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필사본 증거와 원문 성경 분류

말씀을 대적하는 악한 서기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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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0년 10월호>

지난 8월 말 세계성서공회연합회(UBS)의 원문성경편집위원회 모임이 우리 나라에서 있었다. 29일에는 성서공회에서 세 사람, 바바라 알란드(커트 알란드의 아내이며, 그의 뒤를 이어 신약본문연구소를 이끌고 있다.)와 아드리안 셴커(BHQ의 주 편집자)와 마뉴엘 진바키안(UBS의 성서번역 컨설턴트)의 강연회가 있었는데, 이날 강의의 2/3는 구약의 원문이나 칠십인역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을 소개하는 가운데 모인 사람들에게 구약 원문비평학에 대한 원리를 설명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BHQ(Biblia Hebraica Quinta)라는 새로운 구약 비평원본을 만드는 것으로서, BHQ란 BHS(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의 뒤를 이어 다섯 번째 판이라는 의미의 “Quinta”라는 말을 붙인 히브리어 비평원본을 말한다. 본문 자체는 슈트트가르텐시아와 동일하며, 비평장치에 있어서 좀더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들의 강의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믿을 만한 절대적인 성경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객관적인 자료라는 미명하에 여러 가지의 서로 다른 필사본들을 계열별로 분류해 놓고, 어느 하나 옳고 그르다는 말을 하지 못한 채, 이러한 자료들을 분석해 보니 이러이러한 장단점이 있다 하는 식으로만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흥미있는 것 중 하나는, 그렇게 객관적인 자료분석의 결과 비잔틴 계열의 다수 필사본들이 지금까지 알려져 있던 것과는 달리 그렇게 열악하지 않고 매우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바바라 알란드). 그러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어느 한 사본이나 원본에 대해 옳고 그름을 제시하지 않은 채, 이것도 저것도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는 식으로만 일관한다. 칠십인역에 대해 강의했던 아드리안 진바키안에게 한 청중이 “맛소라 원문과 칠십인역 중 어느 것이 더 우수하냐?” 라고 물었을 때도 그는, “둘 중에 어느 것이 우수하다는 것은 말할 수 없으며, 칠십인역이 쓰여진 시기에 대해서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절대적인 증거는 없다”고 말함으로써 칠십인역이 B.C. 2세기에 쓰여졌다는 신화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암시적으로 인정하고 말았다. 그래도 청중들은 70인역이 더 우수하다는 것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고, 표준원문이 열악하다는 말에 대해서는 안도의 한숨과 더불어 기쁜 소리들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강의하고 또 반응하는 것은 그들끼리의 공통된 믿음, 즉 표준원문(다수필사본, 비잔틴원문)은 열악하며 어떠한 사본들도 완벽한 것은 없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BHQ의 편집을 맡고 있는 프리벅 대학의 아드리안 셴커 교수는 그 다음날(8월 30일) 감신대에서도 구약 원문비평에 대해 강의를 했는데, 이 강의에서 그들의 생각이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먼저, 그는 성경의 사본들이 수세기에 걸쳐 내려오면서 왜 다양한 차이를 보이는가라는 의문에 대해서 “본문 자체의 난해성”을 지적한다. 비전문가가 어려운 본문을 필사할 때 특정 용어나 문장에 대해 잘못 베껴 쓸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구약은 신약에 비해 전문적인 서기관들이 고도의 주의를 기울여 필사했기 때문에 사실 필사 과정에서의 실수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어떤 본문이 다른 본문과 다르다면 그것은 의도적일 가능성이 크다.
이 점에 대해서는 셴커 교수도 동의한다. “성서 본문에 실수가 끼어들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본문 자체의 난해성이다. 성서 본문에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고, 그 결과 필사자들은 그 부분을 명확·단순화하여 본문을 보다 이해하기 쉽게 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 목적을 가지고 필사자들은 난해한 본문에 수정을 가하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수정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닌가? 이유나 목적이 어찌되었건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성경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수정하는 것은 명백히 성경에 손을 대는 ‘변개’인 것이 분명하다. 누가 보더라도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셴커 교수는 이 일들에 대해서 비평하기는커녕 그것이 기독교의 진리를 보호했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때로, 성서를 위탁받은 서기관들은 성서 본문에 고의적인 변경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는 이스라엘 종교건, 유대 종교건, 기독교건 간에 참된 종교에 반대되게 해석할 수 있는 오역이나 오해로부터 독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서기관들은, 기원전 2,3세기에 소위 서기관 수정(scribal emendation)을 가하여 독자들의 바른 믿음에 위협이 될 수 있을 만한 표현들을 삭제하였다.”
