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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주님을 바라보았던 프랜시스 리들리 하버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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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08월호>
손주영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강사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폭풍처럼 몰아치는 강력한 능력으로 우리에게 큰 도전과 힘을 준다. 예컨대 빌리 선데이, D.L. 무디, 찰스 피니 같은 사역자들이 그렇다. 이들이 가는 곳에서는 수백에서 많게는 수만 단위의 사람들이 구원받고 침례에 순종하는 등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났다. 반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고요하지만 깊은 강물과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 로버트 머레이 멕체인,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와 같은 사람들이 그렇다. 이들의 열매는 커 보이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그들의 자세와 경건은 그 자체로 교과서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주님과 생동감 있는 교제를 누릴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다. 이번에 소개할 인물 또한 바로 그런 자매이다.
영국의 찬송 작곡가이자 작사가인 프랜시스 리들리 하버갈(Frances Ridley Havergal)은 1836년 영국의 우스터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하버갈은 영국 국교회의 목사이면서 작곡가이자 작사가였으며, 그의 딸 프랜시스는 아버지 윌리엄의 여섯 명의 아이들 중에 막내였다. 프랜시스는 세 살 때 쉬운 책들을 읽을 수 있었고, 네 살 때는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는 혹시 그녀가 성경을 읽는 일에 싫증이 나거나, 생각이 아이답지 않게 조숙해 버리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했다고 한다.
일곱 살의 프랜시스는 시구를 쓸 수 있었으며, 자기가 쓴 시가 적힌 공책을 가지고 다녔다. 프랜시스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사랑하는 화니(프랜시스의 애칭)야, 하나님께서 너에 대해 준비하고 계신 그 모든 것들을 위해서 너를 준비시켜 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려무나.”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기도에 경청하셨고, 후일에 프랜시스에게 시와 음악, 그리고 언어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계속해서 열어 주셨다. 성인이 되었을 무렵 프랜시스는 영어를 제외하고도 헬라어와 히브리어,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프랜시스가 꼭 공부벌레인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나무나 벽을 곧잘 타고 오르는 민첩하고 발랄한 소녀였고 “꼬마 변덕쟁이”와 같은 별명이 그녀에게 붙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것과 달리, 프랜시스 본인의 자서전에는 그녀의 내면까지도 밝은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그녀는 여섯 살 무렵의 자기 자신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할로우에서 들었던 설교가 그 시작이었습니다. 아직까지도 그 독특한 내용이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제게는 매우 무서운 설교였는데, 지옥과 심판, 그리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손 안으로 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계속해서 언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설교는 저를 유령처럼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를 많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밤과 아침뿐이었지만요. 초조하고 참을성 없는 기도였고, 제가 느끼고 있는 비참한 감정에 대해서 거의 화나다시피 했었습니다. 저는 기도하면서 새로운 마음을 주시기를 원하고 기대했습니다. 모든 것이 단번에 바로잡히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요.” 그녀는 겉으로는 티가 잘 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흔들리는 구원의 확신 때문에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열한 살 때에 어머니를 여읜 프랜시스는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녀는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꼈고, 그분에 대해 생각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다. 물론 복음의 내용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은 것인지의 여부를 확신할 수가 없었다. 1851년 2월의 어느 날, 프랜시스는 이러한 고민을 소파에 함께 앉아 있던 캐롤라인 쿡이라는 자매에게 털어놓았다. 쿡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너 자신을 단번에 네 구주께 맡기지 못할 이유가 있겠니? 만일 지금 이 순간, 그리스도께서 오신다고 한다면, 너는 그분을 신뢰하지 않을 거니?... 그때에도 너는 네 혼을 네 구주이신 예수님께 맡기지 않을 작정이야?” 프랜시스의 마음속에는 그때 빛이 번쩍였다. “아닐 거예요. 분명히요.”라는 대답을 남기고 위층으로 뛰어올라간 그녀는 자신의 혼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쿡 양의 조언은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 자기 자신만을 계속 쳐다보면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구원을 받고 싶다면 그 시선을 위로 들어올려야 한다(민 21:8,9, 사 45:22). 스노우보드를 탈 때와 같은 이치이다. 보드를 움직여 보려고 발밑에 있는 보드만 뚫어지게 쳐다보면 넘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려는 방향으로 멀리 쳐다보면서 몸통을 돌리면 보드는 알아서 움직인다. 주님께 대한 올바른 생각과 감정을 갖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당신의 죄들로 인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구주 예수님을 바라보라(히 12:2,3). 그러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구원받고자 하는 마음이,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샘솟을 것이다. 이때 이후로 프랜시스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달콤하게 느껴졌다고 간증한다. 후일 그녀의 언니인 마리아에 의하면, 프랜시스는 사복음서, 서신서, 이사야, 시편, 소선지서, 요한계시록을 전부 암송했다고 한다.
