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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을 뚫고 나아갔던 조나단 고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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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12월호>

손주영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강사

조나단 고포드(Jonathan Goforth)는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 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이름이다. 고포드는 1859년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한 농가에서 열한 명의 아이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성경으로 양육하고자 하는 여인이었지만, 자녀들을 구령할 성경 지식은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고포드는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를 주님께로 인도한 사람은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친 장로교 목사 라클란 카메론(Lachlan Cameron)이었다. 고포드는 그를 퍽 좋아하게 되어 먼 길을 걸어 그가 담임하던 교회에 출석했다고 한다. 고포드가 그 교회에 세 번째 출석했을 때, 카메론 목사는 회중들 중에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설교했다. 설교를 마친 뒤 카메론 목사의 강력한 초청이 있었을 때, 고포드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구주를 영접했다.

구원받은 즉시 헌신한 고포드는 하나님의 말씀에 큰 열성을 보였다. 처음에는 법률가나 정치인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고자 했지만,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의 전기를 읽으면서 전담 사역자, 특별히 복음전도자가 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카메론 목사는 그의 이런 결정을 매우 기뻐하면서, 자신의 시간을 쪼개어 고포드가 토론토 대학교의 녹스 대학(Knox College)에 입학할 수 있도록 라틴어와 헬라어를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고등학생 시절의 고포드는 자신의 부르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는 국내에서의 사역만을 계획하고 있었을 뿐, 해외 선교라는 선택지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만에서 선교 사역을 하던 G.L. 맥케이(G.L. Mackay) 박사가 고포드가 살던 지역에 와서 모임을 개최하는 일이 있었다. 그 모임에 참석했던 고포드는 강렬한 어조로 열변을 토한 맥케이 박사의 말을 이렇게 전한다. “2년 동안 나는 캐나다를 위아래로 다니면서 젊은이들에게 대만으로 넘어와서 나를 도와달라고 설득했지만, 그 일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아무도 그 비전을 붙잡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혼자 돌아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뼈들은 대만의 어느 언덕에 눕게 될 것입니다. 제 마음이 미어지는 것은, 제가 시작한 이 사역을 지속하라는 부르심을 그 어떤 젊은이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고포드는 맥케이 박사의 말에 대해 이렇게 간증한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부끄러움에 압도당했다. 쥐구멍에라도 숨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곳에는 내가 서 있었다. 주 예수님께서 보혈로 사신 존재인 내가. 감히 나의 생명을 나 좋을 대로 팔아 치워 버리려고 하는 내가 말이다.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랴? 우리가 누구를 보내랴?’ 그때 나는 대답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 시각부터 나는 해외 선교사가 되기로 했다. 나는 해외 선교에 대해 찾을 수 있는 모든 것을 탐독했다. 그리고 이 땅의 오지에 있는 복음화되지 않은 수백만 명의 필요에 대해 내가 붙잡은 비전을, 다른 이들도 붙잡게끔 하는 일에 착수했다.” 고포드는 맥케이 박사가 이야기했던 그 민족, 즉 중국인들을 위해 자신의 생을 바치기로 했던 것이다.

26세가 되던 해인 1885년, 녹스 대학에서 공부하던 고포드는 토론토 선교 연합(Toronto Mission Union)에 소속되어 복음 전파 사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빈민가에서 혼들을 주님께로 이겨왔는데, 도박굴이나 매음굴과 같은 곳에서도 서슴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전도지를 나눠 주었다. 한번은 고포드의 친구인 경찰관이 위험하기로 악명이 높은 거리에서 나오는 그를 보고는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그런 장소에 갈 용기가 났나? 우리 경찰들도 두세 명이 되지 않으면 들어가지 않는 곳인데 말이야.” 고포드가 답했다. “음, 나도 혼자 가는 건 아니야. 언제나 나와 함께 누군가가 있다네.” 그 “누군가”의 이름은 필시 『임마누엘』이었으리라. 『이를 해석하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마 1:23).
조나단 고포드는 토론토 선교 연합 모임에서 로잘린드 벨스미스(Rosalind Bell-Smith) 양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섭리적인 방법으로 둘을 이어주셨고, 벨스미스 양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고포드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고포드는 이런 말로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당신의 생명을 나의 생명에 결합해 주겠소? 중국을 위해서 말이오.”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후일 그녀는 남편의 신실한 동역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편의 사역을 알리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글 또한 그녀가 남편 사후에 집필한 전기, <중국의 고포드, Goforth of China>에 많이 의존했다.

