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다시 읽는 이송오 목사 분류

욥의 시련과 인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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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04월호>

성경(Scripture)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다(딤후 3:16,17).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사람들이 갖가지 언어로 남긴 책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하지만 그것들은 마모되고 썩어 사라졌으며, 남아 있다 해도 세계인이 자기 언어로 읽을 수 없게 되어 있거나,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처럼 판만 있고 일반인들은 그 안에 무엇이 기록되었는지 알지 못함에도 소위 문화재, 문화유산으로만 불리고 있다. 그것들은 실제로는 사장된 책들인데, 그런 책들은 앞으로도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빛도 못 보고 빛도 비추지 못한 채 썩어 버릴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분의 섭리로 보존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살아 계신 말씀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요 1:1). 『태초부터 계셨고, 우리가 들었으며, 우리 눈으로 보았고, 주목하여 살폈으며, 우리 손으로 직접 만졌던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라』(요일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흰 말이 보이더라. 그 위에 앉으신 분은 신실과 진실이라 불리며 의로 심판하고 싸우시더라. 그의 눈은 불꽃 같고 머리에는 많은 왕관이 있고 또 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르며 피에 적신 옷을 입었는데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리더라』(계 19:11-13). 여기 “말씀”이란 단어가 <한글킹제임스성경>에는 고딕체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일컫는 것이다. 그분에 관한 예언인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말해지고 보존된 책이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성경의 어떤 예언도 사사로운 해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예언은 예전에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니라』(벧후 1:20,21).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간수하시리니 주께서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그것들을 보존하시리이다』(시 12:6,7).


영감으로 기록되고 섭리로 보존된 말씀은 사람이 지어낸 말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성경은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3개 대륙에서 42명의 저자들이 1,800년이라는 기간 동안 기록하여 집성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성경을 믿으면 영이 죽어 있는 사람의 영이 거듭난다(벧전 1:23). 영이 거듭나면(엡 2:5-8) 혼이 구원을 받는다(벧전 1:9). 영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죽은 시체에 불과하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사람은 영적 양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먹을 수 없다. 하지만 거듭난 성도의 첫 번째 특징은 영적 양식을 원하기에 스스로 성경을 찾아 읽으려고 나선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성도는 영적 분별력을 지녔기에 거짓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님을 깨달아 속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성경 66권 중 어떤 책을 선호하느냐고 묻는 것이 혹 결례인 듯하지만 성도의 성향과 선호를 묻는 것이 아니라 믿음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나, 사역을 위해서나, 섬김, 소망, 교제, 경배, 대환란, 휴거와 재림, 교리의 정리 등을 위해 어느 책이 도움을 많이 주는가를 물을 수는 있을 것이다. 마틴 루터(1483-1546)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선호했고, 존 웨슬리(1703-1791)는 잠언과 야고보서를 선호했다. 이 시대에도 은사주의자들은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를 선호하고, 어떤 목사들은 예수님이 사도 바울보다 높다는 생각에 사복음서가 율법 아래서 기록된 것을 모르고 교리로 삼다가 교리 전체를 엉망으로 만들기도 한다. 전환기적인 책인 마태복음, 사도행전, 히브리서를 교리로 채택한 사람들은 자기가 파놓은 구덩이에 자신을 묻게 되고, 요한계시록을 강해하겠다고 나선 사람들 역시 대환란이 네 가지로 제시된 것도 모르는 채 어둠 속에서 지내다가 생을 끝내기도 한다.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책은 욥기이다. 욥기에 대한 찬사는 끝이 없지만 성경 주석가 중 한 명인 딘 브래들리(Dean Bradley)는 이렇게 썼다. “욥기는 성경에서 독보적인 책이며, 세상의 문학 작품 중에서 히브리 시의 꽃으로 우뚝 솟아 있다.” 나도 그 말에 공감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노아, 다니엘, 욥 세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씀하셨다(겔 14:14). 욥기의 주제는 “어째서 의인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이다. 이 말은 『어찌하여 악인의 길이 번성하나이까? 어찌하여 아주 패역되이 행하는 자들이 다 행복하나이까?』(렘 12:1)와 동일한 맥락의 질문이다. 욥은 그야말로 까닭 없이, 자신이 왜 그런 아픔과 비애와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모른 채 하루아침에 자식들과 그 많은 재산을 다 잃고, 권위와 명예와 신뢰를 잃고, 아내로부터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말까지 들었다(욥 2:9). 욥은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심한 피부병을 앓아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자기 몸을 긁으며 재 가운데 앉아 고통을 당했다(욥 2:8). 욥에게는 그것이 이유 없이 당하는 고통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악과 죄에 대해 벌을 주시는 분이신데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신에게 이런 혹독한 시련을 주시는지 알지 못했기에 더욱더 괴로워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온전하고 정직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피하는』 챔피언을 사탄에게 자랑하고 싶으셨던 것이다(욥 2:3). 그때 사탄은 『욥이 아무런 이유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리이까?...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쳐 보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주를 정면으로 저주하리이다.』라고 말씀드렸다(욥 1:9-11). 욥이 하나님께서 사탄의 제의를 받고서 자기를 사탄과 대결시키는 챔피언으로 세우신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우리 주님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완성하시려고 인자로 오시어 예언된 십자가의 질고를 지시면서도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받으실 것을 괴로워하셨다. 『오 나의 아버지시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옵소서』(마 26:39).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진노는 마귀에게 합당하지 하나님의 아들이 받아야 할 것이 아닌데”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님 자신이 저주가 되시고 뱀이 되셔야 했기에 괴로워하셨다. 『그러나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비방거리요, 백성들에게 멸시거리니이다』(시 22: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셔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기록되기를 “나무에 매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은 자라.”고 하였도다』(갈 3:13).


