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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간증 - 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종이 되었는가? (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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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1월호>
내가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해서 가족을 데리고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디마스(San Dimas, CA)로 유학길에 올랐던 때는 1981년 11월이었다. 나는 대한항공의 조종사로서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태평양 상공을 400회 이상 비행했고, 중동과 유럽에서 비행했던 시간을 포함하면 1만 시간이 넘는 동안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누볐다. 정들었던 대한항공에 사표를 냈을 때는 몰랐지만, ‘이제 민간항공사 비행은 마지막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 감회는 군용 비행기 O-1A(또는 O-1E, 정찰 비행과 작전 연락 임무 수행)를 더 이상 타지 못한다고 했을 때의 아쉬움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나는 비행에 소질이 있었는지 조종을 잘했다. 항공학교에서도 1등을 했지만, 15사단에서 복무했을 때는 소위인 내가 사단장이었던 유병현 소장과 강원채 소장 등을 모시기도 했다. 나는 보잉 707을 오클랜드(Oakland, CA)에 있는 팬암 항공(Pan Am Airways)에서 배웠고(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내가 훈련받았던 때가 마지막이었다.), 보잉 747은 달라스(Dallas, TX)에 있는 아메리칸 항공(American Airlines)에서 배웠다.내가 신학대학에 입학했을 때 교수들과 동료들은 민간항공사 조종사가 이 신학교에서 공부하려고 조종사를 그만두고 입학했다는 일로 설왕설래했다. 나는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같은 반에서 만난 피트 맥킨지(Pete McKenzie)라는 젊은이와 친하게 지냈는데, 그는 라스베이거스(Las Vegas, NV) 출신으로 준수한 외모와 명석한 두뇌를 지녔으며 언제나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슬하에 두 아들이 있었고, 그가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얻은 일란성 쌍둥이 여아들은 선천적으로 심장에 문제가 있어 양육하는 데 고생이 많았다. 두 아이가 하루 종일 심장에 장치를 달고 있어서 부모는 늘 노심초사했다. 고향인 라스베이거스에서는 맥도날드 햄버거 가게에서 이 가정에 평생 무료로 햄버거를 먹을 수 있는 특혜를 베풀기도 했다. 그의 가족은 가장이 신학교 학생이었기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캘리포니아 주 샌디마스에서 기거하였고, 주말이면 가족 전체가 라스베이거스로 가서 피트의 아버지와 함께 지냈으며, 그들이 속한 교회는 라스베이거스성경침례교회(Las Vegas Bible Baptist Church)였다. 피트의 아버지는 미 해병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이오지마 섬에서 일본군을 대항하여 싸운 전쟁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곤 했다. 그는 전투 중에 포탄 소음으로 청력에 손상을 입은 이후 줄곧 고생해 왔다. 우리 가족도 두어 번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그들과 함께 주말을 보낸 적이 있었다. 내가 혼자 그곳에 갈 때면 모텔보다는 피트의 집에서 방을 하나 얻어 지냈고, 나는 그들에게 LA갈비를 사다가 내 나름대로 마늘 가루 양념을 하여 바비큐를 해 줬는데, 그 가족은 내가 만들어 준 바비큐를 너무나도 맛있게 먹었다.
