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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으라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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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7월호>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으라. 이는 너희가 악한 날에 저항할 수 있으며 또 모든 일을 다 이루기까지 서 있게 하기 위함이니라』(엡 6:13).에베소서 6:10-18에 나오는 “영적 전쟁”에 관한 메시지는 정말 “마법 같은” 메시지다. 나는 이 메시지로 미국의 주요 근본주의 혹은 보수주의 대학교들에서 설교했는데 그 후로 설교 초청이 끊겼다. 전쟁을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3대에 걸쳐 미 육군 장교 집안이다 보니 전투에 대해 좀 안다고 할 수 있고,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을 “호전적인 근본주의자”라고 부르기 때문에 이런 메시지를 좋아할 줄 알았다. 1951년에는 모교인 밥존스대학교에서 이 메시지로 설교했는데 그 이후로 다시는 초청받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테네시 템플대학교, 미주리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성서침례친교회, 텍사스주 알링턴의 세계침례교친교회에서도 설교했지만 다시는 초청받지 못했다. 또한 플로리다주 탬파에 있는 트리니티대학교에서 빌리 그래함이 참석했던 집회에서도 설교했지만 역시 다시는 초청받지 못했다. 당신이 어떤 기독교대학교에서 초청받았는데, 다시는 그곳의 초청을 받고 싶지 않다면 이 메시지로 설교하면 된다. 이에 반해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여러 교회에서 이 메시지로 전파했을 때는 그들 모두 이 설교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고마워했다. 기독교대학교, 신학교, 신학대학원 등에서만 이런 메시지를 견딜 수 없어 했던 것이다.
앞선 에베소서 본문은 1세기의 로마 병사가 입었던 갑옷을 묘사하고 있다. 내가 집필한 <신약교회사>에서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의 “전투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독일군 돌격대원에 빗댔더니 “개리 허드슨”이라는 친구가 “감히 어떻게 이 선하고 경건하며 영적인 사람들을 나치 돌격대원에 비유할 수 있소!”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지상에서 살았던 사람 중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1세기의 로마 보병에 빗댄 것을 잊은 것이다. 당신 생각에는 로마의 보병들이 두루두루 덕을 갖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가? 교양 있고 단정하며 영적이고 경건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바울은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으라.』(엡 6:13)라고 말했다. 이 “전신갑옷”은 로마 보병이 입는 갑옷이다. 클라우제비츠나 폰 몰트케 같은 전쟁 전문가들은 “보병”을 가리켜 “전투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사병들이나 부사관들에게는 보병이 여왕이 아니라 그저 “졸”(卒)에 불과하다. 체스판에서 “졸”(pawn)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경험 많은 체스 선수는 “졸”을 적절히 배치하여 왕에게 “체크메이트”(장)를 부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보병”인 것이다.
전쟁은 끔찍하다. 남북전쟁 당시 북군 소속의 윌리엄 T. 셔먼 장군은 “전쟁은 지옥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성경을 믿는 우리는 전쟁이 문자 그대로의 지옥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상에서는 지옥과 가장 유사한 현실이 “전쟁”이라는 점은 틀림없다. 전쟁에서 볼 수 있는 구더기, 유혈 사태, 불, 배설물, 쓰레기, 재, 고통, 테러, 공포 등의 요소가 지옥과 너무나 유사한 것이다. 밥 존스 시니어는 “전쟁은 현 세상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고, 지옥은 사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나는 이 말을 “믿음의 근본 사항” 중 하나로까지 여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딤후 2:3)이기에 “군사”로서 잘 훈련되어야 한다(딤후 2:4). 성경에는 전쟁에 관한 비유가 정말 많이 나온다. 나는 성경에 서명해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여호수아 1:9”의 말씀을 써 준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군대 대장”에게 주신 명령이다. 『내가 네게 명령하지 아니하였느냐? 강건하고 담대하라. 무서워 말고 낙심치 말라. 이는 주 네 하나님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함이라.』 이 명령은 “전투적인 명령”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교회들을 보면서, 병기를 들고 전투를 수행하도록 훈련받아 주님을 위해 전쟁할 준비가 되어 있는 군대를 떠올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대형 어린이집이나 양로원 혹은 사교 모임이나 극장을 연상하기가 더욱 쉬울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교회는 분명 싸울 준비가 된 무장한 군사들의 군대이어야 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진리를 분명하게 이해했다. 찬송가 작곡가들도 이해했다. 그래서 예전에 작곡된 찬송들은 대부분 “행진곡풍”이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 음악은 재즈, 팝송 따위의 경음악이나 사랑을 소재로 한 발라드 또는 록 음악이다. 군사적인 요소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아 군병 같으니’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찬송가를 제대로 부를 수 있는 찬양대를 구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찬양대에 속한 사람 중에 ‘병역 기피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실로 옳은 말이다!