사도 바울 역시 엄청난 고난을 당했다(고후 11:22-28). 하지만 욥이 겪었던 것과 같은 고난은 아니었다. 바울은 아내나 자식들을 잃어 본 적이 없었고, 병 중에서 가장 심한 피부병을 앓은 적도 없으며, 모든 재산을 잃은 적도 없었고, 권위와 명예와 위신을 잃지도 않았다. 그는 주님을 만난 이래로 주님께로부터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임명되어 자기가 했던 일에 보람을 느꼈다. 자기가 고난을 당하면 피할 길도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자신에 넘쳐 있었다(고전 10:13).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들어 쓰신 종임을 알았지만 욥은 자기가 왜 그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욥에게는 세 친구들(엘리파스, 빌닷, 소팔)이 있었는데, 그들은 욥이 불행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욥을 위로하겠다고 왔었다. 그러나 친구의 불행을 위로하러 온 엘리파스의 조언은 마치 상처로 신음하고 있는 친구에게 식초를 붓는 격이었다. 그는 욥이 당한 고난은 죄의 열매요 하나님의 의도적인 심판이라고 단정했다. 『내가 본 바와 같이 죄악을 경작하는 자와 악을 심는 자는 같은 것을 거두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입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소멸되느니라』(욥 4:8,9). 그는 욥이 고난받은 원인을 마치 하나님보다 더 잘 꿰고 있는 듯이 말했다. 『보라, 하나님께서 바로잡으시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그러므로 너는 전능하신 분의 징계를 멸시하지 말라. 그는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그는 상처를 내시다가 그의 손으로 온전하게 하시느니라』(욥 5:17,18). 하지만 욥은 여전히 모든 것을 잃고 넋두리 같은 독백을 내놓았다. 『나를 멸하시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린다면 그것마저 바라리라. 그가 그의 손을 풀어 나를 끊으시기를!』(욥 6:9) 엘리파스는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했고, 욥은 그런 추측이 죄라고 항변했다(욥 6:24,29).


