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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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받는 징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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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10월호>

피터 S. 럭크만 / 김진석 옮김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길을 잃었으나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내가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 좋사오니 이는 내가 주의 규례들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니이다』(시 119:67,71).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위대하면서 동시에 가장 긴 장이며, 성경 자체에 관한 말씀이다. 위의 말씀은 다윗 자신의 고백이다. 다윗이 신약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그가 말한 것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단번에 공감하고 알아차리는 경험을 간증한다. 징계를 받는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올바른 반응이 바로 이것이다.


다윗은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는 잘못된 방향으로 갔는데, 하나님께서 매를 드신 후에는 돌아오게 되었다.”라고 고백했다. 당신도 이 말씀에 해당하는가?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현실이 그렇다. 우리는 축복보다는 징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둘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들임에도 사람들은 축복을 당연하게 여기고 징계는 매우 불쾌하게 여긴다. 그렇다면 무엇이 당신을 두려워하게 하는지 아는가? “고통”이다! 아무도 아프기를 원하지 않는다. 고통에 익숙하다면 당신은 징계에도 익숙할 것이다. 제자(disciple)는 징계(discipline)를 받기 마련이다. 성경은 『안티옥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행 11:26)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고 말씀하지 않는가? 그리스도인은 제자(disciple)요, 그것은 곧 징계(discipline)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징계하시는 첫 번째 방법은, 당신을 “말씀”으로 정결케 하셔서 깨끗함을 유지하게 하시는 것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시라. 내 안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마다 그분께서 제거해 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마다 정결케 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느니라. 이제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일러준 말을 통하여 깨끗해졌느니라』(요 15:1-3). 다윗은 『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정결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조심할 것이니이다.』라고 했다(시 119:9). 사도 바울은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전하고 점 없이 나타나기 전에 반드시 『말씀에 의한 물로』 씻어야 한다고 했다(엡 5:26). 즉 이 첫 번째 종류의 징계는 매우 부드러운 종류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당신 자신을 노출시킴으로써 그 말씀으로 깨끗하게 되기 때문이다(롬 10:17).

