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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러스 필드(Cyrus Field)의 불굴의 의지 -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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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7년 03월호>
대서양 해저 케이블(Cable) 설치의 신화 (1858년 7월 28일)전기는 요람 단계에서부터 이미 하나의 헤라클레스(Heracles)였다. 전기는 그것이 발명되었던 그때까지의 모든 법칙들을 무너뜨렸으며, 모든 타당한 척도들을 파괴시켜 버렸다. 전기가 인류 문명의 최상의 이기(利器)였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전기가 없었다면 전보도 없었을 것이다. 전보는 나라들, 산들, 강들을 넘어 지구의 구석구석을 뛰어넘어 가는 괴물 같은 힘을 얻게 되었다. 전보는 공간과 시간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전에는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급한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빨리 달리는 사람들을 쓰기도 했고, 상당한 거리를 두고 군데군데 역마를 두기도 했다. 그러다가 전기가 발명되자 가장 먼저 실용화된 것이 전보가 아니었나 싶다. 사람이 가지 않고서도 먼 곳(대양)으로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1837년은 전보가 인간의 체험을 동시적인 것으로 만들어 준,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해였다. 역사에서 그 어떤 날짜도 이런 시간 가치의 변화로 생겨난 광범위한 심리 작용에 비교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이 전류를 흡수해 버리기에, 전기를 바닷속으로 통과시키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구리와 철로 만들어진 줄을 절연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고무 비슷한 "구타페르카"(Guttapercha)란 물질임을 알아냈다. 블레리오(Bleriot)는 비행기로 영불 해협을 최초로 건넜고, 브레트(Brett)라는 사람은 통신 케이블을 설치했다. 그런데 영국 도버(Dover)와 프랑스 칼레(Calais) 및 불로뉴(Boulogne) 사이에서 고기를 잡는 한 어부가 이 케이블을 장어라 생각하고 잘라 버렸던 일도 생겼다. 기술자들의 오랜 시간에 걸친 각고 끝에, 1851년 11월 13일 두 번째 시도가 성공했다. 이 사업에 영국이 참여함으로써 영국과 유럽이 하나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영국과 아일랜드, 덴마크와 스웨덴, 코르시카와 유럽 대륙은 자체 전신망을 서로 연결했다.
한편 전신망에서 제외된 것은 미국이었다. 대서양은 너무 넓기에, ① 바다의 깊이가 측정되지 않았고, ② 대양의 지질학적 구조도 아직은 불확실한 상태로만 알려졌으며, 또한 당시는 ③ 전선이 깊은 곳에서 엄청난 수압을 견딜 수 있는지도 시험되지 않았던 때였다. ④ 설령 케이블을 그 깊은 바닷속에 던져 넣는 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할지라도 철과 구리로 된 2천 마일짜리 전선을 실을 수 있는 배가 아직은 없었다. ⑤ 혹 증기선으로 실어 나를 수 있다고 쳐도 2,3주가 걸리는 먼 거리를 끊이지 않고 전류가 흐르게 하려면 엄청난 전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전력을 생산할 발전기도 아직 없었다. ⑥ 이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지식도 뒷받침되지 않았다. 모스(Morse) 부호를 만든 모스까지도 그런 발상은 예측할 수 없는 모험이라고 말했다. 대서양을 잇는 케이블 설치가 성공한다면 그것은 세기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 될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하나의 기적 혹은 기적 같은 일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이 기적을 믿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한 사람의 굽히지 않는 소박한 용기야말로 학자들의 주저함에 창조적인 충격을 줄 수 있음은 너무나 당연했다. 하나의 단순한 우연이 거대한 계획에 추진력을 부여했다. (항공기, 잠수함, 대형 화물선, 컨테이너선, 호화 여객선, 우주선, 우주 정거장, 달 착륙, 화성 탐사, 각종 전쟁 장비와 무기들, 정교한 스마트폰 같은 전자 제품들이 모두 그렇지 않은가!)
1854년 기즈번(Gisborne)이라는 영국 기술자가 미국 뉴욕(New York)에서 북동쪽 끝에 위치한 뉴펀들랜드(Newfoundland)까지 케이블을 설치하려고 했다. 배에서 오는 소식을 남들보다 먼저 듣기 위해서였다. 그 일을 하는 도중에 돈이 바닥나 일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뉴욕으로 돌아와서 돈 있는 사람을 찾으려 했는데, 아주 우연히 목사의 아들인 한 남자를 알게 되었다. 그가 바로 "사이러스 필드"였다.