그 집에서 묵던 어느 날 밤, 자정이 지나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거실 TV에서 비디오테이프가 재생되고 있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 없이 전원을 끄지 않은 채 놔둔 것이었다. 무슨 영상인가 싶어 보았더니 어떤 나이 먹은 사람이 성경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요한계시록 강해였는데, 나로서는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강의에 매료되었고, 놀랍게도 처음 듣는 내용이었지만 마치 나를 붙들고 집중해서 강의하는 것만 같았다. 그날 밤 두어 시간 그렇게 보내고 잠을 청했는데, 너무 생동감이 넘치는 강의라서 더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날이 새자, 나는 피트에게 밤중에 들었던 비디오테이프 이야기를 했다. 이에 그가 피터 럭크만(Peter S. Ruckman) 목사님의 요한계시록 강의라고 알려 주면서, 럭크만을 따라올 성경 교사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통틀어도 없다고 말해 주었을 때 나는 매우 놀랐다. 피트는 그날 나에게 럭크만 목사님이 쓴
나는 즉시 럭크만 목사님을 만나려고 펜사콜라(Pensacola, FL)행 왕복 비행기 표를 산 후 럭크만 목사님 집으로 전화했는데 그의 아내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먼저 나를 소개하고 럭크만 목사님을 뵈러 펜사콜라에 가겠다고 알렸다. 펜사콜라를 플로리다 주 남쪽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 도시로 짐작했었는데, 알고 보니 플로리다 북쪽에 위치하여 앨라배마 주와 나란히 있었다. 그곳 백사장은 글자 그대로 하얀 모래뿐이다. 멕시코 만 연안 지역이라 투망으로 숭어를 잡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또한 그곳에는 미 해군항공기지(Naval Air Station)가 있고, 해군항공박물관도 있어서 1년 내내 많은 관광객을 부르고 있다. 나는 럭크만 부인에게, 차가 없으니 교회에서 가까운 모텔을 예약해 달라고 부탁했고, 초행길이니 나를 안내할 안내자가 공항에 나와 주면 감사하겠다고 말했다. 럭크만 부인은 나의 전화번호를 묻고는 전화를 끊었다. 몇 분 후에 다시 전화가 와서, 누군가가 공항에 배웅하러 갈 것이며 모텔도 교회에서 가까운 곳에 예약했다고 말해 주었다.
펜사콜라는 작은 도시가 아니었다.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횟수만 봐도 누구나 그 점을 감지할 수 있다. 비행기에서 내려 출구로 향했는데, 양쪽에 마중 나온 사람들을 둘러봐도 나를 영접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쉬지 않고 수하물 찾는 곳까지 걸어가고 있었는데, 저쪽에 키가 작고 나이 먹은 한 노인이 헌 운동화에 작업복을 입은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친한 친구처럼 포옹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가 바로 피터 럭크만 목사님이었다.
우리는 예약한 모텔로 가서 체크인했는데, 나의 숙소는 2층이었다. 미국에 처음 온 사람은 현지에 있는 자기 친구가 연락할 때까지 모텔 방에서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해야 행여나 나를 만나러 올 친구의 차가 고장이 났거나 사고 났을 경우 연락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은 수요기도회가 있는 날이어서 럭크만 목사님은 5시 30분에 오겠다고 말한 후 모텔을 떠났다. 목사님과 헤어지면서 나는 그분의 성격이 몹시 급하다고 짐작하여 5시 30분 이전에 모텔 정문에 나가서 기다렸다. 내 추측이 맞았다. 만약 그가 모텔에 와서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2층에 있는 내 방까지 올라와서 노크했는데 내가 잠시 눈을 붙이느라 떠날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면 그것은 결례이고, 특히 성격이 급한 사람에게는 더욱 짜증 나는 일 아니겠는가!
나는 곧장 목사님 차로 교회에 도착했다. 목사님은 나에게 어디에 가 있겠느냐고 물으셨다. 펜사콜라성경신학원(Pensacola Bible Institute, PBI)은 수요일에도 정규 수업이 있었다. 나는 신학교 강의실로 가겠다고 했고 목사님 시간에 그 교실에 들어갔는데, 무슨 과목인지는 몰랐지만 마침 시험 시간이었다. 나는 PBI에 와서 말씀에 갈급한 헌신된 학생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했다.
