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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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카 골짜기, 눈물의 골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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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04월호>

우리나라는 유독 골짜기가 많은 나라다. 전체 국토의 70%가 산악 지대인 지형적 특성 때문이다. “백두대간”(白頭大幹)으로 일컬어지는 북북서-남남동 방향의 산지가 탁월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우리나라는 “온대 몬순 기후”의 기후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산악 지형에 장마나 태풍 등으로 많은 비가 내리기에 “V”자형 골짜기들이 많이 생겨난 것이다. 이런 우리나라의 골짜기 모습은 대체로 좁고 깊으며 가파르고 항시 물이 흐른다.

하지만 모든 골짜기의 모습이 그런 것은 아니다. 지형이나 기후적 특성에 따라 골짜기의 모습도 다르게 나타난다. 이스라엘의 경우를 보자면, 이스라엘도 우리나라처럼 높지는 않지만 중앙에 산악 지대를 형성하고 있어서 이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V”자형 골짜기들이 있다. 이스라엘은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지중해성및 사막성 기후로 우리나라와는 달리 대체로 덥고 건조하다 보니 우리나라처럼 골짜기를 따라 물이 항상 흐르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골짜기들은 대게 “와디”(Wadi)라 불리는, 비가 올 경우에만 물이 흐르는 건천의 상태로 있을 때가 많다. 이런 골짜기들은 비가 오지 않는 대부분의 날들에는 길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골짜기 길을 따라 이동하며 일종의 교통로를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골짜기로 형성된 유명한 길 중 하나가 바로 실크로드의 텐산 산맥 골짜기이다. 이 골짜기 길은 중국 서부에서 중앙아시아로 가는 무역로로서 상인들이 골짜기와 협곡을 따라 이동하면서 동서 문명의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알프스의 브레너 골짜기 또한 유명한 골짜기 길이다. 로마 제국이 이 골짜기를 활용하여 도로를 건설했는데, 이 길은 북유럽과 남유럽을 연결하는 군사·무역로로 사용되었다. 현재도 이 길은 유럽의 중요한 도로로서, 철도와 고속도로와 터널까지 놓임으로써 유럽의 물류·교통의 핵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처럼 성경에서도 골짜기는 누군가가 걸어갔고, 걸어가고 있으며, 또 걸어가야 할 “길”로서 종종 묘사된다. 그래서 예레미야 2:23에서는 『골짜기 안에 있는 네 길을 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성경에서 모든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 곧 그 길로서 제시되는 골짜기들을 살펴보면서 신앙과 관련된 좋은 교훈들을 얻고자 한다. 우리가 첫 번째로 살펴볼 것은 “바카 골짜기,” 즉 “눈물의 골짜기”이다.

바카 골짜기는 시편 84:6에서 단 한 번 나온다. 히브리어 “바카”는 “눈물을 흘리다” 혹은 “울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뽕나무와 연관이 있다. 뽕나무의 열매인 오디를 눌러 짜면 그 즙이 동그란 방울로 맺혀서 천천히 흐르는데 그 모습이 마치 눈물 흐르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한다. 특히 그 즙이 남기는 붉은 자국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생채기가 난 마음의 흔적을 보여 주는 듯하다. 눈물의 골짜기가 나오는 시편 84:6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각자의 인생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해 볼 수 있다. 이곳에 태어난 모든 사람의 인생 여정이 바카 골짜기, 곧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는 여정인 것이다. 사실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울면서 태어난다. 그 첫발부터 눈물을 흘리면서 시작하는 것이다. 아기가 어머니 배 안에 있을 때에는 양수 속에서 탯줄을 통해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받지만, 그러다가 언젠가 세상으로 나오면 자기 폐로 직접 호흡을 해야 한다. 그 전환점에 있어서 아기의 첫 울음이 중요하다. 우는 과정에서 폐에 공기가 가득 차면서 자가 호흡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어난 아기가 울지 않는다면 아기가 호흡을 하는지 즉시 확인하고 조치해야 한다. 말하자면 아기의 엉덩이를 때려서라도 울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태어날 때부터 눈물의 골짜기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이후의 삶도 별반 다를 바 없다.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넘어져 무릎이 까지고 멍들면서 울고, 나이를 먹으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로 인해 마음이 상해서 울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 방황하다가 차가운 현실을 맞닥뜨리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원하던 사랑을 이루지 못해 울기도 하고, 부모나 형제자매 등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며 통곡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전장에서 흘리는 눈물도 있는데, 특히 6ㆍ25 전쟁 당시 수많은 고아들이 부모를 잃고서 거리에 나앉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어린아이가 무너진 집 앞에 앉아서 엄마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한 미국인 기자가 찍게 되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아이의 눈물을 보는 순간,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함께 울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슴이 아픈 일은, 아이가 세상의 슬픔을 알아차려 버릴 때이다.”