"우연이야말로 수많은 위대한 업적의 아버지이다."
사이러스 필드는 젊은 나이에 하는 일마다 성공하여 큰 재산을 모았고, 그 당시 그는 젊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은퇴해 있었다. 그는 전기나 케이블에 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케이블을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열정적인 신념이 있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 그것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기도하는 대담한 미국인이었다. 미국은 개척자들의 피나는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나라다. "In God We Trust"라는 신념 위에 세워진 나라이다. <킹제임스성경>이 헌법과 권리장전의 초석이었다.
기즈번은 전문 기술자였지만 뉴욕에서 뉴펀들랜드까지만 보았다. 하지만 사이러스 필드는 "뉴욕에서 뉴펀들랜드까지 가능하다면, 뉴펀들랜드에서 아일랜드까지는 왜 가능하지 못하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그는 그 몇 년 동안 대서양을 31회나 왕복하게 된다. 기적을 일으키는 새로운 전기의 힘이, 삶의 또 다른 가장 강한 동력인 인간의 의지와 결합된 것이다. 한 사람은 일생일대의 자기 사업을 찾았고, 그 사업은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적합한 한 사람을 찾아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Win-Win"이다.
사이러스 필드는 믿기지 않는 열정을 가지고 이 일에 착수했다. 그는 열정과 확신으로 가득 찼다. ① 모든 전문가들에게 연락을 취했고, ② 양쪽 정부에 탄원서를 냈으며, ③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아일랜드와 뉴욕에서 캠페인도 벌였다. 그 결과 영국에서는 5만 3천 파운드의 자금이 모였다(Telegraph Construction and Maintenance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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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멤논"(Agamemnon)호
도버와 칼레 사이를 연결하는 데는, 평범한 외륜 기선의 갑판에서 케이블을 30,40마일만 풀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서로 양쪽 해안을 보면서 일하기에 단 하루면 충분했다. 하지만 이 공사는 달랐다. 누군가는 이 공사를 『19세기의 바벨탑』이라고 이름 지었다. 대서양은 길이가 100배나 길고, 코일의 무게도 100배나 무거웠다. 더욱이 적어도 3주 동안이나 이 코일을 갑판 위에다 내놓은 채 있어야 했는데, 온갖 변덕스러운 날씨를 견딜 수 있을 것인지도 의문이었다. 게다가 철, 구리, 구타페르카로 이루어진 이 거대한 짐을 둘 만한 선창을 가진 배가 당시에는 한 척도 없었다. 또한 본선은 두 척이어야 했고, 보조선들은 가장 빠른 길을 잡아 나가면서 필요할 경우에는 본선을 도와주어야 했다. 영국 정부는 그 일을 위해 "아가멤논"(Agamemnon)호를 내주었다. 그 배는 영국에서 가장 큰 전함 중 하나로 세바스토폴 해전에서 기함으로 참가했었다. 한편 미국 정부도 5천 톤짜리 프리깃함인 "나이아가라"(Niagara)호를 내주었다. 이 배는 당시 어마어마하게 큰 배였다. 하지만 그들 배들도 개조하지 않고서는 사용할 수 없었다. 전체 코일의 절반도 이 두 배가 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코일의 특성은, ① (어떤 환경에서도) 끊어질 염려가 없어야 했고, ② 설치를 용이하게 하려면 탄력이 있어야 했다. ③ 모든 압력과 저항을 받으면서도 비단실처럼 매끈하게 쭉 뻗어야 했으며, ④ 묵직해야 하지만 너무 통통해서는 안 되었고, ⑤ 정밀하면서도 튼튼해야 했는데, 이는 가장 작은 전파라도 2천 마일 이상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⑥ 거대한 코일 어디엔가 단 한 군데라도 미세한 틈이 생기거나 표면이 울퉁불퉁하게 되면 전파 전달에 차질을 빚을 수가 있기 때문에 세심한 관찰과 주의력도 필요했다. 하지만 감행하기로 단안을 내렸다. 주야를 불문하고 공장들이 돌아갔다. 한 사람의 초인적인 의지력이 모든 바퀴들을 앞으로 굴렸다. 그것은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36만 7천 마일의 전선이 단 한 줄의 케이블 안에 넣어졌는데, 그것은 지구를 13바퀴를 감을 수 있고 지구와 달을 연결하고도 남는 길이였다. 기술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바벨탑을 건설한 이래 인류가 이보다 더 장대한 일을 기도한 적은 이제껏 없었다. 마침내 거대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 첫 번째 시도