프랜시스는 22세가 되던 1858년에 다시 한번 주님을 바라보고 큰 조명을 얻었다. 어느 목사의 집을 방문한 그녀의 눈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묘사한 그림이 들어왔는데, 그 아래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 했노라.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 그때 프랜시스는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친 시구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너를 위해 내 생명을 주었노라 / 나의 귀한 피를 흘렸노라 / 너 속량될 수 있도록 / 또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날 수 있도록 / 나는 주었노라, 나는 내 생명을 너를 위해 주었노라 /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 / 나는 주었노라, 나는 내 생명을 너를 위해 주었노라 /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 프랜시스는 이 시를 다 쓰고 나서 처음에는 졸작이라고 판단하여 벽난로의 불길 속으로 던져 버렸다고 한다. 어쩌면 주님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의 크기가 너무나도 커서, 어떻게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종이가 손상되지 않고 벽난로 밖으로 다시 나온 것이 아닌가! 프랜시스는 그로부터 수개월 후에 아버지에게 그 시를 보여 주었는데, 아버지는 그것을 잘 간수하라며 곡조 까지 붙여 주었다고 한다. 후일 미국의 필립 블리스가 이 시에 다시 곡조를 붙였고, 이렇게 해서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너 무엇하느냐」(<영광을 주께>, 348장)가 탄생할 수 있었다.
늘 주님을 바라보는 태도는 프랜시스 하버갈이 시를 쓰는 원칙이요, 삶의 원칙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런 시를 써야겠다.”라고 마음에 결정하고서 자리에 앉는 법이 없었다. 만일 주님께서 어떤 시상(詩想)도 주지 않으시면, 하버갈은 억지로 시를 쓰려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다른 일을 할 뿐이었다. 이와 관련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제게 있어 무언가를 쓰는 일은 기도와도 같습니다. 제 스스로는 단 한 구절이라도 쓰는 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마치 글짓기를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을 갖습니다. 아이들은 한 문장을 쓰고서는 위를 올려다보며 ‘이제 다음은 뭐라고 할까?’라고 하곤 하지요? 저도 딱 그렇게 합니다.”
사실 하버갈에게 있어서 주님을 계속 바라보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구원의 확신을 얻은 이래로 늘 주님을 위해 살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10대 시절 단독(丹毒)이라는 피부병을 심하게 앓은 후에 평생 동안 몸의 고통이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그녀의 건강은 심지어 의사가 펜과 삶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권고할 정도로 나빴고, 실제로 병상에 누워 시를 쓰지 못했던 때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도 하버갈은 낙심하지 않았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하버갈은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많이 쓰임을 받은 사람 중에 어떤 특별한 대기 기간을 갖지 않았던, 그러니까 스스로의 계획들이 완전히 전복되어 버린 적이 없었던 사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하버갈에게 매일 아침 십수 개의 편지를 쓰고, 교열을 보고, 글을 쓰고, 찬송시와 찬송가를 쓰고, 매주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인생을 살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셨다.
1879년, 43년간의 짧은 인생길을 마친 하버갈은 의사로부터 작별 인사를 받았다. “오늘이요? 아름답군요. 정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좋아요!” 늘 주님만을 바라보았던 그녀는 삶도 죽음도 행복했다. 하버갈은 자신의 시에서와 같이 찬송을 부르면서 주님 곁으로 갔다. 그녀는 역작으로 손꼽히는 “Take My Life and Let It Be” (<영광을 주께> 371장, 「나의 생명 드리니」)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나의 생명을 취하시어 만드소서 / 성별되도록, 주님께로 / 나의 순간들과 날들을 취하시어 / 끝없는 찬양 속에 흐르게 하소서...”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