두 번째로 등장한 빌닷은 어땠는가? “까닭 없이 하나님께서 징벌을 내리시는 분이시냐? 네가 잘못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너를 연단하실 이유가 있겠느냐?”라고 대들었다(욥 8:3-6). 그에 대한 욥의 반응은 너무나 겸손하다. 비록 자기가 당하는 고난의 원인을 알지는 못했어도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가 옳으므로 자신이 벌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주님을 두둔하였다. 『나는 나의 모든 슬픔을 무서워하나니 주는 나를 죄 없다 여기지 아니하실 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악할진대 어찌 내가 헛되이 수고하리이까?』(욥 9:28,29) 빌닷은 자기를 의인의 자리에 두고, 하나님을 망각한 위선자의 자리에 욥을 세워 놓고 강론에 열을 올렸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모든 길도 그러하며 위선자의 소망도 사라지리니, 그의 소망이 끊어질 것이요, 그의 의지함이 거미줄같이 되리라』(욥 8:13,14).


세 번째 친구인 소팔은 불행에 처한 친구 욥을 어떻게 위로했는가? 소팔은 자기는 하나님을 너무 잘 알기에 하나님의 속마음까지도 훤히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너를 대적하여 그의 입술을 여시어 지혜의 비밀들을 네게 보여 주시기를 바라나니 그 비밀들은 있는 것의 두 배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네게서 네 죄악이 받을 것보다 적게 거두심을 알라』(욥 11:5,6). 그는 한술 더 떠서 『네가 찾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찾아낼 수 있겠느냐? 네가 전능하신 분을 완전히 찾아낼 수 있겠느냐?』(욥 11:7)라고 했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을 의인이라고 하셨을까?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비록 사람의 눈에는 난해하게 보일지라도 그 원인과 탓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는 신뢰를 지녔던 것이다. 그래서 욥은 사리에 맞지 않는 친구들의 말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들으려고 하나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하게 갖는 상념이다. 루마니아의 리차드 움브란트, 불가리아의 하랄란 포포프 목사도 동일했다.


고난당하던 욥이 친구들에게 원했던 것이 무엇인가? 욥은 “오 내 친구들아, 하나님께서 나를 치셨으니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라고 두 번이나 간청한다(욥 19:21). 또 “어찌하여 너희가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내 몸으로 겪는 불행을 보고서도 만족하지 않느냐? 내가 이보다 더 큰 고통을 받기 원하느냐?”(욥 19:22)라며 친구들의 동정을 구했다.
욥은 인간의 지상 생명은 어차피 끝나게 되어 있음을 시인하고 감수했다. 욥은 그의 구속주가 살아 계시고 훗날 그분께서 땅에 서실 것을 알았으며, 자기 피부를 벌레들이 먹을지라도 다시 살아난 자기의 몸을 입고 하나님을 볼 것을 믿었다(욥 19:25,26). 또한 그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욥이 겪은 비극과 고통은 1년 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때로는 왜 의인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으며 『지혜의 비밀들을 네게 보여 주시기를 바라나니 그 비밀들은 있는 것의 두 배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네게서 네 죄악이 받을 것보다 적게 거두심을 알라.』(욥 11:6)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욥이 그 1년간의 고난을 극복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후반을 처음보다 더 복 주셨고,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부활시켜 그에게 돌려주셨다. 그 후 욥은 140년을 살다가 늙고 날들이 차서 죽었다.

역경이 없으면 인생을 배울 수 없다. 믿음의 시련이 없으면 정금같이 될 수 없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련을 당하고 죽음까지도 감수했다(히 11:35-38). 욥기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 들었고 인정받는 믿음을 지닌 종에 관한 이야기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를 사탄에게 자랑하려고 그의 자식들과 재산과 명예를 잃게 하시고 질병까지 허락하셨는데도 그가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우리로 하여금 바로 그 욥을 통해서 의인의 시련과 인내에 관한 교훈을 배우게 하시는 것이다. 『보라, 우리는 견디어 내는 자들을 복 있는 사람들로 여기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또 주의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인정이 심히 많으시고 자비로우시니라』(약 5:11).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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