진보된 과학과 교육은 결코 인간의 눈에서 흐르는 그 눈물을 닦아 주지도 멈추게 하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음의 욥기 말씀처럼 눈물을 흘리며 고생하도록 태어났기 때문이다. 『역경은 티끌에서 오는 것이 아니요, 고생도 땅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지만 불티가 위로 날아가는 것과 같이 사람은 고생하려고 태어나느니라』(욥 5:6,7). 사실 태어날 때부터 죽음이 정해진 인간에게(히 9:27) 그가 죽음을 향해 가며 겪는 눈물과 질병, 가난, 고난, 궁핍, 질책, 근심, 고뇌, 전쟁, 고통, 죽음과 같은 것들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욥 14:1,2).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눈물의 선지자라고도 불리는 예레미야는 『오, 내 머리가 물이고, 내 눈이 눈물의 샘이라면, 내가 내 백성의 딸의 살육으로 인하여 밤낮 울리라!』(렘 9:1)라고 말했다. 아예 성경책의 이름에 “예레미야 애가”가 있는 그는 자신의 동족 앞에 펼쳐질 비극으로 인해 눈물 흘리기를 밤낮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렘 14:17). 다윗왕 또한 『주께서 나의 방황함을 헤아리시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그것들이 주의 책에 있지 아니하나이까?』(시 56:8)라고 말했다. 그는 눈물을 담을 병이 필요할 정도로 방황하며 고생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또한 눈물을 흘리지만, 그 눈물에 세상의 배척을 받는 고난이 더해져 더 험난한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고 있다. 『이방인들은 너희가 그들과 함께 같은 방탕에 휩쓸리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너희를 비방하나』(벧전 4:4).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심으로 사람을 바로잡으실 때 그의 아름다움을 좀과 같이 소멸케 하시나니 진실로 모든 사람이 헛되나이다. 셀라. 오 주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 눈물에 가만히 계시지 마소서. 나의 모든 조상들이 그러하였듯이 나도 주와 함께하는 타국인이요, 체류자이기 때문이니이다』(시 39:11,12).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처럼 목적 없이 방랑하는 방랑자가 아니다.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타국인이요, 이 땅에 잠시 잠깐 거하는 체류자이며, 자신의 본향으로 가는 순례자이다(벧전 1:17, 히 11:13, 엡 2:19). 즉 분명한 목적지가 있는 것이다. 『자기의 힘이 주께 있는 사람은 복이 있으니 그의 마음에 그들의 길들이 있으며, 그가 바카 골짜기를 통과하며 우물을 만드니 비도 그 웅덩이들을 채우나이다. 그들이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니 시온에서 그들 각자가 하나님 앞에 나타나나이다』(시 84:5-7). 이 말씀을 우리에게 영적으로 적용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세월이 짧고 험악한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 저 우주 북편 시온 산이 있는 우리의 본향, 곧 셋째 하늘로 갈 것을 소망한다(히 12:22, 계 14:1). 그렇기에 비록 이 땅에서 우리의 마음이 눈물로 얼룩진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는 소망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지니신 인자로서 오셨기에,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걸어가야 했던 눈물의 골짜기를 또한 동일하게 통과하셨다. 주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서 영으로 신음하며 괴로워하시다 우신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요 11:33-35). 이와 같이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는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거부되셨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질고에 익숙하신 분으로 계셨다. 사실 그것은 우리의 질고와 우리의 슬픔을 대신 지셨기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주님께 자신들의 얼굴을 숨기고 주님을 존중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분을 믿지도 않는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그와 같은 모순된 행동들을 견뎌 내셨고, 결국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시온 산에 계신 분께로 나아갈 수 있는 소망을 주시며 위로하신다. 궁극적으로는 성도들의 눈에서 그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계 7:17; 21:4). 낙심하고 눈물을 흘리는 성도에게 사람의 눈물을 아시는 주님께서 이러한 위로로써 위로해 주시는 것이다(고후 1:3; 7:6).

당신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러한 위로와 소망 가운데 이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고 있는가? 아니면 생채기 난 마음을 맨 손으로 부여잡은 채 가고 있는가? 이제 더 이상 세상에서 방황하지 말라. 더 늦기 전에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아 누리도록 하라. 『이는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로 인하여 우리 앞에 놓여진 소망을 붙잡기 위해 피난처를 찾아 나온 우리로 든든한 위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8).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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