 교회들이나 그 교회들에 속한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는 교회들을 판단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이것은 비성경적인 교리가 아닙니까? 이것은 성경 말씀에 어긋난 행동이 아닙니까?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 사역입니까?”라는 식으로 우리를 판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올바른 판단 기준”이 되는 “보존된 성경”이 없기 때문이다. “(없음)”이란 구절이 “열세 군데”나 있고, 성경 전체에서 36,000군데 이상이 변개되어 있으며, 신약성경만 해도 2,200단어 이상 삭제된 “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을 가지고, 어떻게 그 모든 말씀들이 온전히 보존된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절대 권위”로 믿는 교회를 판단할 수 있겠는가?

혹자는 다음과 같이 따져 물을지 모른다. “왜 이렇게 극단적입니까?” 사실 이것은 올바른 질문이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극단적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고 “성경적으로 옳은가, 그른가”이기 때문이다. 성경적으로 “옳은 말”을 하고 있고 “옳은 판단”을 내리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극단적인 것”이 아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기도 한다. “왜 다른 교회들을 판단하고 비평합니까? 왜 다른 교회 목사들을 비판하는 설교를 합니까? 왜 교회에서 쫓겨난 사람들까지 비난하는 것입니까?” 필자는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되묻고 싶다. “성경을 변개시키고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목사들에 대해 왜 침묵을 지켜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위상을 실추시키고 비성경적인 ‘교단 교리’와 ‘이단 교리’를 퍼트려, 수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고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목사들에 대해 왜 침묵해야 합니까? 특히 성경대로 믿는 교회를 파괴하려 했고, 지금도 이 교회와 사역을 무너트리기 위해 온갖 계략을 꾸미고 있는 ‘배교자’들, 그러면서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 그들에 대해 왜 침묵을 지켜야 하는 겁니까?” 만일 침묵을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필자에게 던진 그 질문들을 “바울”을 향해서도 똑같이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만한 용기가 없다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더 현명하다.

분명 “바울”은 위선을 행하는 “베드로”에 대해 판단했고, 심지어 공개적으로 그를 책망하고 면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베드로가 안티옥에 왔을 때 그에게 책망할 것이 있기에 내가 그를 면박하였으니 이는 몇몇 사람이 야고보에게서 오기 전에, 그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자들에게 속한 자들을 두려워하여 뒤로 물러나 혼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라. 다른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그와 함께 위선을 행하니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가더라. 마침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올바르게 행치 아니하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처럼 살지 아니하고 이방인들의 방식을 따라 살면서 어떻게 이방인들을 유대인처럼 살도록 강요하느뇨?” 하였노라』(갈 2:11-14). “오, ‘바울’이여, 너무 심한 처사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성도들이 ‘기둥’같이 여기는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고 면박하다니요. 따로 조용히 불러 권면해도 될 것을, 굳이 공개적으로 판단하고 비평할 필요가 있었나요? 아이고, ‘베드로’만이 아니었네요. 당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믿지 못했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당신이 ‘예루살렘 교회’에 잘 안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 ‘바나바’까지 실명을 거명하면서 비평하고 있네요. 아니, 그때 책망하고 면박했으면 됐지, 그것도 모자라 ‘갈라디아 교회들에 보내는 편지’에까지 공개적으로 기록해 두다니요! 향후 ‘2천 년 동안 이 땅에 세워질 모든 교회’가 다 이 서신을 볼 텐데, ‘베드로’와 ‘바나바’의 위신을 생각하면 이건 너무한 것 아닙니까!”

정말 너무한 일인가? 그러나 “바울”의 판단과 비판, 그리고 책망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믿음에 대한 선한 양심”을 내던지고 파선해 버린 자들이라고 “판단”했고, 이에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모독하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딤전 1:19,20). 또한 “후메내오”와 “필레토”가 “후천년주의”라는 거짓 교리를 “종창”처럼 퍼트림으로써, 성도들의 믿음을 뒤엎고 있다고 “비판”했으며(딤후 2:17,18), “데마”에 대해서는 악한 현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 자신을 버렸다고 “책망”했다(딤후 4:10). 구리 세공자 “알렉산더”에 대해서도 『내게 많은 해를 끼쳤으니, 주께서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라.』(딤후 4:14)라고까지 강도 높게 경고했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이 누군가를 반드시 판단하고 책망하며 비판해야 했을 때, 그 이름을 거명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물론 모든 사람의 이름을 다 거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름을 밝혀야 한다고 판단했을 때는, “그가 누구든지 간에” 이름을 분명하게 명시했다.

진리를 정직하게 선포해야 할 “설교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임무”가 주어져 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대비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견책하고 책망하며 권고하라』(딤후 4:2). 교리로 견책하고 책망하고 권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게 해야 할 대상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판단 없이는 설교할 수 없고, 판단 없이는 말씀을 전파할 수도 없다. 또한 판단 없이는 누군가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견책할 수 없으며, 책망이나 권고 역시 불가능하다. 다만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들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5)라는 말씀에 따라 다음과 같은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 첫째, 『영적인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기에, “육신적인 상태”에서는 어떤 것도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육신적인 상태에서 내리는 “육신적인 판단”은 반드시 “또 다른 육신적인 판단”을 낳기 때문이다. 둘째, “영적 분별력을 갖추고 있을 때”만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 셋째, “최종권위”인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판단해야 한다. 넷째, 판단하더라도 “사람” 자체를 판단하면 안 되고, 그 사람이 했던 말이나 행동, 혹은 그 열매들을 판단해야 한다. 분명 “성경”은 『모든 것들』을 판단한다고 말씀하지, “모든 사람”을 판단한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판단”에 대해 어떤 오해도 없기를 바란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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