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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의 언약 4 - 언약의 결단 의식 (신명기 3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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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10월호>

신명기 30장은 팔레스타인의 언약의 마지막 부분, 즉 회복을 예언한다. 하지만 그들이 회복한다는 것은 반드시 회개를 전제로 한다. 회개하지 않는 회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단 팔레스타인의 언약뿐 아니라, 성경에서 보여진 하나님의 모든 역사하심에 있어서 그렇다.

1. 회복의 약속 (30:1-10)

28장 후반부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스라엘은 범죄하여 온갖 고난을 당할 것이며, 그후에 그들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할 것이다. 30:1,2은 『내가 네 앞에 둔 복과 저주, 즉 이 모든 것이 네게 임하므로 네가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너를 쫓아내셨던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그것들이 마음에 생각나서 주 너의 하나님께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대로 너와 네 자손이 네 마음을 다하고 네 혼을 다하여 그분의 음성에 복종하면』이라고 말씀한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이 고난당하기 전 하나님께서 이미 경고하셨던 그 말씀들을 기억할 것이다. 자기들의 고난이 그들의 악한 행위, 특히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로 나아갔던 행위 때문임을 인정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 안에 온전히 있었을 때의 그 복된 모습도 기억할 것이다. 이러한 과거에 대한 기억은 성도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단순한 기억은 추억 이상의 의미가 없다.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신 경고의 말씀들을 기억해야 한다. 경고에 대한 기억은 성도로 하여금 돌이키게 하는 동력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할 때만이 치유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다.

(1) 약속의 땅으로 데려오심 (3-5절)
회개의 결과는 분명하다. 그것은 실제적인 회복이다. 3절은 『그때는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 사로잡힘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시어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를 흩으셨던 모든 민족들로부터 너를 돌이켜 모으시리라.』고 말씀한다. 특별히 여기에서의 회복은 흩어졌던 민족들로부터 다시 모으시는 것이다. 이 약속에 따라서 이스라엘은 반드시 자기 땅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이 예언은 두 경우에 성취될 것이다. 하나는 유다의 바빌론 포로 회복이다. 느부캇넷살에게 사로잡혀갔던 유다는 코레스왕의 칙령에 의해 귀환되는데, 그때 그들은 이방 땅에 흩어졌다가 돌아왔다. 또 하나는 아직 미래에 남아 있는 사건으로서, 대환란을 끝내고 메시야와 함께 그 땅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 두 번째 사건과 연관해서, 이스라엘이 1948년에 독립하여 자기 땅에 돌아온 것을 말할 수 있지만, 이는 완전한 회복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회개를 전제로 돌아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 바빌론에서 돌아온 때에도, 그들이 이방 땅에서 크게 회개했다는 구체적 기록은 없다. 하지만 다니엘 9장에서, 다니엘이 그 민족을 대표해서 회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고, 에스라, 느헤미야서를 통해 볼 수 있듯이, 돌아온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방 여인들을 취한 죄를 회개하는 등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통해 종교개혁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하지만 현대 이스라엘은 그와 연관해서 어떠한 회개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이 회개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메시야를 거절한 죄인데, 이 죄에 대해서 어떠한 언급도 없는 것이다. 과거 바빌론 포로 때는 우상 숭배 때문에 심판받았었다. 그래서 우상 숭배를 회개하고, 그후 이스라엘에는 국가종교로서의 이방 우상은 사라졌다. 현대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고난당했던 것은 메시야, 즉 그들의 하나님을 거절한 죄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죄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상태에 있다. 유대인 중 그리스도인은 극소수다. 따라서 현재 이스라엘이 제 땅에 있는 것은 회개를 전제하지 않은 불완전한 회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도우사 제 땅에 제 나라를 세우게 하셨지만, 그것은 앞으로 더 큰 예언을 이루기 위한 준비 과정일 뿐이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회개한 후 메시야와 함께 회복되는 것이 신명기 30장의 성취이다.
20세기 초부터 펼쳐진 소위 “시오니즘”(Zionism)이라는 것은 흩어진 유대인들이 고토로 돌아가자는 운동인데, 유대인들은 세계 곳곳에서 정계와 재계를 움직여 그들의 땅을 얻었다. 시오니즘의 궁극적 목표는 유대인들이 온 땅에 우뚝 서는 민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후 분명히 이뤄 주시겠지만, 문제는 그들이 메시야의 재림과 관계없이 그 일들을 이루려 한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힘으로 이루려는 시오니즘은 결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다. 심지어 그들은 프리메이슨의 음모를 통해서도 이 일들을 이루려 노력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적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될 것인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나 너희가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는도다. 만일 다른 자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영접하리라.』(요 5:43)고 경고하신 바 있다. 이스라엘은 결국 대환란을 당할 것이고, 적그리스도에게 극심한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후에 그들은 회개하고, 그들의 메시야와 더불어 진정한 회복을 이루게 될 것이다.