1년 내내 기계들이 돌아가면서 가느다란 전선이 공장으로부터 나와 두 척의 배 안으로 실처럼 감겨들어 갔다. 한 번에 1주일이나 2주일 혹은 3주일 동안 계속해서 깊은 바닷속으로 케이블을 떨어뜨리도록 고안된 기계들이었다. 동시에 브레이크와 후진 장치가 달린 매우 무거운 기계들도 제작되어 배에 실렸다. 케이블을 설치하는 동안 각자가 발명한 장비들을 가지고 전류가 끊이지 않고 흐르는가를 감독하기 위하여 모스를 비롯한 최고의 전기 기술자들도 배에 탔다. 기자들과 삽화가들도 떼를 지어 몰려와, 콜럼버스와 마젤란 이래로 가장 흥분된 이 항해를 글과 그림으로 묘사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1857년 8월 5일 최초의 작업은 아일랜드 발렌시아 항구에서 시작되었다. "나이아가라"호는 대륙에서부터 바다 중간 지점까지 케이블을 설치할 임무를 맡았는데, 미국이 제공한 이 프리깃함은 거대한 몸집에서 마치 거미처럼 실을 뽑아내듯 케이블을 떨어뜨리며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이미 335마일의 케이블을 깔았다. 이 분량은 도버에서 칼레에 이르는 거리의 10배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8월 11일, 작업이 시작된 지 6일째 되는 저녁, 사이러스 필드가 잠시 쉬려고 자리에 누웠는데 털털거리는 기계 소리가 멎었단 것을 알게 되었다. 케이블 출구가 비어 있었다. 케이블이 몽땅 물레를 벗어나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기술상의 작은 잘못이 수년간에 이룩했던 작업을 허사로 만들어 버렸다. 영국에서는 모든 신호와 부호가 갑자기 죽어 버리자 나쁜 소식을 예상했다. 담대하게 출발했던 사람들은 패자의 모습으로 영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사이러스 필드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 두 번째 시도
사이러스 필드는 영웅이요, 또 사업가였다. 그는 흔들림이 없었고 침착했으며 오히려 냉정하게 손익을 계산했다. 잃은 것이 무엇인가? 약 300마일 길이의 케이블과 10만 파운드가량의 주식 자본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은 향후 1년이라는 시간이었다. 이 작업을 위한 적절한 날씨는 여름철이라야만 가능했는데, 시기로 볼 때 계절이 이미 너무 많이 지나 버린 것이다. 이익이라면 무엇보다도 실제적인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검사 결과 남은 케이블도 사용 가능하다는 판단이 나왔다. 그는 다음번 모험을 위해 이를 간직해 두기로 했다. 하지만 끔찍한 실패의 원인이 되었던, 케이블을 내려보내는 기계만은 모조리 바꾸어야 했다.
준비하는 데 다시 1년 정도가 지나갔다. 드디어 1858년 6월 10일, 1년 전의 그 배들이 새로운 용기와 낡은 케이블을 싣고서 다시 출항을 감행했다. 첫 번째 시도에서 전신 부호 전달이 아무런 문제없이 가능했음을 확인했으므로, 이번에는 대서양 한가운데서 양쪽 아일랜드와 미국(뉴펀들랜드)을 향해 동시에 케이블을 설치한다는 원래의 계획을 다시 선택했다. 따라서 새로운 항해의 처음 며칠은 따분하게 보내야 했다. 7일이 지나야만 비로소 원래 계산해 두었던 장소에서 케이블을 설치하는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계도 할 일이 없어 멈춰 있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고요했다. 바다는 너무 지나칠 정도로 고요했다.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은 무료하기 그지없었다.
사흘째 되던 날, "아가멤논"호의 선장은 은근히 불안해했다. 기압계의 수은주가 불안한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징후는 특별한 형태의 폭풍우가 다가온다는 신호였다. 실제로 나흘째 되던 날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대서양에서 가장 경험 많은 선원들도 드물게 겪어 본 폭풍이었다. 이 폭풍은 "아가멤논"호(영국 측 배)를 강타했다. 이 배는 원래 대양의 전투에서 여러 번의 시련을 견뎌 낸 영국 해군의 기함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날씨에 당연히 견뎌 낼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가멤논은 케이블 설치를 위해 개조되어 엄청난 짐을 실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무게를 여러 선적실로 분산시킬 수 없었고, 배 한가운데에 거대한 케이블이 감긴 실패꾸리도 안고 있었다. 그 때문에 짐의 일부를 배 앞쪽으로 옮겨 놓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했다. 그것 때문에 배 앞뒤의 흔들림이 두 배나 더 심해진 것이다.