다시 말해서 이 불경스런 서기관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리를 표현하신 방법이 잘못되었기에 그 잘못으로 진리가 오도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실수를 덮어 그분을 도와드리기 위해 의도적인 삭제를 했다는 말이다. 물론 “서기관 수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는 가설이다. 모든 과학자들이 그렇듯이 이들도 역시 가설로 시작해서 한 가정을 만들어 내고 그 가정을 믿음으로 유포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여러 개의 필사본들은 몇 가지 “본문 유형”으로 나뉘어지게 되는데, 우리의 평범한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유형들 중 어떤 유형은 변개된 유형이고 어떤 유형은 보존된 유형이다. 엄밀히 말해서 아무리 많은 유형들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하나만이 옳고 나머지는 틀린 것이다. 옳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에 기록하신 말씀을 바르게 보존하여 필사하였다는 것이고, 틀렸다는 것은 그 말씀을 어떠한 의도에서건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유형이 얼마나 많건, 그것들은 모두 틀린 유형들이고, 변개된 유형들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각각 다른 유형들은 모두 독립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고, 어떤 한 유형에 대한 필사본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들은 모두 한 유형의 사본군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학자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드리안 셴커는 그렇게 수정한 사본들이 오히려 더 권위가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서기관 수정”들은 일개 개인들이 한 것이 아니라, 유대교 신앙 공동체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권위자들인 서기관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일개 개인이 감히 무슨 권위로 수정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러한 일은 신성 모독이었을 것이다. 오직 유대교 신앙 공동체의 공식적인 권위만이 이 거룩한 본문에 손을 대고 수정할 수 있는 권리를 지녔을 것이다. 이 때문에, 특정 본문 유형을 만들어낸 자는 공식적인 권위체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공식적인 권위체에 의해 만들어진 본문 유형은 신앙 공동체에서 공식적인 지위를 갖게 된다.” 그러니까 개인이 수정하면 신성 모독적인 변개가 되나, 서기관들이 수정하면 하나님을 돕는 일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전체 강의에서, 그러한 수정들로부터 진짜 원본의 형태를 찾아내는 것이 자기들의 작업의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무슨 수로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수정된 것들을 찾아 완벽한 형태로 원래의 모습을 찾아 복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설사 그렇게 해서 복원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처음의 본문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으며, 그들 스스로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럴 수 없기 때문에 BHQ에서는 본문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비평장치만 더 자세히 나열하는 것이다. 사실 난외에 비평장치가 많다는 것은 그 본문이 그만큼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읽는 성경 난외에 “2절은 원래 없었던 것이고, 3절은 어느 필사본에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고, 5절과 같은 유형은 소수 사본에만 나타나고, 6절은 고대 번역본에는 다른 형태로 되어 있고, 7절은 가장 오래된 필사본에는 이러이러한 말이 더 추가되어 있으며...”라고 빽빽이 쓰여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 성경으로 묵상이 되겠으며, 은혜가 되겠는가? 그 성경으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지겠는가? 아니 그 성경을 읽고 싶기나 하겠는가?

어찌 보면 이들 학자들은 여러 가지 본문 유형들이 얼마나 서로 다르든 간에 그 유형들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 유형들이 많을수록 자기들의 학문적인 입지가 더 견고해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보존이나 변개라는 개념 자체가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 쓰신 한 성경이 성도들을 통해 온전히 보존되어 믿음의 기반으로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다면 사본들을 찾아내는 학자들은 무엇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겠는가? 그래서 그들에게는 한 본문에 대한 상이한 본문 자료가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모세오경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기록하셔서 보존해 오셨다고 믿지 않고, 모세의 전승이 여러 가지 형태로 갈라져 내려오다가 후대에(이를테면 에스라 시대) 오경의 형태로 편집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본문 비평학의 업적이 모세오경의 원래의 형태, 즉 야훼 전승문서(J), 엘로힘 전승문서(E), 제사장 전승문서(P), 신명기 전승문서(D)로 되어 있었다는 것을 밝혀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출애굽기를 인용하면서 모세의 책이라 하셨으니(막 12:26), 예수님도 원문비평학적인 식견이 부족했다는 말이 된다.
