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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까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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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9월호>
『까마귀들이 아침에 빵과 고기를 저녁에도 빵과 고기를 그에게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더라』(왕상 17:6).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새들이 나오며 각각의 특징도 흥미롭게 기록되어 있다. 몇 가지만 살펴보면, 황새는 자기의 정해진 때를 알고(렘 8:7), 타조는 자녀를 돌보는 수고를 하지 않는 “부주의한 부모”의 모습을 보여 준다(욥 39:13-17). 또한 성경은 날개를 만들어 하늘로 날아갈 허무한 재물을 독수리에 빗댔고(잠 23:5), 고독한 처지는 펠리컨에 비유했으며(시 102:6), 밤매, 뻐꾸기, 박쥐 등은 식단 차림표에 등장하지 못하도록 했다(레 11:13-19, 신 14:12-19). 좀 더 덧붙이면, 새의 깃털은 옷이나 이동을 위해 적격이고, 눈의 위아래에 장착된 반투명 눈꺼풀은 날짐승에게 안성맞춤인 “붙박이 보안경”이다. 무엇보다도 새들의 어우러진 지저귐은 하늘나라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합창 같다. 새들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창조주이신가”를 알게 된다.
그런데 그런 경이로운 새들의 세계에서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악행을 응징하시기 위해 비를 주시지 않았을 때, 흉년과 기근이 뒤따랐고, 선지자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크릿 시냇가에 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도움을 받을 만한 넉넉한 이웃도, 식량으로 삼을 만한 산열매도 없는 황량한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숨어 지내던 동굴 입구에 앉아 물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새 떼가 다가오고 있었다. 옹골진 부리, 다부지고 긴 날개, 틈 없이 검은 전신, 거칠고 시끄러운 까악까악 울음소리. 다름 아닌 까마귀들이었다. 하나님께서 불결하다고 하신, 그래서 더럽혀지지 않으려면 먹기는커녕 피하는 게 상책인 까마귀들이 선지자의 머리 위에서 선회하다가 날개를 퍼덕이며 내려앉은 것이다. 그러더니 어떤 녀석들은 빵을, 또 다른 녀석들은 고기를 내려놓고는 다시 날아올라 가 버렸다. 얼마나 긴 기간이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아침과 저녁으로 식사 시간이 되면 까만 시중꾼들이 나타나 광야에서 그렇게 식탁을 차려 준 것이다.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그 빵과 고기가 어디서 왔느냐로 옥신각신한다. 아합 왕의 부엌에서다, 백 명의 선지자를 숨기고 먹인 궁의 장관 오바댜에게서다, 새끼들을 위한 먹이였다, 제의용이었거나 썩은 고기여서 선지자가 먹기에 부적합했다, 육식하는 까마귀에게 그런 일 자체가 불가능하니 까마귀가 아니라 아랍인들이었다 등으로 다투는 것이다. 한마디로 성경 기록만 아니면 뭐든 믿겠다는 자들의 망상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까마귀”가 날랐다고 쓰셨으면 “까마귀”인 것이다(계 22:18,19, 신 4:2, 잠 30:6). 창조주께서 까마귀들의 발톱에 식량을 쥐여 주셨고, 출발시키셨으며,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고, 또 누가 수취인인지 정확하게 알려 주셨다.