폭풍은 배를 가지고 위험천만한 놀이를 즐기는 듯했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앞으로, 뒤로, 때로는 45도 각도로 들어올리기도 했다. 성난 파도는 갑판을 훑고 지나가면서 모든 것을 부숴 버렸다. 게다가 또 하나의 불운이 겹쳤는데, 가장 큰 파도가 배 바닥의 용골부터 마스트까지 뒤흔들자 갑판에 쌓아 둔 석탄 더미를 막아 놓은 칸막이가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석탄이 우박처럼 되어 녹초가 되어 있는 선원들 위로 돌같이 쏟아져 내렸다. 부엌에 있던 사람들 중 몇 명은 솥이 뒤집어지면서 쏟아진 끓는 물에 심하게 데었다. 이 폭풍은 열흘이나 계속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선원 한 사람은 그만 미쳐 버렸고 사람들의 생각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선원들은 케이블을 저주하며 케이블을 바다에 버리자고 했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선장이 거절함으로써 그것을 막았다. 결국 그가 옳았다. "아가멤논"호는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면서 10일간 계속되는 폭풍을 견뎌 냈던 것이다. 그 결과, 좀 늦기는 했지만 케이블 설치를 시작하기로 약속한 장소에서 다른 배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케이블이 말썽이었다. 수천 번이나 휘감긴 코일로 이루어진, 이 값지고 민감한 화물이 수도 없이 이리저리 부딪치면서 엄청난 손상을 입었던 것이다. 코일들이 서로 얽힌 부분도 있었고, 전선을 감싼 구타페르카의 껍질이 밀렸거나 찢겨 나간 곳들도 있었다.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래도 케이블을 설치해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쓸데없이 약 200마일의 케이블만 바닷속에 버린 꼴이 되었다. 다시 한 번 기를 내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승리는커녕 상처만 안은 채 다시 돌아가야 했다.
▷ 세 번째 시도
이 불운한 소식을 접한 런던의 주주들은 창백한 얼굴로 자기들의 지도자요, 유혹자이기도 한 사이러스 필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주식 자본의 절반이 이 두 번의 항해로 사라져 버렸지만 증명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일과 연관된 대부분의 사람들의 입에서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회사의 대표는 아직 건질 수 있는 돈이 있으니 그것만이라도 건지자고 했다. 즉 아직 사용하지 않은 케이블을 배에서 끌어내려 필요한 경우 손해를 보더라도 팔고, 대양을 연결하겠다는 이 허망한 계획은 이제 그만 접자고 했던 것이다. 부대표는 대표의 말에 동의하면서 자기는 이제 이 정신 나간 사업과는 무관하며 더 이상 관계도 맺고 싶지 않다며 사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사이러스 필드의 꿈을 향한 의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말하기를 "잃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① 케이블 자체는 훌륭하게 시험에 합격한 터이고, 새로 시도하기에 충분할 만큼 그 양도 아직 배에 남아 있었다.
② 배들도 모여들고 선원들도 선발되었다고 말했다.
③ 지난번 항해 때보다 기상은 오히려 더 맑고 더 좋은 날씨가 한동안 계속 되리라는 희망을 갖게 해 주었다고 했다.
④ 그는 힘주어 말했다. "용기를 가집시다. 한 번만 더 용기를 가집시다. 지금 아니면 이제 다시는 시험해 볼 기회조차 없습니다."
주주들은 점점 더 불안해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남은 돈까지 이 바보에게 그냥 맡겨야 할 것인가? 그런데 언제나 강한 의지력을 가진 한 사람이 망설이는 여러 사람을 몰아가는 법이다. 사이러스 필드는 새로운 출항을 강행했다. 두 번째 실패 후 5주가 지난 1858년 7월 17일, 배는 세 번째로 영국의 항구를 떠났다. 결정적인 일들은 언제나 소리 없이 성공한다는 오래된 경험이 여기에서 또 한 번 확인되었다. 이번 출항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사람들도 부두에 모여들지 않았다. 어떠한 행사도 연설도 기도도 없었다.