나는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실제 군인처럼 훈련받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군 복무 시절 일본에 배치받기 전에 나는 “육박전”과 “무기 없이 싸우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늘에서도 섭씨 43도에 육박하는 날씨에 연병장에서 훈련을 받는 300명의 훈련병에게 나는 고함을 치며 호령했다. 확성기로 말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육성으로 했다. 나는 병사들에게 손에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그것을 가지고 적과 싸우고 적을 죽이는 방법을 가르쳤다. 또한 그들에게 칼집에서 칼을 빼서 실전처럼 총검술 연습을 시키기도 했다. 어떤 때는 대대장이 지나가다가 보면서 너무 위험하니 칼집에 넣은 채로 훈련하라고 지시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실전처럼 훈련해야 합니다. 칼집에 넣은 채로는 실전과 같이 훈련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훈련병들에게 온갖 욕을 해 가며 일부러 그들을 화나고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요소들이 나의 초기 설교 내용에도 녹아 들어간 것 같다. 지금은 그때만큼 혹독하게 설교하지는 않는다. 그 누구라도 1950년에서 1952년 사이에 내가 했던 설교를 듣게 되면 정말 “혹독한 설교”라고 여길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을 그런 식으로 훈련할 수는 없다. 아마 대부분 견뎌 내지 못할 것이고, 이런 식의 불평불만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교관님, 오늘 저는 훈련을 못 할 것 같습니다!” “왜 못하는데?” “저에게 이렇게 소리를 지르며 욕하는 사람한테서는 훈련받을 수 없어요!”
미 육군에서 복무할 당시 “맥스 쉐닝”이라는 중대장이 있었다. 그는 독일계 미국인으로 “턱뼈”가 삽처럼 생겼고 “팔목”은 일반인 허벅지만큼이나 굵었다. 그는 낙하산 부대원으로서 스키를 타고 알류샨열도에서 싸웠다. 한번은 산에서 발을 헛디뎌 약 180m 아래로 떨어진 적이 있는데, 그 부상으로 인해 병원에서 6개월 동안 입원해 있어야 했고, 갈비뼈, 턱뼈, 코뼈, 발목뼈 등이 부러졌으며, 온몸에 찢기고 멍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 그가 퇴원한 이후에 어떻게 했는지 아는가? 다시 알류샨열도로 가서 스키를 신고 산들을 타며 영하의 날씨 속에서 계속 복무했다. 그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었다. 구원받지 않은 그 군인도 당시 군 통수권자였던 루스벨트 대통령을 위해 그런 극한의 상황을 견뎌 냈는데, 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누가 조금만 기분 나쁘게 해도 교회에 안 나와 버리는 것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무장해야 할 “방어용 무기”가 세 가지이지만 “공격 무기”는 하나밖에 없다. 우선 『의의 흉배』(엡 6:14)는 심장을 보호하고, 『구원의 투구』(엡 6:17)는 머리를 보호하며, 『믿음의 방패』(엡 6:16)는 다른 모든 부위를 보호한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이 지니는 단 하나의 공격 무기는 『성령의 칼, 곧 하나님의 말씀』(엡 6:17)이다. 모든 전투에는 두 가지 요소밖에 없는데, 곧 “공격”과 “방어”다. 모든 종류의 무술과 군사 훈련에도 이 두 가지 요소만 존재한다. 일본의 “가라테”나 한국의 “합기도” 같은 경우에도 공격을 위한 “펀치”와 방어를 위한 “막기 기술”이 있다. 단검으로 싸울 때도 방어 시에 칼 잡는 방법과 공격 시에 칼 잡는 방법이 다르다. 필리핀의 “봉술”에서도 날아오는 봉의 타격을 막아 내는 기술과 봉으로 공격할 때의 기술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성도들이 싸우는 영적 전쟁에서 “공격과 방어,” 이 두 가지를 다 잘하는 그리스도인은 드물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출중하여 이런저런 공격을 다 막아 내지만, 주님을 위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반면에 어떤 그리스도인은 공격적으로 주님을 위해 싸우지만, 마귀가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완전히 망가져 버리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능히 공격과 방어 모든 방면에서 뛰어나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전투태세를 갖추고 살아야 하는데, 이를 위한 기본적인 자세가 “서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 6장에는 “서다”(stand)라는 동사가 “세 번”이나 나온다(11,13,14절). “무술”에서는 전진을 위한 자세와 기마 자세가 있고, 또 여러 가지 공격과 방어를 위한 자세들이 있다. 올바른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상대방이 힘을 크게 쓰지 않고서도 당신을 쓰러뜨릴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의 문제도 바로 여기에 있는데, 곧 올바른 자세를 취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것이다.