하나님께 매를 맞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을 정조준한 날카롭고 강력하며 직접적인 설교를 듣는 것이다. 이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의도적으로 그런 설교를 회피한다는 데 있다.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는 명쾌한 설교를 들으면 마음이 찢기고 멍들어 상하기 때문이다. 이런 극약처방을 못 견디는 자들은 강력한 설교가 이뤄지는 곳을 피해 죽은 대형 교회들 중 하나를 택한다. 즉 그들은 설교자가 당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바로 당신이 문제입니다!”라고 하는 것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대단한 뭔가로 또는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거나,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세상 사람들에 비하면 썩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말로 선포되는 채찍에 맞는 것이 가죽으로 된 채찍에 맞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나의 선친께서는 너비 10cm 정도 되는 가죽 벨트를 겹쳐서 나를 혼내 주시곤 했다. 그렇게 흠씬 맞을 때 내가 깨달은 것은 그럴 때일수록 아버지께 바짝 붙어야 벨트를 휘두르시는 그 동작의 포물선이 흐트러져서 때리는 힘이 약해진다는 것이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아버지에게서 멀어지려고 하면 오히려 더 세게 맞았다. 당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 맞아야 할 일을 했다면 도망가려 할수록 더 세게 맞을 것이다. 당신 자신이 타락했거나 인생에서 뭔가가 잘 풀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더욱 밀착하라. 정말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밀착하라. 당신은 군인 집안에서 자랐기에 매 맞는 데 이골이 난 나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나는 일 년에 열두 번 정도 아버지께 그렇게 맞고, 교장 선생님에게도 그 정도 맞은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하다!(시 119:140) 만약 당신이 성경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깨끗하게 될 방도 자체가 없는 것이다(요 17:17). 제자들의 발을 씻기려고 하시는 예수님을 베드로가 말리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으니 그는 온몸이 깨끗함이라. 너희는 깨끗하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니라』(요 13:10).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을 때 당신은 주님의 피로 씻겨서 온몸이 깨끗하게 되었다. 그러나 매일의 행보로 인해 발이 더러워지기 때문에 발은 매일 씻어야 한다(시 51:7).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징계하시는 두 번째 방법은 “가시”를 통해서이다. 『지극히 위대한 계시들의 풍성함으로 인하여 내가 자고하지 않도록 육체에 한 가시, 즉 사탄의 사자를 내게 주셨으니 그가 나를 쳐서 자고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12:7). 이것은 사도 바울이 그가 받은 계시에 관해 말하는 중에 한 말씀이다(고후 12:4).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겸손하게 하시려고 육체에 가시를 주셨다고 말한다. 가시는 극심한 고통까지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신경에 거슬리는 짜증을 유발한다. 신발에 가시가 들어갔는데 8km를 걸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피가 철철 흐를 정도로 아픈 것은 아니지만 가시는 발을 디딜 때마다 아프게 한다. 성경은 바울이 겸손함을 유지하도록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시를 주셨다고 말씀한다.
구약성경에 보면, 재판관 기드온이 미디안인들을 치러 나갔는데 숙콧 사람들이 그의 군대에게 빵을 주지 않은 적이 있다. 기드온은 미디안인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 숙콧 사람들을 가시와 찔레로 일깨워 주었다(판 8:16). 오늘날 고명하게 여겨지는 학자들 또한 그처럼 광야의 가시와 찔레로 교훈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럭크만은 자기만 옳고 다른 사람은 다 틀렸다고 생각한다.”라고 지껄이고 다닌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킹제임스성경>을 수정할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하다고 여긴다. 나는 <킹제임스성경>을 140회 이상 읽었지만 내 자신이 그 말씀을 고칠 정도로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킹제임스성경>을 수정하는 학자들은 하나같이 교만하다. 그렇게 교만한 자들에게 가시가 필요한 것이다. 육체의 가시는 당신을 겸손하게 낮추어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징계하시는 세 번째 방법은 “가지치기”를 통해서이다. 앞서 언급한 요한복음 15:2을 다시 읽어 보라. 『내 안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마다 그분께서 제거해 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마다 정결케 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느니라.』 포도나무를 정결하게 유지하는 방법은 가지치기를 하는 것이다. 이 점은 무화과나무에도 해당된다. 과일 나무들을 건강하게 지킬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도록 하는 방법은 바로 가지치기를 해 주는 것이다. 나도 포도나무 한 그루를 얻게 되어 포도나무 키우는 법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는 “포도나무는 무자비하게 가지치기를 해 줘야 한다.”라고 써 있었다. 나는 그 조언에 따라 전지가위를 들고서 정말 사정없이 가지치기를 했는데 잔가지로 거의 양동이 하나를 채웠었다. 내가 만약 그 포도나무였다면 가지치기를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들 그런 경험을 좋아하겠는가?


가지치기는 가시보다 좀 더 아픈 징계이다. 왜냐하면 가지가 잘리면 아프기 때문이다. 어떤 포도나무가 그걸 좋아하겠는가마는 포도나무에게 가지치기는 유익하다. 하나님께서도 그리스도인에게 그가 열매를 맺도록 그와 같이 행하신다. 호주에 있는 한 친구는 어지럼증을 몇 년 동안이나 겪고 있다. 몇 주간 괜찮다가도 심해져서 설교하는 도중이나 길을 걷는 중에 쓰러지곤 했다. “왜 하나님께서 그것을 고쳐 주시지 않는가?”라고 물어 오면, 나는 “나도 잘 모르지만, 확실한 건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픔을 주시는 성도들이 열매를 맺는다네.”라고 대답한다. 한 친구는 디트로이트에 있는데 내 눈이 말썽을 부려 힘들 때마다 나는 그 친구를 생각한다. 스무 살 때 그는 건축 현장에서 못 박는 데 쓰는 네일건(Nailer, “타카”)을 사용하다 못이 잘못 튕겨서 한쪽 눈에 박히는 바람에 그 눈을 뽑아내야만 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는 이 일로 나의 아버지께서 영화롭게 되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들이 되리라』(요 15:8). 당신은 10년 전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10년 전보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더 잘 견디고 있는가? 10년 전보다 성경과 기도에 더욱 전념하는가? 당신은 성장해야 한다. 2년 전보다 더 활발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전지가위를 꺼내어 당신을 상대로 가지치기를 단행하실 수도 있다. 가지인 당신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술 취함, 음행, 간음, 타락, 세상으로 돌아감과 같은 큰 죄들 때문이 아니라, 교만, 시기, 게으름, 부주의, 자기 동정과 같은 죄들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 작은 여우가 포도원을 망쳐 놓듯이, 당신이 작다고 생각하는 그 죄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징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징계하시는 네 번째 방법은 “매”나 “채찍”을 드시는 경우이다. 상상만 해도 아픈데 실제로도 많이 아프다. 나의 선친은 가죽 벨트를 쓰셨고, 어떤 이는 넓적한 빗이나 탁구채를 쓰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은혜와,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벧후 3:18) 자라가게 하는 좋은 도구이다. 옛날 미국 아버지들은 면도날을 관리하는 가죽숫돌로 자식들을 훈육했다. 미국 남부 지방에서 가장 많이 쓴 도구는 탄력이 좋은 복숭아나무 가지로 만든 매였다. 혹자는 “우리 집에 복숭아나무가 네 그루 있었는데, 아들 녀석들이 다 자랄 때까지 단 한 번도 복숭아를 따먹은 적이 없어!”라고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아동학대”라고 말하겠지만 구식 훈육을 받고 자란 나는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았다.