약속된 날짜인 7월 28일, 곧 퀸스타운(Queenstown)을 출발한 지 11일째 되는 날에 정확하게 "아가멤논"호와 "나이아가라"호가 대서양 한가운데 약속된 해상에서 만나 대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두 배는 고물을 마주 댔다. 이제 둘 사이에 케이블의 양쪽 끝이 이어졌다. 케이블은 양쪽 배 사이로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두 배는 깃대를 이용해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영국 배는 영국 쪽을 향해, 미국 배는 미국 쪽을 향해 나아갔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두 배는 바람과 파도를 넘어 공간과 거리를 초월하여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서로 소통을 했다. 매시간 이쪽에서는 통과한 마일 수를 알렸고, 저쪽에서는 좋은 날씨 덕분에 작업과 항해가 순조로웠노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해서 4일이 지난 8월 5일, 마침내 "나이아가라"호가 뉴펀들랜드를 향해 있는 트리니티 만에서 미국 쪽 해안이 보인다고 전해 왔다. 정확히 1,030마일의 케이블을 설치한 시점이었다. 마찬가지로 "아가멤논"호 역시 1,000마일의 케이블을 바다에 깔고서 이제 아일랜드 해안이 눈에 보인다고 감격 어린 답변을 보내왔다. 이제 처음으로 인간의 말이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미국에서 유럽으로 전달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하지만 뉴펀들랜드와 아일랜드 해안 그 어디에도 이 위대한 세기적인 모험을 이룬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두 척의 배와 그 배 안에 있는 몇백 명의 사람들만이 이 위대한 모험이 성공했음을 알 뿐이었다. 세상은 이미 이 모험을 잊은 지 오래된 듯했다. 하지만 새로운 대양 케이블이 대륙 내 케이블과 연결만 된다면 1초 이내에 전 인류는 이 위대한 성취를 알게 될 참이었다.
8월 초 영국과 미국은 그 작업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거의 동시에 알게 되었고, 그 소식은 형언하기 어려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영국의 <타임스>는 사설에서 이렇게 썼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래로 인간의 활동 영역을 이처럼 엄청나게 확대시킨 사건은 다시없었다.』 영국의 흥분은 최고조에 달했다. 미국의 흥분도 영국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조에 달해 있었다. 상점들은 문을 닫았고 거리마다 질문하고 대답하며 환호하는 사람들로 넘쳐 났다. 하룻밤 사이에 사이러스 필드는 국민의 영웅이 되었다. 그는 프랭클린, 콜럼버스 같은 미국 국민의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뉴욕은 물론 다른 도시들에서도 "신대륙 미국과 구대륙을 결혼시킨 이 남자를 보고자 열망하는 아우성으로 넘쳐 났다. 열광한 사람들은 이제 영국 여왕의 축하 메시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 우연한 사고로 인해 뉴펀들랜드로 가는 케이블이 장애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8월 16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영국 여왕의 메시지가 저녁 시간 뉴욕에 도달했다. 이 소식은 전신국 사무소와 신문사 편집국에서만 울렸을 뿐, 너무 늦은 시각이라 신문이 알릴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엄청난 인파를 이루며 브루클린 항구로 몰려들었다. 평화로운 승리를 이룩한 영웅의 배 "나이아가라"호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 날인 8월 17일, 신문들은 『케이블 완벽하게 작동하다』, 『기쁨에 넘친 시민들』, 『세계적인 축제의 시간』 등의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미국 대통령이 영국 여왕에게 답신을 보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포병 부대는 100발의 축포를 쏘아 올렸다.