(2) 영적으로 회복시키심 (6-8절)
회복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할례”를 베푸실 것이다. 할례란 약속의 씨를 구별시키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그 씨부터 이방인들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육신적으로도 이방인들과 구별된다. 그런데 여기서는 “마음에 할례”를 베푸신다고 하셨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구별하신다는 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회개 없는 회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적인 회복 없는 물리적인 회복은 없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마음으로부터 온전하게 돌아가야 한다. 특히 크게 징계받은 후 회복될 때는 더욱 그러하다.

이 “마음의 할례”에 대해서는 로마서 2:29에서도 강조한다. 육신적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씨를 자랑하지만, 마음에 할례받지 못한 유대인들은 몸에 할례를 받았어도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몸에는 할례받지 않았을지라도 마음에 할례를 받았다면, 그 사람이 진정한 성도이다. 왜냐하면 그는 마음으로부터 구별된 백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에서는 육체의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차피 신약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명기 30장 본문에서 말하는 마음의 할례는 신약적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신약에서는 육신적 씨와는 상관없는 마음의 할례였지만, 여기서는 육신적 씨를 전제로 놓은 상태에서 마음까지 구별되는 할례를 말하는 것이다. 즉 유대인 중에서 믿는 자들을 말한다. 대환란이라는 극심한 고난을 겪을 때, 사실 대다수의 이스라엘은 더욱더 배교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다. 하지만 끝까지 믿음을 지켜 그들의 메시야를 맞아들일 이스라엘이 있다. 그들은 민족적으로 회개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위대한 약속을 이행하실 것이다. 그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될 것이고, 그분의 음성에 더욱더 복종하게 될 것이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에서 보는 바, 포로에서 회복된 이스라엘이 그와 같은 회개를 했었지만 그것은 얼마 가지 못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이스라엘은 분명 그렇게 할 것이다.

(3) 언약의 회복과 풍성한 복 (9절)
9절에서는 『...이는 주께서 네 조상을 기뻐하신 것같이 복으로 너를 다시 기뻐하실 것임이니』라고 말씀한다. 말하자면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바 그 언약을 다시 세우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받는 징계의 결말은 그 땅에서 쫓겨나는 것이었다. 그 땅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어 영원히 주시겠다는 땅이었는데, 그들이 쫓겨나는 것이다. 이것은 약속을 취소하신다는 것과 같다. 약속, 즉 아브라함의 언약이 취소된다면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다. 물론 취소되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상태에까지 이른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그들을 그 땅으로 데려오신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언약의 회복이다. 단순히 그 땅에서 살 수 있도록 하신다는 말이 아니라, 그 땅에서 다시금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 안에서 복락을 누리게 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축복을 누리게 하시겠다는 말이다. 그 축복의 결과 중 하나는 물리적인 풍성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손의 일과, 몸의 열매와, 가축의 열매와, 땅의 열매를 풍족케 하신다고 약속하셨다(9절)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조건은 “돌아오면...”이다. 『네가 주 너의 하나님의 음성에 경청하고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분의 계명들과 그분의 규례들을 지키고 또 네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혼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께 돌아오면 그리하시리라』(10절).

2. 양자택일 (30:11-20)

(1) 경고의 명료함 (11-14절)
하나님의 말씀은 명료하다. 애매한 명령으로 백성들의 결단에 어려움을 주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과 악이 뚜렷하며, 교리와 교훈도 분명하다. 또한 누구라도 쉽게 대할 수 있도록 가까이에 있다. 특히 지금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성경을 구입할 수 있다. 중세 암흑 시대처럼 라틴어로만 되어 있지 않다. 성경을 번역하거나 소지하면 죽이거나 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 따르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없다.
신명기 시대에도 어렵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에 있지도, 바다 건너에 있지도 않았다(12-13절). 말씀은 그들 바로 곁에 항상 있었다. 말씀은 그들에게 “아주 가까워” 그들 입에 있고 마음에 있어서 언제라도 행할 수 있었다(14절).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네 손에 매어 표적을 삼고 네 양 눈 사이에 표가 되게 할 것이며 너는 그것들을 네 집 기둥들과 네 대문들에 기록할지니라.』(신 6:8,9)고까지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은 누구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대할 수 있었다. 레위인들이 가르치고, 선지자들이 선포했다. 이스라엘은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 거절한 것이다.

(2) 양자택일 (15-20절)
팔레스타인의 언약은 그 자체가 양자택일이다. 어찌 보면 율법 자체가 양자택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 땅에서 복을 받고, 거절하면 저주를 받는다. 복과 저주의 선택은 전적으로 백성들의 몫이었다. 여기 15절에서도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선, 그리고 죽음과 악을 네 앞에 두어...』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길에서 행하고, 그분의 법을 지키는 것이다(16절). 살려면 생명을 택하라는 것(19절), 이것은 어떠한 위협이나 협박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하심에 따라 주어진 하나의 영적 원리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이 생명을 택하기 원하셨다. 그분은 그들의 “생명”이시요 그들의 날들의 “기한”이시다(20절). 또한 우리의 생명이시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을 사랑하게 하고, 그분의 음성에 복종하게 하며, 그분께 밀착하게 하려 하신다(20절). 이 말씀은 비단 카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동일한 교훈의 말씀이기도 하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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