셴커 교수는 히브리어 “베리트”(언약)라는 단어를 칠십인역의 번역자들이 헬라어 “디아데케”라고 번역한 것에 대해 강의하면서, 그들은 모세오경의 각기 다른 전승들에서 의미하는 바를 찾아내어 적절하게 번역했다고 말한다. “창세기에서 ‘언약’(베리트)이 게재된 첫 번째 네 이야기들은 땅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그 네 단락들 중 셋은 제사장 전승(P)에 속한다... 야휘스트 전승(J)도 마찬가지로 모든 생물들의 존속은 땅의 존속과...”
또한 그들의 이러한 연구는 교리적이거나 신학적인 견지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철저히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셴커가 강의한 “베리트”와 “디아데케”의 문제에 있어서, 이 “언약”이라는 용어가 성경에서 어떤 용례를 가지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 어떻게 그의 씨와 또 그가 받을 땅과 연관되어 있다든지, 또는 그 언약이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에게 상속된다든지, 그 언약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든지 하는 문제로는 전혀 접근하지 않는다. 대신 당시(그러니까 칠십인역이 B.C. 2세기에 이집트에서 번역되었다는 가정에 기초해서) 이집트의 사회적인 법제도에 있어서 “디아데케”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그것이 상속법과 계약에 있어서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해서만 접근하여, 칠십인역에서 그 단어의 번역이 얼마나 적절했는지만을 설명한다.
사실 “베리트”라든지 “디아데케”라든지 “언약”이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경영하심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언약을 하여 어떻게 다스리겠다는 것을 제시하시는 것으로, 각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경륜을 잘 나타내 보여주는 말이다(본지 93,94호의 「세대주의 특강」 코너를 참조할 것). 그 언약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구약과 신약이 나뉘어지기도 하고, 왕국이 세워지기도 한다. 그 용어는 단지 이집트의 상속 계약에서 풀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러한 사회학적 개념만을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성경의 영적 진리에 얼마나 무관심한 서기관들이냐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서기관들이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사람들이었다. 성경을 필사하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했다. 그들은 성경학자며 그 부분에서 존경을 받는다. 하지만 성경에는 좋은 서기관과 나쁜 서기관이 나온다. 좋은 서기관에 대한 실례로는 에스라를 볼 수 있다. 에스라는 서기관으로서(느 8:13), 백성들은 그에게서 율법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였고, 그는 신실하게 율법을 가르쳤다. 예수님께서도 천국의 신비에 관한 비유를 마치시고 제자들을 향해『그러므로 천국에 관한 교훈을 받은 모든 서기관들은 마치 자기 보물 창고에서 새 것들과 옛 것들을 꺼내 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 13:52)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고 적절하게 잘 가르치는 좋은 서기관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그렇게 되라고 하신 말씀이다. 반면 사복음서에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많은 서기관들의 무리가 등장한다. 사실 성경에 나오는 서기관들은 대부분 악한 서기관들이다. 그들은 당시에 하나님의 말씀들을 필사하고 관리했는지는 모르지만, 전혀 성경의 영적인 진리들은 깨닫지 못했던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했으며, 백성들로부터도 진정한 존경을 받지 못했다(마 7:29). 그들은 말씀을 가르치기는 했지만 상투적이었고, 전혀 신실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드리안 셴커의 말에 따라 유대 공동체의 권위를 등에 업고 하나님의 말씀을 수정한 자들이 있었다면 바로 이들이었으리라.
오늘 우리는 셴커 교수나 바바라 알란드, 그외 성서공회를 포함한 수많은 학자들 가운데에서 바로 그러한 서기관의 모습을 본다. 그들은 원문을 복원한다, 최초의 원본에 접근한다 하면서, 진정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어떠한 일이 생겨도, 하늘과 땅이 없어져도(마 5:18) 자신의 말씀을 영원히 보존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시 12:7). 이 약속을 못 믿는 자들이 방대한 자료들과 대학들과 교단들을 등에 업고 서기관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마 23:2). 그들은 말씀을 믿지 않기에, 신실하게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도 할 수 없다. 대신 그들은 어리석은 백성들을 거짓 길로 오도하여 하나님께서 높이신 그 말씀을 대적케 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 하시지 않았는가(마 23장)?『서기관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며,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에서는 가장 좋은 좌석과 잔치에서는 최상의 자리를 좋아하고... 이러한 자들은 더 큰 심판을 받으리라』(막 12:38-40). 오늘날 서기관의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 학자들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엄중한 경고를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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