"나이아가라"호가 귀향했다. 위대한 영웅 사이러스 필드가 돌아온 것이다. 승무원들은 성취감에 도취되어 남은 케이블을 싣고서 거리를 행진했다. 이러한 축제 분위기는 멕시코 만을 포함한 태평양 연안의 모든 도시에서 매일매일 되풀이되었다. 마치 미 대륙이 발견된 것이 두 번째인 양 축하했던 것이다. 8월 31일, 한 도시가 오직 한 사람 사이러스 필드를 축하하기 위해 들떠 있었다. 진짜 개선행진은 보다 장대한 광경이 될 참이었다. 행사를 준비하는 데만 2주일이 걸렸다. 제국의 황제들 이래로, 그 어떤 승리자도 자국 국민으로부터 이토록 열광적인 축하를 받은 적은 없었다. 축하 행렬이 도시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도달하는 데만 여섯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이 행렬에서 깃발을 앞세운 군인들이 국기들이 펄럭이는 거리를 통과하면 그 뒤로 합창대와 악기들, 소방대, 학생들, 퇴역 군인들이 뒤따랐다. 행진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행진했고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노래했으며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은 모두 기뻐했다. 사이러스 필드는 마치 고대 로마의 개선장군처럼 쌍두마차에 타고 있었다. 또 다른 마차에는 "나이아가라"호의 선장이 탔고, 그 다음 마차에는 미국 대통령이 타고 있었다. 시장, 정부 관리들, 대학교수들이 그 뒤를 따랐다. 간단한 인사말과 더불어 축제와 횃불 행진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교회마다 종이 울렸고 사방에서 축포가 터졌다. 그런 후에 다시 환호의 물결이 이 제2의 콜럼버스를 둘러싸곤 했다. 두 세계를 하나로 합친 인물, 공간의 벽을 넘은 승리자, 그 순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높은 찬사를 받은 남자인 사이러스 필드를 말이다.
그런데 수천만의 환호 소리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음성만은 행사 내내 이상할 정도로 침묵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전신기 자체였다. 대서양 케이블이 작동을 중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축하를 받고 있던 영웅 사이러스 필드 자신이었다. 케이블은 이미 며칠 전부터 혼란스런 신호를 보내오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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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 해저 케이블 모형
거의 읽을 수 없게 되더니만 그 다음에는 직직 끊는 소리를 내다가 마침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뉴펀들랜드에서 전보 수신을 관리하는 몇몇 사람들뿐이었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열광하고 환호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차마 이 고통스런 소식을 전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런 사실은 이상할 정도로 오가는 소식이 적다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가끔 오는 소식은 아주 애매하고 확인할 길이 없는 것들이었다. 얼마 못 가서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뜩이나 용량이 부족했던 케이블이, 더 나은 송수신을 하려는 열의와 초조감 속에서 지나치게 강한 전기량을 내보내는 바람에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는 소문이었다. 곧 나아질 것이라는 사람들의 기대감을 비웃기라도 하듯, 신호는 점점 더 희미해지면서 이해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다. 환희의 축제가 있던 다음 날인 9월 1일, 분명해야 할 음성이나 순수한 진동이 완전히 멈춰 버렸다.
그처럼 열광하게 만들었건만, 어느 한순간 열광케 했던 그 무엇이 진짜가 아님을 알게 되고 모든 기대를 걸었던 그 사람의 업적이 가짜로 드러났을 때, 그로 인해 야기된 실망이란 인간을 절망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결코 그런 배신을 용서하려 들지 않는 법이다. 명성이 하늘을 찌를 듯했던 전신기가 실패작이었다는 소문이 사실로 드러나자 환호의 파도는 악의에 찬 분노로 바뀌어 죄 없는 죄인인 사이러스 필드에게로 향했다. 이제 그 영웅은 한 도시, 한 나라, 전 세계를 속여 먹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 도시 사람들은 그가 오래전부터 이미 전신기의 실패를 알고 있었다고도 주장했다. 그런데도 이기심에 사로잡혀 사람들이 환호하도록 내버려 두고 그사이 시간을 벌어 자기가 가진 주식을 엄청난 차익을 남기고 처분했다고도 말했다. 더 험한 중상모략은, 대서양 전보는 아예 한 번도 기능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즉 모든 메시지는 기만이자 사기였고, 영국 여왕의 메시지도 미리 만들어진 것으로서 한 번도 대서양 전기를 통해 전달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단 하나의 소식도 이해할 만한 형태로 대서양을 건너간 적이 없었으며, 다만 관리자들이 자신들의 추측과 잘려진 신호들을 조합해 상상의 전보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짜 스캔들"이었다. 바로 어제 그 큰 소리로 축하의 환성을 질렀던 사람들이 오늘은 가장 격분해 있었다. 이제 그들은 지나치게 열광하며 환호했던 것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겼다. 사이러스 필드는 그들 분노의 희생자가 되어 있었다. 어제까지 국민의 영웅이자 진정한 용사로 불렸고 갈채도 받았으며 프랭클린의 형제요 콜럼버스의 후예였던 사람이, 이제는 이전의 친구들과 숭배자들 앞에서 범죄자로 서게 되었던 것이다. 단 하루가 모든 것을 창조해 내더니, 단 하루가 모든 것을 파괴해 버렸다. 이 같은 몰락은 절대로 미리 예측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이제 돈과 신용은 깡그리 사라졌고, 쓸모없게 된 케이블만 지구를 둘러싸고 있었다는 전설의 뱀처럼 투시할 수 없는 대서양 깊숙한 곳에 누워 있었다.
