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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기독교 세계” 교회들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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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04월호>
서구권을 소위 “기독교 세계”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으나, 이제는 퍽 어색한 말이 되었다. 2018년 5월에 나온 퓨 리서치 센터의 보고서에서, 서유럽 15개국의 백분율 중간값을 보면 한 달에 적어도 한 번이라도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의 비율은 22%에 불과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의 비율은 11%, 이따금이라도 기도하는 사람의 비율까지 합쳐도 31%에 그쳤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사람은 전체의 58%이고,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사람은 27%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니, 서유럽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시 9:17)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이율배반적이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의 비율은 71%나 되었다.“기독교 종주국”이라는 미국의 신앙의 경우 서유럽보다는 선방하는 모양새이나, 하락 추세는 뚜렷하다. 2023년에 시행된 갤럽의 조사에서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응답한 미국인은 전체의 67%에 그쳤다. 이는 2000년대 초 85%에 육박했던 데서 꾸준히 감소한 것이었다. 2025년 2월에 나온 퓨 리서치 센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기독교인들 가운데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이상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은 전체의 48%에 불과했고, 매일 기도하는 사람은 전체의 60%에 불과했다. 미국의 기독교인 중 35%, 그러니까 세 명 가운데 한 명 이상이 “성경이 자신의 인생에 얼마만큼 중요한가?”라는 설문에 “약간 중요하다”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거나,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답했을 정도다.
대부분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교회들의 도덕적 부패도 심각한 수준이다. 상대적으로 다른 기관들에 비해 감시가 덜하다는 점을 이용해서 온갖 나쁜 짓을 벌이는 것도 모자라, 대개 “명예가 실추될까 봐” 두려워서 문제가 곪아 터질 때까지 방치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2002년 미국에서 있었던 “로마카톨릭 보스턴 대교구 아동 성 학대 스캔들”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처음에는 5명의 로마카톨릭 사제들이 기소되는가 싶더니 이후 100명도 넘는 사제들의 성추문이 드러났고, 249건의 형사 고소로 이어졌다. 수영장, 교회, 학교, 병원 등지에서 아동 및 청소년들을 상대로 온갖 더러운 일들이 자행되었음에도, 로마카톨릭은 이를 징계하기는커녕,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들었다.
2018년 독일에서도 1946년부터 2014년까지 총 3,677명의 아이들이 로마카톨릭 사제들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2024년에는 독일의 개신 교회의 사역자(직원)들이 1946년부터 당시까지 적어도 9,355명의 미성년자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는 보고서가 나오기도 했다. 개신 교회와 로마카톨릭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가 독일에서만 114,000명으로 추산된다는 연구도 있다.
침례교도들도 그와 다르지 않았는데, 2022년 미국 남침례교 총회의 성추문에 관한 한 보고서에 따르면, 총회 측에서 703명의 피해자 명단을 비밀리에 가지고 있었지만, 가해자에 대한 어떤 징계도 내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총회 측은 처음에는 몰랐다고 발뺌했지만,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 정교회와 영국 성공회는 수장들에게 사퇴 압력이 가해질 정도로 강력한 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했다. 지난 2005년 그리스 정교회의 수장인 크리스토둘로스 대주교는 측근 성직자들의 판사 매수, 동성애, 마약 거래 혐의로 그가 사망할 때까지 끊임없이 비판받았다. 2024년 캔터베리 대주교 저스틴 웰비는 교회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캠프 운영진 중 한 명이 100명이 넘는 아이들을 학대했다는 보고를 받고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은폐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결국 사임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교회에 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고 하겠다. 돈과 성과 명예,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요일 2:16)을 탐닉하는, 이미 신실함을 저버린 지 오래인 교회들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의 도덕적 잣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출석하는 성도들의 수가 줄어듦에 따라 헌금이 부족해진 교회들은 궁여지책이라도 마련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 되었다. 그래서 각 교단들은 문화재에 가까운 교회 건물들을 민간에 수도 없이 매각했고, 그 가운데는 클럽, 술집, 스트립 바 등의 용도로 전용된 것들도 많다.