수요기도회가 저녁 7시에 시작되었는데, 목사님은 독일에서 온 목사에게는 그 자리에서 자기소개하라고 하시더니, 그날 처음 방문한 나에게는 강단에 올라와서 간증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는 원래 대한항공 보잉 747 조종사였는데, 1978년에 구원을 받고 성경을 공부하려고 캘리포니아 주 샌디마스에 와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석사, 박사 과정은 글렌데일에 있는 캘리포니아신학대학원(California Graduate School of Theology in Glendale, CA)에서 공부했고, 한글개역성경이 심각하게 틀린 것을 알았기에 <헬라어 표준원문과 비교해 본 한글 성경의 번역상의 오류>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헬라어 표준원문에서 사복음서를 번역하고 있는데 달라스신학대학원(Dallas Theological Seminary)의 신약과장인 제인 하지스(Zane C. Hodges) 교수의 사사(師事)로 작업 중에 있습니다. 만약 제가 럭크만 목사님을 먼저 알았다면 목사님께 도움을 청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미국의 신학자 중에서 럭크만 목사님이 가장 점수를 많이 준 학자가 제인 하지스 교수였다. 왜냐하면 제인 하지스 교수는 <다수필사본>(원제목 : The Greek New Testament According to the Majority Text)을 아더 파스타드(Arthur L. Farstad)와 공동으로 편수하여 원문비평학 관점에서 <헬라어 표준원문>(Greek Textus Receptus)과 동일한 필사본으로 분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주 편수자”가 폰 소덴(Von Soden)이라는 것을 모르는 학자들이 많았다. 나는 럭크만 목사님께 <다수필사본>은 폰 소덴이 편수한 것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정말 그러냐면서 크게 반기셨다.
예기치 않은 간증 시간에 나는 내가 아는 대로 말했을 뿐인데, 럭크만 목사님은 나를 대단한 한국인 신학자라고 점수를 주셨다. 목사님과 나는 수요기도회 때 목사님 집무실에서 함께 기도했다. 신학교 수업은 계속되었고, 마침 그 교회 직원인 한 청년이 자기 집에 나에게 필요한 자료가 있으니 주겠다며 같이 갔다 오자고 해서 나는 윗옷을 교회에 벗어 놓은 채 그를 따라나섰는데 거리가 꽤 멀어 즉시 후회했었다. 교회로 돌아와 보니 강의는 이미 마지막 시간이었다. 나는 무엇을 들었는지도 모르게 졸리기 시작했다. 럭크만 목사님은 나에게 배고프지 않으냐고 물으셨다. 비행기에서 점심으로 조촐한 기내식을 먹은 지가 열 시간이 넘었는데 왜 배가 안 고프겠는가? 목사님은 드라이브스루(drive-thru) 샌드위치 가게에서 로스트비프 샌드위치와 드링크 하나를 사서 내게 건네주시며, 내일 아침 7시에 자기 아내와 함께 아침을 먹자고 말씀하셨다. 내가 차에서 내릴 때, 목사님은 내 윗옷 안주머니에 돈이 들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깜짝 놀라서 무슨 돈이냐고 물었더니 교회에서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하셨다. 숙소에서 꺼내 보니 250달러였다. 여행자에게는 큰돈이었다. 목사님은 그만큼 사려가 깊은 분이셨다.
다음 날 아침 6시에 기상해서 씻고 모텔 정문에 나가 목사님 내외를 기다렸다. 약속 시간에 미리 나와 있었던 점이 목사님의 환심을 사는 데 한몫했다. 나는 사모님을 소개받고 뷔페식당에 가서 아침을 먹었는데, 목사님이 음식을 가지러 간 사이에 사모님은 나에게 자기 남편이 집에 들어올 때면 사람보다 신발이 먼저 들어온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짐작할 수 있었다고 대꾸해 주었다. 아침을 먹고 났는데, 목사님은 나에게 어디로 가겠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질문이 의아해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교회로 가겠다고 대답했다. 교회는 넓은 대지에 예배실, 서점, 신학교 교실 등이 배치되어 있었고, 특이한 점은 체육관이 갖춰져 있었는데 그곳은 하키장이었다. 목사님은 하키를 정식으로 배운 분이며 아이스하키뿐만 아니라 필드하키도 할 수 있었고, 그것도 포지션 중에 제일 어려운 골키퍼를 맡으셨다. 목사님은 76세에 태권도 초단을 땄다면서 나에게 한국인 사범을 소개해 주셨다. 90세가 다 되어서도 매일 1마일 이상을 맨발로 달리고 수영을 즐기셨다.
