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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만을 구했던 오스왈드 챔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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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04월호>
대개 인생이란 소설이나 연극의 지어낸 이야기처럼 연속적인 흐름을 갖지 못하고 불연속적인 우연의 파편들로 구성되기 마련이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의 인생에는 결코 우연이 없지만 말이다(롬 8:28). 이번 호에서 소개할 인물은 “우연의 사도”라고 소개된 적이 있을 정도로 예기치 못한 사건들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매번 간증을 남기는 삶을 살았다. 인생의 모든 “우연들”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성도라면, 이 사람에게서 많은 부분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1874년 7월, 스코틀랜드 애버딘의 한 사역자의 가정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그 사역자의 아홉 자녀들 중 여덟째였던 아이의 이름은 오스왈드 챔버스(Oswald Chambers)였다. 챔버스는 어린 시절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찰스 스펄전이 인도한 집회에 참석하여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면서 어린 챔버스는 이렇게 말했다. “제 자신을 주님께 드릴 기회가 있었다면 저는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러자 아버지는 답했다. “아들아,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란다.” 챔버스는 그 순간 가던 길을 멈추고 가로등 아래서 주님께 헌신 기도를 드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언젠가 믿음이 더 자라면, 하나님께서 큰 감동을 주시면, 또 좋은 기회가 찾아오면 헌신하겠노라고 생각하면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인 헌신을 기약 없는 미래로 미뤄 두고 산다. 그러나 사실 헌신이란 능력이나 감정, 기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챔버스는 후일
챔버스는 헌신된 그리스도인 청년으로 자라났지만, 전담 사역을 목표로 하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두각을 나타내었던 그는 런던 소재의 왕립 예술 대학과 에든버러대학교에서 예술을 공부했고, 자신의 부르심도 예술에 있다고 생각했다. 대학생 시절에는 이미 예술 작업을 통해 생계를 꾸려가던 “프로” 예술가였다. 그 시절에 몇몇 친구들이 그에게 선교 사역에 헌신해 볼 것을 권면했을 때 챔버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내 목덜미를 잡아서 던져 넣지 않으시는 한, 내가 선교 사역에 발을 내딛는 일은 없을 걸세.” 그러자 하나님은 그의 목덜미를 잡으셨다. 일감이 갑자기 확 줄어들어 재정적인 어려움에 직면하도록 하신 것이었다. 1896년의 어느 날, 챔버스는 에든버러에 있는 한 산에 올라가 온밤을 기도로 지새웠다. 주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던 중,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역으로 부르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챔버스가 우편물을 확인했는데, 거기에는 더눈성경신학교(Dunoon Bible College)라는 작은 신학교에서 온 안내서가 들어 있었다. 챔버스는 그 학교의 학장이자 설립자이며 신실한 목사요, 후일 챔버스 자신의 훌륭한 멘토가 된 던컨 맥그래거(Duncan MacGregor)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이듬해에 세계적인 명문 대학인 에든버러대학교를 떠나 고작 30명가량이 수학하던 조그마한 신학교에 입학했다. 챔버스는 졸업 후에도 31세가 되던 해인 1905년까지 그 학교에 머물렀다. 뛰어난 인재를 알아본 맥그래거 목사가 그를 강사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맥그래거 목사에게서 사역을 배운 챔버스는 학교를 떠나 영국과 미국, 일본을 순회하는 사역에 뛰어들었다.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저는 온 세상으로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라는 말씀을 뼈에 사무치도록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간다는 사실에 주님께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챔버스는 선교 사역 도중에 도쿄의 동양선교회성경학교(Oriental Missionary Society Bible School)라는 곳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미국 신시내티의 성경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면서 영국에 신학교를 세워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단순한 신학적인 지식을 전수하는 것을 넘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개인적인 삶까지도 가능케 하는 일종의 기숙 신학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1910년 5월,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숙련된 법정 속기사였던 한 헌신된 자매를 그 일의 동역자요 인생의 동반자로 삼게 하셨다. 챔버스는 자신의 아내를 부를 때 사랑받는 제자(Beloved Disciple)의 머리글자를 따서 “비디”라는 애칭을 사용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비디 챔버스”라고 불렀다.
비디 챔버스는 남편의 사역지에 늘 동행하면서 남편과 함께 사람들을 섬기고 복음을 전파하곤 했다. 1910년 12월, 두 사람은 런던 남서쪽의 저택을 임대하여 신학교를 설립했는데, 챔버스는 하나님께서 “그만”이라고 하신다면 언제든지 그렇게 하겠다는 태도로 사역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증거가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또 체면치레를 하기 위해 구차하게 사역을 연명하는 일은 챔버스와 거리가 멀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학생이 일 년에 한 명 이상 나오는 것만이 학교의 존속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친구가 학교에 기부금을 주겠노라고 했을 때(아마도 액수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챔버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닐세, 만일 자네가 기부금을 준다면 이 학교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보다 더 오래 갈 걸세.”
챔버스의 말마따나, 정말로 신학교를 시작한 지 4년도 채 되지 않아서 사역에 불가항력적인 제동이 걸리고야 말았다. 1914년 7월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뇌하던 챔버스는 이듬해에 YMCA의 파송을 받아 이집트 카이로에서 군목(軍牧)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비디와 런던에서 얻은 어린 딸 캐슬린과 신학교 학생 한 명도 얼마 후에 합류했다. 챔버스는 저녁 때마다 성경을 가르쳤고, 아내 비디는 언제나 공책을 가지고 남편의 강의 현장에 앉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속기로 받아 적었다. 파리와 모기 같은 해충이 들끓고, 의료와 위생에 있어서 낙후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챔버스는 사역 내내 한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의 몸은 그러한 환경을 견뎌 내지 못했다. 1917년 10월 말, 몸에 이상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부상병들에게 돌아가야 할 병상에 자신이 눕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여 치료에 소극적이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맹장이 터져 응급수술을 받아야 했는데,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주님 곁으로 갔다. 그때 그의 나이가 43세였다.
챔버스는 비록 죽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죽음이 사역의 종료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내 비디의 노트에 그가 선포했던 진리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친구들의 출간 요청이 비디에게 쇄도했고, 남편 사후에도 이집트에서 병사들을 돌보던 비디는 전쟁이 끝난 후에 영국으로 돌아가 그 일을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 해서 30권이 넘는 책들이 출간되었고, 특히 그중에서도 앞서 소개한 365일 묵상집인
만일 챔버스가 남을 조금 덜 생각하고 치료를 받아서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래서 꽃다운 나이에 가족과 지인들을 그리움에 사무치게 하는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더라면 아마 챔버스의 글들이 지금처럼 많은 이들의 손에 들어가 읽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죽음이라는 “우연” 앞에서마저도 챔버스는 “정답”을 제출했던 셈이다. 왜냐하면 챔버스에게 있어서는 죽음이 하나님과 성도들의 유익을 위한 가치 있는 열매였기 때문이다.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주께서 보시기에 값진 것이로다』(시 116:15).
오스왈드 챔버스처럼 하나님의 뜻만을 앞세우며 인간의 뜻이 개입할 그 어떤 가능성도 배제하려는 의지가 있다면(창 14:23), 또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떠한 것들보다도 낫다는 점을 믿는다면(대하 25:9), 그 사람은 직면하는 모든 “우연들” 속에서 “정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의 인생에 우연은 없다. 주님께 생을 의탁한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