그 케이블은 그때부터 자그마치 6년 동안이나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힌 채로 대서양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세계의 시간으로 딱 한 시간 서로 맥박을 같이했던 두 대륙은 무려 6년 동안이나 차가운 침묵 속에 묻혀 있었다. 수천 년 동안 그랬듯이 미국과 유럽은 다시 극복할 수 없는 거리로 멀어지고 말았다. 물론 그 누구도 절반만 성공한 그 작업을 다시 시도해 볼 엄두도 내지 않았다. 끔찍한 실패가 모든 힘을 소진해 버렸고 모든 열정을 식혀 버렸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모든 관심이 남북전쟁에 쏠렸지만, 영국에서는 그래도 가끔 위원회가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해저 케이블이 원칙적으로 가능하다는 무미건조한 주장을 확정하기까지 소요된 시간은 무려 만 2년이나 되었다. 이 학술적 증언이 현실화되기까지 그 누구도 첫발을 내디뎌 보려고 생각지도 않았다.
그 6년이란 시간은 세계사의 관점에서 보면 한순간일는지 모르지만, 전문 송신이라는 새로운 학문적 견지에서 보면 천 년과도 맞먹는 시간이었다. 전기 분야에서는 해마다, 달마다 새로운 성공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발전기들은 더 정밀해졌고 이용 방식들도 더 다양해졌으며 기구들도 더 정교해졌다. 정보 통신망은 대륙 내부 공간을 구석구석 연결해 들어갔고, 아프리카와 유럽 대륙은 이미 케이블이 지중해를 가로질러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대서양을 연결하고자 하는 계획도 해마다 보이지 않게 점점 환상의 영역을 벗어나고 있었다. 새로이 시도할 계기가 불가피하게 다가왔다. 다만 새로운 에너지를 가지고 옛날의 계획을 실현시킬 만한 인물이 없었을 따름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사람이 한 명 나타났다. 사이러스 필드였다. 바로 옛날의 그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옛날과 똑같은 신용과 신뢰를 회복하여 그처럼 오랜 침묵의 추방과 악의적인 결별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부활했던 것이다. 그가 서른 번째로 대서양을 건너 런던에 모습을 드러냈다. 옛날에 받았던 허가에다 60만 파운드의 새로운 자금도 받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대로 어마어마한 화물을 운송할 수 있는 한 척의 거대한 배를 마침내 마련했다. 이점바드 브루넬(Isambard Brunnel)이 건조한, 굴뚝 네 개가 달린 22,000톤 급의 "그레이트이스턴"(Great Eastern)호였다. 이 배는 시대를 너무 앞서 만들어진 까닭에 원래의 목적대로 쓰이지 않았다가, 이제 사이러스 필드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이었다. 사이러스는 그 배를 사서 탐사에 필요한 장비들을 쉽게 갖출 수 있었다. 전에는 그토록 어렵기만 했던 모든 일들이 이번에는 쉽게 진척되었다.
1865년 7월 23일, 이 거대한 배는 새로운 케이블을 싣고 템즈 강을 출항했다. 목표 지점에 도달하기 이틀 전, 케이블이 절단되는 바람에 첫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거대한 대서양이 다시 한 번 60만 파운드란 돈을 삼켜 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기술이 너무나도 확실했기에 그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1866년 7월 13일, "그레이트이스턴"호는 두 번째로 출항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성공이었다. 케이블은 아주 또렷하게 유럽으로 "말"을 전달했다. 며칠 뒤에는 전에 잃어버렸던 케이블도 되찾을 수 있었다.
두 줄의 케이블이 미국과 유럽을 연결해 주었다. 어제는 기적이었던 일이 오늘은 당연지사가 되었다. 그 순간부터 세계는 동일한 심장 박동을 갖게 되었다. 자기 자신의 창조력을 통해 마치 하나님과도 같이 모든 곳에서 동시에 소통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