토페카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나는 잘못할 때마다 옛날 미국인들이 애용하던, 손잡이가 달리고 두꺼운 널판으로 맞곤 했다. 교감 선생님에게 그렇게 흠씬 맞고 나면 엉덩이가 터져서 바지가 엉덩이에 엉겨 붙어 버렸다. 너무 아파서 잘 걸을 수도 없었지만 엉거주춤 걷는 모습을 아버지께 보였다간 말썽을 부린 것이 들통나 또 한바탕 맞을 수도 있어서 애써 똑바로 걸었다. 그렇게 맞았어도,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건강하고 뼈가 부러지지도 않았다. 성경은 아이들을 매로 양육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말씀한다(잠 23:13,14; 20:30, 히 12:6).
한번은 해외에 선교사로 나갔던 자매에게 일어났던 일을 읽은 적이 있다. 그녀가 머나먼 선교지에서 몸이 아프게 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그 달에 선교위원회에서 지원금도 오지 않았다. 선반에 남은 것이라고는 말라 버린 우유와 오트밀뿐이어서 힘들었다고 한다. 그런 일을 겪고 난 후 본국에 와서 그 일을 회중에게 들려주었다. 간증이 끝나자 한 의사가 와서 물었다. “혹시 그때 겪은 소화 이상 현상을 의사가 뭐라고 부르던가요?” 그녀는 그 병명을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 의사는 “그때 음식이 다 떨어진 것은 천만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매님은 지금 여기 없을지도 몰라요.” 자매가 “왜요?”라고 묻자, 그는 그 소화 이상 증상에는 오트밀을 30일 동안 먹는 것이 가장 좋은 처방이라고 알려 주었다. 주님께서는 그 선교사를 도와주시려고 두 달 동안 오트밀만 먹게 하신 것이다.

밥 존스 시니어가 그의 아들이 만 두 살 반 정도 되었을 때의 일을 말한 적이 있다. 몇 주 동안 집을 비운 채 집회에서 설교하고 돌아왔고 그 동안 아들이 매우 보고 싶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비는 어디 있어요?”라고 물었는데, 아내는 “바비가 하도 말을 안 들어서 혼낸 다음 방으로 올려 보냈어요. 바비도 당신을 무척 보고 싶어 했어요.”라고 했다. 밥 존스도 “나도 그 녀석이 정말 보고 싶었소!”라고 했다. 아내는 “바비가 너무 말을 안 들어서 벌을 안 줄 수가 없었어요. 지금쯤 자고 있을 거예요.”라고 했다. 밥 존스는 아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아들은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고 마침 달빛이 밝아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큰 눈물방울이 아직도 얼굴에 남아 있었다. 밥 존스는 창문 너머로 달빛이 비치는 들판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나님,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 아이는 제 사랑하는 아들이고 저는 저 아이와 대화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저 아이도 저를 사랑하고 저와 이야기 나누길 원하고요. 그런데 아들이 행한 일 때문에 그럴 수가 없습니다. 지금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무엇보다 간절한데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비인 제가 아들 녀석보다 더 마음이 찢어집니다.” 밥 존스는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 물었다. “저를 채찍질하실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이렇게 마음이 미어지시겠죠?” 하나님의 아들이 된 그리스도인이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렘 31:20).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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