현재(1800년대 중반) 어디가 전장이냐는 물음에 독자들은 다뉴브강이라고 답하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내가 보기에는 템스강, 허드슨강, 미시시피강, 라인강, 나일강, 갠지스강, 황하강 등 모두가 거대한 격전지다. 이 전쟁으로 말하자면, 지난 6천 년간 계속되어 왔고, 현재 참전자의 규모는 약 12억 명이나 되며, 무엇보다도 그간의 전사자 수는 셀 수조차 없으니, 바로 “생계 전선”이다. 상점과 공장 등 사업장 곳곳에서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가족을 돌보고, 교회를 지원하며, 어려움에 부닥친 지체들을 후원하는 대표 전사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현 정부의 외교 정책이나 국제 정세가 아니라, “내 가족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 “어떻게 집세를 내고 아이들 교육비를 마련할 수 있을까?” 등에 있다. 당신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지혜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까마귀들에게 거기서 너를 먹이도록 명하였느니라』(왕상 17:4). 기록된 그대로 하나님께서 까마귀들을 직접 부리셔서 양식을 배달하게 하셨다. “필요한 물품”을 “필요한 시간과 장소”에 딱 맞게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필요 또한 채우신다! 그분께서는 성도인 당신의 아버지이시지 않은가! 당신은 목록을 만든 뒤 꼼꼼하게 계산기를 두들겨야 가족들에게 음식과 옷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알지만, 하나님께서는 셈할 필요도 없으시다. 하나님의 식탁에는 당신의 접시가 놓여 있고 때에 맞게 음식을 담아 주신다. 밥상에서 버릇없고 건방지게 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가족을 먹이시는데, 그 일을 순서와 질서에 따라 하시기 때문에 차분하게 기다리면 당신의 차례도 반드시 온다. 당신이 먹어야 할 모든 음식과 입어야 할 모든 의복, 심지어 죽음의 침상에서 넘기게 될 마지막 빵 한 조각과 수의까지도 이미 주문해 두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들이 당신이 원하는 바와 다를 수 있다. 의식 있는 부모는 자녀가 무엇을 먹어야 하고 어떻게 입어야 할지 잘 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이들이 식사를 앞둔 상황에서 단 것을 달라며 조른다고 덥석 쥐여 주지 않으며, 점잖은 자리에 가는 데 운동복을 입고 싶어 한다고 멋대로 입게 놔두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자녀인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되, 어리석은 우리가 간절히 원한다 해서 경우에 맞지 않는 것까지 허락하시지는 않는다. 본문의 까마귀들은 알알이 곱고 예쁜 석류가 아니라 빵과 고기를 가져왔다. 하늘들과 땅과 바다에 있는 모든 것을 가지신 분께서 그것이 엘리야에게 가장 좋은 음식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실의에 젖어 있지 말고 힘을 내라! 바로 그 하나님께서 당신을 돌보신다! 하나님께는 불경기가 없고, 주님의 보급선은 좌초되지 않으며, 그분의 은행은 절대 도산하지 않는다.
까마귀들이 아침과 저녁 두 차례에 걸쳐 당일에 필요한 양만 날라 주었음을 유념하라.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안달하면서 까마귀들이 한 50년 치 식량을 한꺼번에 가져다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한 마음가짐은 “검은 까마귀 말고 황금 독수리로 주세요.” 하면서 하늘나라에 있는 왕의 은행이 아니라 시내에 있는 은행을 더 믿는 것과 같다(히 13:5). 신실하신 하나님의 확약을 의심하지 말라! 당신이 가족의 다음 끼니를 어떻게 장만해야 할지 막막할 때, 하나님께서 까마귀들을 인심 좋은 푸줏간 주인과 빵 가게 주인으로 삼으셔서 큼직한 고깃덩이와 빵을 들려 보내실 것이다.