“총검술”에서도 각 동작에 맞는 특정한 자세가 있고 모든 자세는 기본적으로 전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뒷발을 앞으로 움직이면서 취하는 “길게 찌르기” 동작이 있고, “길게 찌르기”에서 다시 “짧게 찌르기” 동작을 하고, “수직 개머리판 찍기”와 “수평 개머리판 찍기” 등의 동작도 하는데, 그 어디에도 후퇴하는 동작은 없다. 모두 전진을 위한 동작만 있는 것이다. 뒤에서 누가 공격한다 해도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뒤로 돌아 다시 앞으로 나가면서 공격하는 상대방과 싸우는 것이다. 혹자는 “그게 성경과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이에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형제들아, 나는 내가 붙잡은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다만 한 가지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에 손을 뻗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고귀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그 푯대를 향해 쫓아갈 뿐이라』(빌 3:13,14). 과거에 파묻혀 상처나 핥으며 살지 말고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나는 독일인 “브롱호스트” 소령에게서 훈련을 받았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당시 무술로 검은 띠를 받은 백인은 다섯 명밖에 없었는데 그는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훈련장에 항상 검은 띠를 매고 나타났으며,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에도 철모나 전투모를 쓰지 않고 호령했다. 술과 담배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욕지거리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 나는 필리핀 정찰병들을 훈련하는 임무를 맡았을 때, 브롱호스트 소령이 나를 훈련했던 것처럼 그들을 훈련했다. 훈련병들은 정글의 열기와 습기를 참으며 훈련받아야 했다. 총검술 훈련 시에는 “찔러!”라고 호령한 뒤에 그 동작을 그대로 유지하게 했는데,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팔에 힘이 빠지면서 전방으로 뻗은 총칼이 아래로 처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큰 소리로 “올려!”라고 외쳤고, 또 얼마 안 있다가 다시 아래로 처졌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는지 어떤 훈련병은 “소위님, 제가 지금 너무 많이 아픕니다!”라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묻곤 했다. “진단서 있나?” “없습니다!” “그럼, 다시 올려!”
그런 다음 그 훈련병들에게 약 5kg의 무게가 나가는 소총을 머리 위에 올리고 연병장 어느 한 지점까지 뛰어갔다 오게 했다. 내게 아프다고 말했던 그 훈련병은 270m 정도까지 달려가다가 그대로 머리를 앞으로 처박고 넘어지더니 기절하여 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다른 훈련병들이 내 얼굴을 쳐다봤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봤나? 정말로 훌륭한 군인이다! 쓰러질 때까지 달리지 않았는가!” 여자처럼 허약한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신이야말로 성경을 너무 안 읽어서 잘 모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마 26:39)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공격을 받았을 때 넘어졌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계속 쓰러져 있어서는 안 된다. 다시 일어나 하나님을 위해 전진해야 하는 것이다.
군인이라면 당연히 용기가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용기를 품어야 한다. “용기”가 무엇인가? 이것은 두려움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용기라고 하는 것은 무서워 죽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도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다. 무섭지 않은 사람은 용기를 발휘할 수도 없다. 용기 있는 사람은 무서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며 전진하는 사람이다. 모든 보병이 때때로 공포를 느낀다.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전장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 것이고, 또 그런 사실로 인해 정말 무서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용기”인 것이다! BB [다음 호에 계속]