목사님은 나에게 교회 시설들을 보여 주시면서 성경을 제외한 목사님의 저서들을 제작하는 인쇄 및 제본 시설들과 함께 일하는 일꾼들을 나에게 소개해 주셨다. 나는 서점에 들어가자마자 거기에 전시된 책들을 모두 한 권씩 샀다. 서점 직원들은 한국의 갑부가 방문한 줄 알고 부산히 손을 놀렸다. 이 책들은 항공기로 보낼 것이니 단단히 묶어 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나는 목사님에게 이 책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번역권을 나에게 주실 수 있냐고 여쭈었다. 목사님은 간단하게 “Help yourself.”(원하는 대로 하세요.)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거기서 일하는 비서에게 목사님을 모시고 가서 지금부터 목사님이 부르시는 대로 타자해 달라고 했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나는 나의 모든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출간하는 모든 권한을 이송오 형제에게 준다.” 그리고 목사님에게 그 종이를 보여 드리며 여기에 서명해 주시라고 한 후 서명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아울러 펜사콜라성경신학원(Pensacola Bible Institute)의 한국 분교 설립도 허락을 받았다. 같은 교재, 같은 학제, 같은 교수 방법, 이 세 가지 조건하에서 한국에서도 드디어 1991년에 펜사콜라성경신학원이 개설되었다. 학교를 운영하려면 교수, 학생, 교과서 이 세 가지가 갖추어져야 하는데, 당시 우리에게는 세 가지가 다 미비했었다. 신촌의 한 건물 7평짜리 사무실에서 문을 열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첫 학기에 등록한 성인 학생이 9명이었다. 보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 아닌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아니고서 우리가 누구를 향해 도와 달라고 기도하겠는가? 십수 년 후에 출석 학생이 적어서 “킹제임스성경신학교”를 설립하여 온라인으로 교육하려고 했을 때도, 주님께서는 때맞춰 학생들을 보내 주셔서 명맥을 유지하게 해 주셨고 올해까지 제31회 졸업생들을 배출하게 해 주셨다.
『주의 법 안에서 행하여 그 길에서 더럽혀지지 않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그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그를 구하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그들은 또한 죄악을 행치 아니하고 그의 길들에서 행하는도다』(시 119:1-3).
『오, 주의 규례들을 지키도록 나의 길들을 인도하소서! 내가 주의 모든 계명들을 존중할 때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주의 의로운 명령들을 배울 때 정직한 마음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시 119:5-7).
다음 날 아침에 모텔 주차장에 내려가 보니 예쁜 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 차는 다름 아닌 사모님의 차였는데, 내가 펜사콜라에 머무는 동안 편하게 쓰라고 두고 가신 것이었다. 목사님 내외의 사려 깊은 모습에 나는 또 한 번 감동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아무런 불편 없이 가고 싶은 곳들을 다 다녀 볼 수 있었다.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생업과 성경 번역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나에게 펜사콜라에서의 시간은 잠시나마 꿀맛 같은 휴식이었다.
내가 신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선정한 교재 중 하나는 선교사 알반 더글라스(Alban Douglas)가 쓴 작은 책자로 <가정성경공부 100과>라고 명명한 책자였다. 내가 앞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에서 이집트 카이로, 영국 런던, 독일 프랑크푸르트, 프랑스 파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비행하며 머물렀던 호텔에서 번역하였다는 바로 그 책이었다. 우연의 일치 같지만, 그 책을 기반으로 럭크만 목사님도 23권의 얇은 책자들을 만드셨고, 그 뒤에 5권의 책으로 다시 제본하여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때때로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함을 감지했다. 나는 우리 신학교에서 그 23권의 영어 책자를 교재로 삼아 눈으로는 영어로 된 책을 읽으면서 입으로는 우리말로 강의했다. 현재 킹제임스성경신학교에서 사용하는 <설교학>, <지역 교회> 등의 교재들은 성경을 번역하고 교열하던 당시 그 바쁜 시간 속에서도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만들었던 교재들인데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은 무엇 하나라도 허투루 쓰인 것이 없고 버릴 것도 없다.