교회들이 그와 같은 극단적 운명을 피하기 위해 선택하는 가장 보편적 방법은 “문화”를 결합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독일의 공영방송 DW는 몇 해 전 “독일인들을 만나세요”(Meet the Germans)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개신교 교구들에서 “문화 교회”라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한 적이 있다. 해당 프로그램에서 독일의 토마스 디데리히 목사는 카바레로 사용하거나 코미디, 음악 공연 등이 열리는 데에 있어 높은 천장을 가진 교회 건물이 “차별화된 적합성”을 가진다는 점을 소개하기도 했다. 교회들이 어두움의 일들을 책망하기는커녕, 대관 사업을 벌여 어두움의 일들을 장려하고, 돈을 벌며, 사람들을 모은다는 것이다. 독일의 목사들이 과연 “문화 교회” 프로젝트란 것이 창녀의 몸값이나 개로 번 돈을 성막에 가져오는 것(신 23:18)과 무엇이 다른지 설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편의성”을 결합시킨 사례도 있다. 실제로 영국의 교회들은 성공회를 중심으로 평일 예배를 활성화하는 데 힘을 쏟고 있고, 평일에 “성찬식”을 거행하기도 한다. 20세기 말부터 주일에 교회에 올 수 없는 노동자들을 위해 점차 확대되기 시작한 이 “평일 예배”는 2004년에 시작된 “신선한 표현”(Fresh Expression) 운동과 만나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제 영국의 교회들은 카페, 펍(pub, 영국식 바), 직장, 심지어는 온라인 공간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로 “찾아가는 서비스”를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영국 교회들은 사람들에게 주일 예배를 빠지고서도 양심을 달랠 수 있는 훌륭한 “알리바이”를 제공함으로써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들은 사람들이 떠나는 현상에 대한 대응 방법을 “세속화”를 통해 모색하는 실정이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오락거리를 제공하고, 세상에서 손해 보지 않으면서도 교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의 방법론을 말씀하신다. 교회에 사람들이 더해지기를 원한다면, 오히려 세속적인 것들이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마술을 행한 많은 사람도 그들의 책을 함께 가져와 모든 사람 앞에서 불태우니 그것들을 값으로 계산하면 은 오만 개어치나 되더라. 하나님의 말씀이 힘있게 융성하며 세력을 얻으니라』(행 19:19,20).
교회가 세상을 흉내 내며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 드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아도 좋은 전략이 되질 않는다. 교회는 “재미”로는 결코 세상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애당초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까닭은 교회가 교회답지 못했기 때문이지, 세상답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교회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 “에클레시아” 자체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모임”이라는 의미가 아니던가!
제아무리 시대적, 지역적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바른 말씀이 전파되며 세상으로부터 성별된 모임이 형성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에 사람들을 더해 주시기 마련이다. “여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쪽으로 압도적으로 기울었던 성읍, 예루살렘에서도 베드로가 요엘서와 시편의 곳곳을 인용하면서 설교하자 하루에만 3,000명이 교회에 더해졌던 것을 떠올려 보라(행 2:41).
복음이 전파되면 그것을 믿고 거듭난 사람은 자연스레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되어 있고, 그 말씀이 선포되는 장소에 가게 되어 있으며, 그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게 되어 있다. 바꿔 말하면 사람들이 교회에 오지 않는 까닭은 교회들이 이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기는커녕,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없는 스캔들에 휘말리고, 그에 대해 징계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고전 5:1,2). 또 사역자로부터 회중들까지 자신이 읽는 성경의 말씀을 절대불변의 진리요 무오하며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고, 시대적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온갖 세상적 요소들을 교회들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사람들의 호감만을 사려고 했기 때문이요(갈 1:10), 무엇보다도 거리로 나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전 9:16).
마지막 때의 교회들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싶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과거의 방식”으로 회귀하면 된다(렘 6:16). 시대를 풍미했던 청교도들, 재침례교도들, 보헤미안들, 모라비안들, 그리고 영국의 침례교도들과 감리교도들, 또 몇몇 훌륭한 성공회 출신 감독들이 그러했듯이 복음을 전파하고, 변개되지 않은 말씀을 가르치며, 회중들의 죄들을 꾸짖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하며 “반대 방향”에서 해답을 구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노라면(렘 44:16-18), “과거의 영광”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든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