하나님의 창고는 바닥나는 일이 없으니 조바심을 내지 말라. 몇 세대 전에 코네티컷주에 심한 가뭄이 들었다. 언덕 위에 있는 물이 마르자 그곳 농부들은 가축을 몰고 계곡에 있는 마을로 내려가 물을 먹였다. 하지만 거기서도 이제 곧 우물이 말라 가니 더는 안 된다고 알려 왔다. 나이 지긋한 한 그리스도인 농부가 그 소식을 듣고는 가족들을 모아 놓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자 다들 흩어졌고 노인도 바깥으로 나갔다. 그런데 얼마 걸어가지 않은 지점에서 평소와 다른 점을 발견했다. 지면의 색이 유난히 짙어서 짚고 간 지팡이로 흙을 파 보니 물이 스며 나오는 것이 아닌가! 노인은 가족들을 불러서 먼저 양동이로 퍼 날라 물통을 채우게 했고 가축들에게도 먹였다. 그런 다음 거기에 우물을 만들었는데, 그 우물은 지금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어려운 형편으로 마음이 짓눌려 있는가? 불가능한 것이 없으신 하나님께 사정을 그대로 아뢰고 우물을 파라. 만일 당신이 낙심한 가운데 이미 하나님을 법정에 세워 “잔인죄”로 판결했다면, 나는 재심을 청구하는 바다! 당신의 생애가 낱낱이 기록된 전기가 있다면, 첫 장과 가운데 장과 마지막 장에 무엇이 기록됐을지 나는 안다. 바로 첫 장도 자비, 가운데 장도 자비, 마지막 장도 자비에 대해 쓰였다고 장담할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 생애가 “자비”로 덮여 있다고 해야 맞다(시 103:8-18).
또 하나 인상적인 부분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됐다는 점이다. 만약 붉은 가슴의 울새, 지저귐이 남다른 종달새, 온순한 산비둘기, 활공의 왕 앨버트로스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배달했다면 그리 놀라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까마귀”라니! 그 새가 얼마나 사납고 못마땅한 존재였으면 “까마귀”(raven)라는 단어에서 “게걸스러운”(ravenous)이라는 강렬하고 혐오스러운 표현까지 파생됐겠는가! 으레 마음이 따뜻하고 인정스러운 누군가가 나타나 당신을 도우리라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고리대금업자 같은 사람의 마음을 여셔서 돕게 하실 수도 있음을 기억하라.
사실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색깔”에 대해 선입견을 품고 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장밋빛 꽃길처럼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짙은 것이다. 어떤 가정에 태어난 아기가 어찌나 귀하고 사랑스러웠던지 금세 부부의 눈과 마음을 독차지해 버렸다. 그런데 그 아이가 “성홍열”(전염병)에 걸리고 말았다. 엄마의 치마를 붙잡고 따라다니던 종종걸음도, 쉴 새 없이 엉뚱한 질문들을 쏟아 내며 재잘대던 소리도 모두 멈췄고, 집안에 화사함이 죄다 사라졌다. 끙끙 앓던 아이는 결국 하나님의 품에 안겼고, 부모의 눈과 마음까지도 그 보물을 취해 가신 그분께로 옮겨가게 되었다. 다시 하늘나라를 소망하게 됐고, 마음은 전보다 더 순수하고 따뜻해졌으며, 고통을 견디는 데도 더 의연해진 것이다. 이 거룩한 변화가 어디서 왔는가? 아이의 요람을 뒤덮은 그늘, 바로 그 “까마귀” 때문이었다(시 119:71). 즐거운 마음만이 아니라 상한 마음도 주님께서 주시는 복이자 선물임을 잊지 말라.
자신의 지혜와 경험을 신뢰하지 말고 초조해하거나 염려하지 말라.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의 구하는 것들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알려지게 하라』(빌 4:6). 그러면 설령 그런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주님께서 당신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빌 4:7). 다시 강조하건대,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당신의 길이나 생각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높은 길과 생각을 갖고 계신 하나님께(사 55:8,9) 주저하지 말고 아뢰라. 주님께서 당신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곧 가장 적절한 것으로 베풀어 주실 것이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은 하나님께서 아무리 많은 까마귀를 준비해 두셨을지라도 빈둥대거나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 보내실 까마귀는 한 마리도 없다는 사실이다.
자비로우시고 선하시며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 지상과 영원에서의 삶 전부를 맡기라. 죄, 슬픔, 후회, 낙담, 염려, 두려움 등이 사방에서 수시로 에워싸겠지만 그때마다 위를 바라보라. 우리의 질고와 슬픔과 허물과 죄악을 위해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상흔을 지니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하시니, 오직 그분만 바라보라!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