조나단 고포드는 참 “지독한” 남편감이었다. 청혼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고작 스무 살에 불과한 로잘린드에게 이렇게 물었기 때문이다. “내가 언제나 나의 주님과 그분의 일을 최우선으로 삼을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심지어는 당신보다도 우선으로 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겠소?” 로잘린드는 속으로 숨이 턱 막혔지만, 그러겠다고 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여타의 여인들처럼 예쁜 약혼반지를 기대하고 있던 그녀에게 고포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약혼반지를 해 주지 못해도 괜찮겠소, 안 괜찮겠소?” 그리고는 녹스 대학의 학생들을 위해 중국에 관한 책과 팸플릿을 배포하는 일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한다. “마지막 한 푼의 돈까지도 그 중요한 일에 쓰여야 했다.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열정적으로 빛나는 얼굴을 보았을 때, 내가 탐닉했던 예쁜 약혼반지에 대한 환상은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실제적인 대가’에 대한 나의 첫 번째 수업이었다.”

학업을 1886년에 마친 조나단 고포드는 이듬해인 1887년 로잘린드와 결혼했고, 같은 해에 캐나다 장로교 총회로부터 중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당시에는 장로교회 출신으로서 중국에 선교사로 간 선례가 없었고, 그 필요성에 대해서도 큰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었다. 따라서 중국 선교란 수많은 반대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고포드의 열정은 그 모든 반대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했고, 그리하여 그는 아내와 함께 이듬해 상하이에 상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또다시 다양하고도 큰 장애물들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그중 고포드 부부를 가장 상심케 했을 만한 것은 아마 낯선 땅에서 질병으로 아이들이 죽는 모습을 보는 일이었을 것이다. 고포드 부부는 총 열한 명의 아이들을 낳았는데, 그중 다섯 명은 성인이 되기 전에 주님 곁으로 갔다. 그러나 고포드 부부는 그러한 슬픔 속에서도 그들의 이름처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go forth) 뿐이었다.

고포드 부부는 중국 내에서도 “미개척지”였던 허난성을 사역지로 삼았다. 그곳은 외국인을 배척하는 정서가 매우 짙은 곳이었기에 사역이 험난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실제로 1900년에 일어난 “의화단의 난”이 이 지역을 휩쓸었고, 어떤 기록에 의하면 그 난에 휘말려 188명의 선교사들과 32,000명의 중국인 그리스도인들(로마카톨릭교도들도 포함된 숫자겠지만)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고포드 부부도 그때 순교할 뻔했다.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는 고포드에게 이렇게 편지하기도 했다. “선교사로서 우리는 십 년간 남쪽으로부터 허난 지역에 들어갈 길을 찾아왔고, 이제 막 성공한 참이네... 형제, 그 지역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무릎으로 나아가야 할 걸세.” 그리고 이 말은 북허난 선교회의 슬로건이 되었다.

고포드 부부가 맞닥뜨려야 했던 또 다른 장애물은 언어였다. 고포드는 나중에는 문맹이었던 시골 농부들에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글자를 가르쳐 줄 만큼 중국어에 능숙해졌지만, 처음에는 매우 더디고 힘든 과정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였는지 그는 능숙하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몇 문장을 말할 수 있게 되자마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포드는 스스로의 말솜씨에 기대지 않고 가능한 한 성경의 말씀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파했고, 중국인들은 그 단순한 복음에 순종했다. 이후에도 고포드는 어디로 가든지 “단순하고 꾸준하게” 복음을 전파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고포드에게 중국 각지에서 복음의 문을 열어 주셨다. 허난의 창더라는 도시에서는 군인들을 대상으로 13일간 복음전도 집회를 열어 4,0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침례를 준 일도 있었고, 그의 말년에 사역했던 만주에서는 매년 수백 명의 구원받은 사람들이 침례에 순종했다고 한다.

<중국의 고포드>에는 “무릎으로 나아가라.”라는 허드슨 테일러의 조언이 담긴 편지가 소개되어 있는데, 그 장의 첫머리에 그가 남긴 또 다른 말이 인용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임무를 수행하는 일이 맡겨졌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불가능을 수행하실 수 있는 분과 함께 일한다.” 바로 이 말이 하나님께서 고포드 부부의 삶을 통해 보여 주시고자 했던 바가 아니겠는가!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전혀 없느니라』(눅 1:37).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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