알반 더글라스 형제가 쓴 책을 어떻게 럭크만 목사님과 내가 관심을 가지고 “두 신학교”(펜사콜라와 서울)에서 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단 말인가! 후에 나는 그 책을 편집해서 “피터 럭크만의 조직신학”(1,040페이지)으로 만들어 럭크만 목사님에게 선물했다. 펜사콜라에서 머물렀던 일주일은 금세 지나갔고 캘리포니아로 돌아갈 날이 되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는데, 럭크만 목사님 내외는 나에게 한 주 더 머물고 가면 안 되겠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이미 비행기 표를 예약해 뒀기 때문에 일정을 취소하려면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목사님 본인이 다 지불하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일주일을 더 머물며 그분과 교제를 나눴다. 그러나 목사님 역시 격무로 인해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고, 그래서 어느 날은 신학교 강의가 끝난 늦은 밤에 멕시코 만에서 새벽녘까지 숭어 투망질을 하면서 교제하기도 했다. 다음 날 점심에 사모님은 전날 밤에 잡은 숭어로 맛있는 요리를 대접해 주셨다.
신학교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월간 <성경대로믿는사람들>(Monthly, Bible Believers)을 펴내기 시작했고(1992년 3월 30일 창간),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중단 없이 출간하여 이번 호(2021년 1월호, 통권 346호)까지 이르고 있다. 그동안 우리 성경침례교회는 일곱 번의 마귀의 공격을 받은 경험이 있고 교인들도 수십, 수백 명이 이탈했지만, 월간 <성경대로믿는사람들>은 단 한 번도 발행이 중단된 적 없이 이어져 왔다. 그때마다 글을 쓰고 투고한 손길들을 주님께서 유감없이 들어 쓰신 것이다. 당시 나의 삶은 새벽 6시에 기상하여 밤 10시 30분에 침대에 누울 때까지 땀으로 푹 젖은 하루를 보내야 하는 바쁜 나날이었다. 운동이라고 해 봐야 집이 합정동에 있었기에 새벽녘에 양화대교 밑 고수부지에서 성산대교 밑까지 한 바퀴 달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이었다. 낮에는 성경 번역과 교열에 몰두했고, 다른 과목의 책들을 펴내는 데 시간을 썼다. 또한 월간 <성경대로믿는사람들>을 매월 발간하여 우리의 사역을 이해시키는 데 열의를 쏟았다.
하나님의 부르심(Divine Calling)을 받지도 않은 사람을 강단에 세우면, 과연 그가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설교를 조리 있게 할 수 있겠는가? 자기 몸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는데, 성령님께서 그 사람 안에 거하시면서 설교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도우시겠는가? 모두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의 교단 교회들을 보라! 바른 성경의 등장 없이 적어도 150년 이상을, <한글킹제임스성경>과 비교했을 때 3만 6천 군데 이상이나 틀린 성서를 써 왔다. 그 열매가 무엇이었는가? 예수 믿으면 부자 되고 만사형통한다면서 사람들을 오도했다. 그런 일을 하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던가?
라스베이거스성경침례교회의 담임목사도 한국의 우리 교회를 다녀간 적이 있었다. 내가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그의 집에서 머무르는 일주일 동안 그의 아내는 단 한 번도 가족에게 식탁을 마련하지 않았다. 나는 여비를 아끼기 위해 목사 사택에서 머물렀던 것이 아니다. 나는 끼니때마다 맥킨지 목사의 가족 6명을 데리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했고, 그렇지 않으면 시장에서 식료품을 사 와 집에서 불고기나 갈비를 구워 저녁을 함께 먹었다. 라스베이거스는 도박을 즐기는 사람들을 더 많이 모으기 위해서인지 음식값과 호텔 방값이 매우 저렴했다. 6명의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나의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그 무렵 그의 아내는 어떤 병원 의사의 말에 넘어가 가출이 잦았다고 했다. 결국 맥킨지 목사는 이혼 수속을 밟았다. 그리고 다른 주에서 살던 자기보다 12살이나 많은 과부 여인과 사귀었다. 나는 그에게 그 여인과 결혼하지 말라고 충고했으나 결국 그들은 가정을 꾸렸다. 비극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둘째 아들이 권총으로 자살했고, 쌍둥이 두 딸은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그나마 피트의 큰아들은 결혼한 후 라스베이거스 일류 호텔에서 셰프로 일하며 생활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교회에 가끔 출석했다. 어느 날인가 공동묘지에 가서 자살한 둘째 아들 네이탄(Nathan)의 묘지를 보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모든 초목은 뽑힐 것이라』(마 15:13). BB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